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노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강형구 2021. 12. 30. 15:18

   과연 박사학위 논문이란 무엇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시기다. 오늘과 내일은 내게 남은 2021년 마지막 연차휴가다. 아침에 세 아이들을 모두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주어진 자유시간에 집 근처 카페에서 박사학위 논문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의 마지막 날인 내일까지 지도교수님께 내 학위논문의 주요 장들(Chapters)을 제출해야 한다. 원고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어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정리된 글들을 다시금 읽어보며 교정하고 있다. 현재로서 나의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총 11개의 장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서론과 본론을 빼면 실질적으로 9개의 장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는데,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주요 장은 총 5개의 장이다.

 

   내년 상반기까지 남은 4개의 장을 완성한 후, 내년 하반기에 논문심사를 받을 계획이다. 논문심사에서 통과가 되면 2023년 2월에 학위를 받게 된다. 내가 2011년 3월에 박사과정에 입학했으니, 입학 후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 된다. 어쩌면 1년 정도 더 늦어질 수 있고, 최악의 경우 학위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대학 시절부터 나는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저 나의 노력이 과학철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논문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내가 무엇하나 특출하게 잘 하는 게 없다는 것이다.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학문 연구를 하고 있지만 연구 역시 잘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과 연구 모두에서 겨우 평균 정도(사실 약간 그 이하일 수도 있다)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나의 장점은 성실함인데, 그 성실함마저도 매년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내가 과학철학 분야에서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하게 연구하는 것뿐이다. 나는 읽고 정리하고 해설하는 일을 잘 하므로, 나는 내가 국내 연구자들이 연구를 해야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는 역사적인 텍스트들을 읽고 정리하고 해설을 하면 그 일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나는 과학철학의 고전을 번역하는 일도 잘 해낼 수 있다. 번역 작업은 비교적 고된 노동이라고 할 수 있고, 나는 그러한 노동을 규칙적으로 성실하게 해낼 자신이 있다.

 

   나는 박사학위를 일종의 전문 자격증이라고 생각한다.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면 좀 더 권위 있는 방식으로 해당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당연히 모든 박사들이 뛰어난 연구 성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박사학위는 뛰어난 연구를 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런데 뛰어난 연구를 하는 사람들만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평범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연구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20세기 전반기의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드물기 때문에, 비록 능력이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명감만을 가지고 연구할 수는 없다. 이 분야에 대한 나의 관심과 흥미가 식을 줄 모르기 때문에 연구를 한다.

 

   그런데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고된 노동이다. 석사과정을 포함해서 대략 10년의 노력을 들여야만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써야만 학위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쓰든 외국에서 쓰든, 한국어로 쓰든 외국어로 쓰든, 박사학위 논문은 해당 학문 분야에 제대로 된 전문가로 입문하여 앞으로도 그 학문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 대학에 소속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그 학문의 전통을 잇고 그 전통을 후속 학자들에게 이어주어야 한다는 임무를 갖게 된다. 나는 과학철학과 관련하여 이러한 학문 전통 계승의 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