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국의 올덴버그를 꿈꾼다

강형구 2022. 1. 14. 11:26

   나는 블로그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통 채널을 대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태도들을 긍정하는 편이다. 그러한 다양성을 긍정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다양성을 긍정하기 때문에) 나의 입장은, 소통 채널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특정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알아볼 수 있는 담론의 장으로 활용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나의 입장은 나의 실천을 통해 실제로 드러난다.

 

   요즘 내가 놀라움을 느끼는 하나의 사실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재작년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 적이 있다. 왜 아인슈타인 회전 원판 사고 실험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측정 막대는 가만히 있던 측정 막대에 비해 줄어들어 있지 않은가? 이에 반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시계는 가만히 있던 시계에 비해 더 ‘늦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나는 예전의 그 질문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시계의 시간 ‘단위’는 여전히 가만히 있던 시계의 시간 ‘단위’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의문 제기가 전적으로 나 자신의 고유한 추론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추론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사한 의문 제기가 이미 아인슈타인과 다른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20세기 전반기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최근의 물리 철학 논문들을 읽으면서 확인하고 있고, 이러한 확인은 나에게 아주 큰 지적인 기쁨을 준다. 왜냐하면 나는 전혀 지적으로 특출난 편이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상대성 이론에 대해 설명하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에는, 상대성 이론을 제시한 당시의 물리학자들이 철학적으로 고민했던 여러 주제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 속 일반 공변성을 추구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에 남아 있던 물리적 객관성의 잔여물이 사라졌다는 주장, 물리학에서의 좌표들이 직접적인 측정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주장, 오직 관측가능한 점-일치들만이 물리적 객관성을 갖는다는 주장, 시계와 막대와 같은 측정 도구들을 이론 속 독립적인 개념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잠정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내가 볼 때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공통적인 문제다.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철학적인 문제 의식을 가지고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처럼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문제들과 이 문제들에 대해 고민했던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연구를 하는 학자들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학자들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이러한 종류의 연구를 한국의 친구들(나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들이 많지만)에게 소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국의 ‘올덴버그’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분야가 과학사와 과학철학 쪽으로 한정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 ‘천재’라는 상투적인 프레임을 벗고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풍부하게 아인슈타인의 과학철학을 그리고 있는 오늘날의 학자로 돈 하워드(Don Howard), 토머스 리크먼(Thomas Ryckman), 마르코 지오바넬리(Marco Giovanelli)가 있다. 상대성 이론의 역사를 연구한 존 스태철(John Stachel), 존 이어먼(John Earman), 존 노튼(John Norton), 미셸 얀센(Michel Janssen), 위르겐 렌(Juergen Renn) 역시 중요하다. 물리학자이자 역사가였던 제럴드 홀튼(Gerald Holton)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중요한 연구를 우리 스스로의 힘과 생각으로 소화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우리의 언어로 공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