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145

카르납, 헴펠, 라이헨바흐의 성격에 대한 단상

내가 한창 과학철학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있던 대학 학부 시절의 일이다.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과 같은 최신의 물리학 이론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성찰을 기대하고 과학철학 수업을 들었던 나는, 어쩌면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헴펠의 [자연과학철학]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음, 그렇지’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시시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과학철학자는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헴펠의 이 책은 과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사실들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런데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헴펠은 인격적으로 너무나 훌륭하여, 그가 재직했던 프린스턴 대학에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 헴펠은 늘 겸손하고, 친절하고, 한..

한국의 올덴버그를 꿈꾼다

나는 블로그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통 채널을 대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태도들을 긍정하는 편이다. 그러한 다양성을 긍정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다양성을 긍정하기 때문에) 나의 입장은, 소통 채널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특정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알아볼 수 있는 담론의 장으로 활용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나의 입장은 나의 실천을 통해 실제로 드러난다. 요즘 내가 놀라움을 느끼는 하나의 사실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재작년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 적이 있다. 왜 아인슈타인 회전 원판 사고 실험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측정 막대는 가만히 있던 측정 막대에 비해 줄어들어 있지 않은가? 이에 반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시계는 가..

철학의 매력

때때로 나는 내가 조금만 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만약 우리 집안에 아들이 나 말고 한 명 더 있었더라면, 그래서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아들을 믿고 나는 그저 철학 공부만 열심히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집안이 부유해서 경제적인 걱정은 하지 않고 계속 철학 공부만 하고 있는 분도 계신다. 가끔은 내가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게 여겨질 때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법학을 전공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 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내가 원칙주의자여서 그러셨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한 후 그 선생님을 찾아 뵙고 향후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했더니(인문대학 소속인 국사, 동양사, 서양사, 고고미술사, 미학..

노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과연 박사학위 논문이란 무엇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시기다. 오늘과 내일은 내게 남은 2021년 마지막 연차휴가다. 아침에 세 아이들을 모두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주어진 자유시간에 집 근처 카페에서 박사학위 논문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의 마지막 날인 내일까지 지도교수님께 내 학위논문의 주요 장들(Chapters)을 제출해야 한다. 원고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어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정리된 글들을 다시금 읽어보며 교정하고 있다. 현재로서 나의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총 11개의 장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서론과 본론을 빼면 실질적으로 9개의 장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는데,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주요 장은 총 5개의 장이다. 내년 상반기까지 남은 4개의 장을 완성한 후, 내년..

시공간 철학에 관한 두서 없는 생각들

나는 시간과 공간의 철학과 관련하여 최근에 독일에 재직 중인 과학철학자 마르코 지오바넬리(Marco Giovanelli)를 주목하고 있다. 과학철학의 역사를 보면, 시간과 공간의 철학에 관한 계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7세기 말에 뉴턴(1642-1727)이 자신의 물리학을 제시한 이후,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관해 뉴턴과 라이프니츠(1646-1716) 사이의 논쟁이 벌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하위헌스(1629-1695)는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 개념을 옹호했다. 뉴턴의 회전 사고 실험(물이 담긴 양동이의 회전, 끈으로 연결된 두 개의 구체의 회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이 우세를 점하는 듯 보였다. 19세기 전반에 수학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발견(가우스, 볼리야이, 로바체프스키)..

보편력에 관한 단상

물리학에서 막대와 시계가 필요한 이유는, 시계를 통해 물리적 사건이 발생한 시간을 측정하고, 막대를 통해 물리적 사건이 발생한 거리를 측정하기 때문이다. 보편력(universal force)은 그 정의상 특정 기준계 A에 속한 관측자가 식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보편력은 차폐시킬 수 없고, 모든 물질들에 동일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보편력이 작용하는지의 여부를 관측자의 관점에서 인지적으로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의 상황 즉 중력이 없는 경우, 우리는 시공간의 계량이 유클리드적 계량 법칙을 따른다고 전제를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빛 신호를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정지해 있는 점들을 식별하고, 서로 다른 점들 사이의 거리 관계를 따짐에 있어서,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법칙..

평범한 사람의 과학철학 연구 방법

내가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멍하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성탄절을 앞두고 있는 시절에는 카페에서 성탄절과 관련된 친숙한 음악들이 계속 흘러나온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멍한 상태에서 음악을 들으며 나에게 이렇게 느긋한 자유가 허락된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감사함을 느낀다. 어쨌든 나는 직장에 있을 때 아주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가. 평소의 격렬한 노동의 대가로 이런 자유를 누린다. 이런 자유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나는 과학철학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것도 일종의 병이고, 나로서는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병이다. 라이헨바흐는 나치를 피해 1933년에 터키의 이스탄불 대학으로 갔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라이헨바흐에게 고액의 연봉과 더불어 철학과 학과장 자리..

과학철학에의 헌신을 다짐하며

나는 2012년 1월 중순부터 직장에서 일을 했다. 내년인 2022년 1월 중순이 되면 정확히 직장 생활을 한 지 10년이 된다. 나는 직장 생활 만 10년이 되는 내년 1월 중순부터 1년 간의 육아휴직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육아휴직 동안에는 아이들을 돌보며 틈틈이 학위논문을 써서 마무리하려 한다. 물론 이때의 마무리라는 것은 학위논문 초고 집필을 이야기할 뿐이다. 초고를 제출한 후 얼마나 더 수정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초고 집필을 끝내면 그 이후에는 계속 수정 작업을 하면서 학위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일하면서 나름 내 전공을 살려서 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관은 대학과는 다르다. 대학에서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할 수 있으나..

의식이라는 꿈 속에서

[의식이라는 꿈]이라는 책을 알게 된 것은 올해 6월 국립과천과학관에서 근무하는 한 연구사님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다니얼 데닛이 쓴 이 책을 내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박사님께서 번역하셨다는 사실 또한 그때 알았다. 이후 나는 이 책을 사거나 빌려 읽지는 않았지만, 책의 제목 “의식이라는 꿈”은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체의 입장에서 의식은 아름다운 하나의 꿈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게 여겨졌다. 이 표현이 주체의 나르시시즘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이런 나르시시즘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 We are always in our sweet dream. Its name is “consciousness”. 의식은 꿈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는..

역사의 아이러니

내가 번역한 리처드 뮬러의 책 [나우 : 시간의 물리학]의 첫 부분에서 뮬러는 '지금'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카르납 사이의 입장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에게 '지금'이 갖는 독특한 의미를 물리학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다소 괴로워한 반면, 카르납이 보기에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물리학적 언어에서 말하는 '지금'의 의미가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이며, 아인슈타인이 생각하는 그와 같은 독특한 의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뮬러는 아인슈타인에게 다소의 공감을 표시하고, 카르납에 대해서는 비교적 강하게 반대하면서, 물리학이 포착하지 못하는 '지금'의 의미가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뮬러에 따르면 시간은 실재하고,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고 있으며, 과거는 결정되어 있는 반면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