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논리경험주의 드라마

강형구 2022. 1. 29. 10:01

   휴직 후 집안일과 애들 돌보기를 주로 하고 있는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드라마는 "논리경험주의" 드라마다. 어떻게 그런 드라마가 가능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20세기 전반기의 과학철학사를 연구하는 나에게 이보다 더 흥미로운 드라마는 없다.

 

   철학사조로서의 논리경험주의를 서술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논리경험주의자들의 특징적인 면모를 기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리크 슐리크는 막스 플랑크 아래에서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철학으로 전향했다. 플랑크의 회고에 따르면 슐리크는 매우 뛰어난 제자였다. 필립 프랑크는 어떤가? 프랑크 또한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철학으로 전향했다. 오토 노이라트는 경제학자였고, 한스 한은 수학자였다. 한스 라이헨바흐는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공학, 물리학, 수학, 철학을 공부했고, 철학 교수와 수학 교수의 공동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루돌프 카르납은 물리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들어갔다가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수리논리학에 열광했던 인물이다.

 

   이렇듯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철학자들에 속하긴 했지만, 전통적인 강단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이단아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전통적인 강단 철학이 수학 및 정밀과학의 성과들과 점점 더 멀어지는 상황을 비판하면서, 경험과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새로운 종류의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했다는 데 있다. 특히 이들이 강조했던 것은 철학 역시 일종의 “과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생각했던 “과학”의 핵심적인 특징은 문제 및 이의 해결에 대한 광범위한 의견 일치가 가능하고 그런 의미에서 “협력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처럼 철학자 개개인마다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철학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문제들을 최대한 구체화하고 정확하게 표현된 진술들을 사용함으로써 눈앞에 산적한 인식론적 문제들을 협업을 통해 객관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철학의 과학화’가 ‘과학에 대한 철학의 종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과학이 발전하면서 이로부터 철학적 문제들이 끊임없이 생성된다. 이처럼 과학으로부터 비롯되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탐구 및 해결’이 논리경험주의자가 생각했던 철학의 과학화이다. 나는 과학철학자와 과학자 사이의 관계가 경제학자와 경제 주체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특정 사회에 소속된 모든 주체들은 경제적 활동을 하는데, 이러한 경제 주체들의 행태를 기술하거나 이 행태 근저에 있는 원리를 밝히는 것은 경제학자가 하는 일이다. 하지만 늘 경제 주체들의 활동이 우선이며, 경제학자의 이론적 작업은 경제 주체들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언정 경제 주체들의 실질적인 경제 활동을 대체할 수 없으며 그 활동을 완벽하게 규정할 수도 없다.

 

   어쨌든, 20세기 전반기의 “논리경험주의”는 이처럼 전통 강단 철학에 반기를 들며 새롭게 등장한 철학 사조였는데, 이 철학 사조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철학적 입장 역시 서로 다르고 각자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나는 논리경험주의 철학 사조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입장을 제시하고자 하지는 않으며, 다만 기존에 널리 알려진 “논리경험주의”(혹은 그 사조의 죽음)에 대한 부적절한 편견을 조정하고, 기존에 제대로 탐구되지 않았던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좀 더 세부적으로 탐구하고자 할 뿐이다. 대개 논리경험주의는 그 형성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지는데, 과연 그 영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상세하게 밝히는 것이 내 박사 학위 논문의 주된 목표다.

 

   그러니까 나는 20세기 전반기 과학철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철학사학자라 할 수 있겠다. 철학사 기술을 위해서는 그 시기에 활동했던 철학자들의 여러 저술들을 두루 섭렵해야 하므로, 나의 주요 연구 대상인 라이헨바흐 이외에도 나는 카르납, 슐리크의 저술들을 읽고 있다. 분명 이들 중 카르납의 저술을 읽는 것이 나로서 가장 힘들다. 카르납 또한 설명을 친절하게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의 진술들은 논리적으로 간결 명료하지만 기호논리학에 친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의 비범한 논리적 재능을 따라가기가 결코 쉽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