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과학철학에서의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구분을 배운 것이 대학 시절이니 벌써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이 맥락 구분의 근거가 되는 책이 라이헨바흐의 [경험과 예측]인데, 나는 어제 이 책의 초벌 번역을 끝냈다. 번역을 끝낸 후 나는 분명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구분이 이 책에서 나오긴 하지만(아주 초반부에) 그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좀 더 포괄적인 맥락에서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중요성을 오늘날의 과학철학계에서 얼마나 높이 평가할까? 라이헨바흐에 대한 논의는 우리나라 과학철학계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게 현실이다. 내가 열심히 라이헨바흐를 연구하고 그 성과를 발표한다고 해서 이러한 우리나라의 현실이 바뀔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혹 내가 토머스 쿤보다는 한스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더 선호하고 이를 계속 추구한다고 해도, 나 한 명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능력이 뛰어난 과학철학 연구자도 아니다. 그런 내가 어떻게 현 상황을 바꿀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현실을 바꾸는 것은 적어도 내 운명의 몫은 아닌 듯하다. 나는 그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이를 덤덤하게 생각하며 그저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경험주의자로서의 라이헨바흐의 면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약간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흄과 칸트 사이에서 라이헨바흐가 다시 흄으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 상대성 이론이었다. 물론 라이헨바흐는 흄이 남긴 난제들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극복했고, 확률론이 인식론의 기초가 되게 만들었다.
앞으로 번역해야 할 라이헨바흐의 주저는 [확률론]과 [기호논리학 기초]이다. 기호논리학 분야, 확률론 분야에서 라이헨바흐는 거의 잊혔다. 그래서 [경험과 예측]처럼 그의 저작을 복원해야 하는 셈이다. 아마도 이 두 책을 번역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나밖에 없을 것이다. 있어봤자 10명 미만일 것임을 거의(99퍼센트) 확신한다. 내가 두 책을 번역하는 시간만큼 나는 최신의 과학철학 논의에서 뒤처질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아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제법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안분지족하는 삶, 만족하는 삶을 택하기로 한다. 내가 재미있고 좋으면 되는 것이지,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 무슨 대수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독불장군처럼 고집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겸손한 태도로,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를 최대한으로 존중하면서 나의 작업을 진행해 나갈 것이다. 사실 나는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만 해도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 생각한다. 나는 계속 과학철학 연구를 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한다. 일단 내년에 [시간의 방향]을 번역하고 난 뒤, [확률론]과 [기호논리학 기초]를 순차적으로 번역하는 게 좋을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철학을 하며 살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철학의 역사를 보거나 나 자신의 상황을 보아도 그런 삶을 살기란 참으로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 과학철학 연구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상황은 퍽 좋아졌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제법 많이 컸다는 사실이다. 이제 나 또는 아내가 계속 보살피지 않아도 스스로 놀거나 아이들끼리 잘 논다. 물론 아직 아이들이 집안일까지 도와줄 정도로 크지는 않아서 집안일은 여전히 나와 아내가 다 해야 하지만, 앞으로 상황은 조금씩 더 나아질 것이라 예상한다. 나는 철학 연구 이외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으므로, 철학이 조금씩 더 온전하게 내 삶에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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