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철학의 매력

강형구 2022. 1. 4. 20:30

   때때로 나는 내가 조금만 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만약 우리 집안에 아들이 나 말고 한 명 더 있었더라면, 그래서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아들을 믿고 나는 그저 철학 공부만 열심히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집안이 부유해서 경제적인 걱정은 하지 않고 계속 철학 공부만 하고 있는 분도 계신다. 가끔은 내가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게 여겨질 때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법학을 전공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 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내가 원칙주의자여서 그러셨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한 후 그 선생님을 찾아 뵙고 향후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했더니(인문대학 소속인 국사, 동양사, 서양사, 고고미술사, 미학, 철학, 종교학 등 7개 학과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곧바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철학 전공해서 뭐해 먹고 살래?”였다. 부모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고, 내가 졸업할 때쯤 철학과 졸업생들 중 상당수가 취업을 힘들어했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을 공부해서 먹고 살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인가보다.

 

   하지만 철학이라는 학문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어떤 학문 분야와 관련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마음 편하게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아주 근본적인 질문들을 그 분야 전공자들 사이에서 던진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느낄 수 있는 인식적 행복은 의외로 상당한 편이다. 그래서 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생물학자 등과 같은 자연과학자들 또한 해당 자연과학에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해당 전공 분야의 전문적인 논의에서는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갖는 질문은 가령 이런 것이다.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전개한 상세한 과정이 궁금하다. 내가 일정한 중력장 아래에서 자유낙하 하면 아주 미소한 시간과 공간 구간에서 나는 내가 관성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내가 지구 크기만큼 아주 큰 원판 위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면, 설혹 내가 등속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미소한 시간과 공간 구간에서 나는 아주 미미한 관성력(원심력)을 느끼며 심지어 내가 회전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사고 실험은 우리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사고 실험을 수학의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이 등가 원리 사고 실험, 회전 원판 사고 실험을 리만 기하학의 언어로 번역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이렇게 물리적 사고 실험을 수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연역적인 것일까 아니면 개연적인 것일까? 만약 개연적이라면, 사고 실험은 단지 발견법적(heuristic) 역할을 했을 뿐이라면, 이론의 정확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발견법적 사고 실험보다는 수학적 형식론 그 자체를 봐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리만 기하학의 기원은 무엇인가? 추상적, 수학적 사고 능력인가 아니면 그러한 기하학 자체도 경험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런 종류의 질문을 던질 때마다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한 친구들은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있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고, 철학이라는 학문은 이런 쓸데없는 질문과 생각을 하는 것을 허락했다. 아마도 나는 이러한 철학의 근본적인 측면, 자유로운 측면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