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과학적 철학과 철학의 자연화

강형구 2022. 2. 19. 14:22

   일반적으로 ‘과학적 철학(scientific philosophy)’ 개념은 논리경험주의자들이 제시했고, ‘자연화된 철학(naturalized philosophy)’ 개념은 하버드 대학 출신의 미국 철학자 윌러드 콰인이 제시했으며, 콰인은 논리경험주의에 결정적인 반박을 가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나는 관련 문헌들을 읽으면서 실제로 콰인의 입장은 논리경험주의 전체가 아닌 카르납의 입장에 대한 반박이었으며, 라이헨바흐가 제시한 ‘과학적 철학’ 개념은 콰인의 ‘자연화된 철학’ 개념과 그다지 상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두 개념이 완전히 같지는 않고 세부적인 측면들에서는 당연히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두 개념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 같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논문들을 몇 편 살펴보면서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철학적 논쟁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로서, 몇몇 중요한 철학적 논쟁은 논쟁하는 사람 A와 B가 서로 의견을 일치하지 못하고 서로의 입장에 대해서 오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엇나간’ 혹은 ‘귀머거리의’ 논쟁인 것으로 밝혀진다는 것이다. 나는 철학적 논쟁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관점에 적잖이 동의한다. 토머스 쿤이 논리경험주의를 오해한 것, 아인슈타인과 라이헨바흐가 서로를 오해한 것, 라이헨바흐와 카르납이 서로를 오해한 것, 카르납과 콰인이 서로를 오해한 것 등등이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오해’를 이야기하는 논문들의 결론에 대해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철학적 논쟁들이 상호 간의 오해를 좁히지 못하고 급기야는 더 심화시켰다는 것이 일종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서로 다른 철학적 입장을 전개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오해는 필수적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방과는 다른 나의 입장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이든 그 시대의 철학자들은 이전 시대의 철학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과거의 철학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시대에 맞게 새롭게 재구성해서 받아들인다. 어쩌면 논리경험주의에 대한 왜곡된 평가 역시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 모른다. 논리경험주의 이후의 세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논리경험주의와는 차별화되는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과학철학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내 생각에 ‘결국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 사이의 논쟁은 엇나간 논쟁이었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A와 B 논쟁 사이의 승자가 A라고 간주되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해서 오히려 B가 승자라고 본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실제로 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아인슈타인과 라이헨바흐 사이의 논쟁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에 반대하여 라이헨바흐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아인슈타인-라이헨바흐 논쟁은 ‘귀머거리의 대화’라는 정도의 결론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라이헨바흐 역시도 물리학 이론의 물리적 참됨은 개별 진술들이 아니라 이론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고(이론의 의미에 대한 전체론적 관점)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라이헨바흐가 제시한 ‘과학적 철학’의 개념이 전통적인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한 인지과학적 탐구를 부정할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라이헨바흐가 말하는 ‘과학적 철학’이란, 개별 과학에서 등장하는 구체적인 탐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인식론적 논의를 진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때 더욱 흥미로운 주제는, 라이헨바흐와 콰인 모두 개별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철학의 개념을 새로 고안하고자 했다는 것이며, 두 사람이 제시한 새로운 철학 개념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