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1920년대 후반기의 자연철학

강형구 2022. 2. 9. 09:38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의의에 대한 아인슈타인-라이헨바흐 논쟁을 검토한 후, 요즘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주제는 ‘1920년대 후반기에 과학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과학철학 혹은 자연철학의 역할과 기능’이다. 당시 많은 수의 학자들이 이 주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펼쳤는데, 내가 특히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슐리크, 라이헨바흐, 카르납의 견해이다. 1930년대 초반부터 나치즘을 피해 유럽의 과학철학자들이 영국, 미국 등지로 이주를 하게 되는데, 그와 같은 이주 직전까지 이들이 과학철학(자연철학)의 기능과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를 들여다본다.

 

   디테일(세부사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하게 된다. 100년과 같이 긴 시간 간격이 아니라 순차적인 시간 속에서 들여다보면 단절성보다는 연속성이 더 잘 보인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입장을 살펴보면, 설혹 이들이 하나의 학파에 속해 있더라도 서로의 입장이 각각 다름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독일의 자연과학이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칸트로 돌아가자’를 주장한 철학적 물리학자였고, 막스 플랑크는 헬름홀츠의 제자이며 동료이기도 했다. 플랑크 또한 철학적 물리학자의 전통을 이었으며, 슐리크 역시 그 연장선 상에 있다. 플랑크가 아인슈타인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 아인슈타인을 베를린 대학으로 초빙했던 것 또한 그가 철학적 물리학자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논리경험주의의 관점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한 중요한 학자들은 푸앵카레, 힐베르트, 아인슈타인, 바일, 러셀이다. 그러나 이 학자들이 각론의 관점에서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면, 과학철학 혹은 자연철학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경험주의의 생각은 이와는 다른 원천을 얻는다. 비록 선험적 종합에 대한 칸트의 견해가 오류임이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과학적 지식의 근거를 따져 묻고 이를 통해 자연 지식의 통일성과 체계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칸트의 철학적 목적은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자연과학이 겉보기에 이런저런 분과들로 분화되어 복잡하고 무질서한 것처럼 탐구되지만, 이러한 겉보기의 무질서함은 철학자의 성찰에 의해 통일되고 종합되며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이 제시된다.

 

   비록 슐리크가 논리경험주의자의 창시자로서 알려져 있고 그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슐리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이 아니라 이 철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유했다. 슐리크는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 이후에도 전통적인 과학철학자의 면모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슐리크에 따르면 과학 활동과 철학 활동은 분리될 수 없으며, 철학 활동은 개별과학이 얻은 세계에 대한 그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명하여 이에 기반한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철학을 통해 새로운 과학 지식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은 철학적 활동을 통해 우리가 얻은 과학 지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결국 슐리크는 과학이 존재하는 한 과학 철학적 탐구 역시 함께 존재한다고 본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1922년)가 그 자신의 맥락 속에서 작성되어 그 자신의 맥락 속에서 세상에 나왔듯,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철학 역시 고유의 맥락 속에서 성장하여 독창적인 방식으로 [논고]의 영향을 전유했다. 카르납의 [세계의 논리적 구조(구성)](1928년) 또한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독창적인 전유였다. 그 영향의 정도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라이헨바흐에게 영향을 준 순서를 따지자면 힐베르트>러셀>비트겐슈타인인데, 사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은 거의 없다. 그런데 전통적인 과학철학과의 친근성 관점에서는 라이헨바흐보다는 슐리크가 더 강하다. 슐리크가 라이헨바흐보다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면 무엇보다도 디테일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