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내 삶은 ‘우연’과 ‘의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게임을 좋아했고 중학생 시절의 꿈도 게임 프로그래머였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보면 컴퓨터 속에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시뮬레이션하고, 그 행성에서 탄생한 지적인 생명체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컴퓨터 속에 있는 가상의 존재임을 깨닫는 내용이 나오는데, 나는 그런 종류의 생각에 열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물리학자로 꿈을 바꿨고, 고등학교 때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만나 결국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지만, 수학, 물리학, 컴퓨터 등에 관한 관심은 계속 이어졌다.
만약 내가 대학 재학 중에 입대했거나, 대학을 졸업한 뒤 계속 인문대학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상태에서 입대했다면, 아마도 나는 군대에서 정보통신 병과로 분류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좀 당황스럽긴 했다. 사관후보생 시절에 나는 희망 병과로 ‘정훈’과 ‘포병’을 제출했다. 내 학부 전공이 인문대학의 ‘철학’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정보통신’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병과였다. 그런데 나는 결과적으로 소위로 임관하기 직전에 ‘정보통신’ 병과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도 내가 입대 당시 자연과학대학(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소속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육군3사관학교에 4개월을 보낸 후 대전에 있는 육군통신학교에서 4개월 동안 후반기 교육에 참여했고, 이후 정보통신 장교로서 32개월 동안 육군에서 복무했다. 나는 나 스스로 뛰어나고 잘한 장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게 통신공학은 퍽 재밌었고, 육군통신학교에서의 성적 또한 제법 괜찮았다. 군 생활 내내 통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말하며 실무적인 각종 일들을 했을 테니 최소한 이 분야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통신과 관련된 나의 경험은 묘하게 내가 소속된 국립대구과학관에서의 인연과 이어졌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인 자동제어 공학자 권욱현 교수님은 장교로 군 복무를 하셨는데 육군 통신학교에서 교관으로 군 복무를 하셨다. 실제로 내가 권욱현 교수님을 만나 대화하며 교수님 관련 전시 콘텐츠를 준비할 때(2021년) 교수님의 통신학교 시절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인연은 오명(吳明) 부총리님과의 인연이다. 나는 2021년 3월 말에 부총리님을 처음 뵈었다. 그때 나는 장종훈 박사님과 함께 번역했던 책 [나우 : 시간의 물리학]을 부총리님께 선물로 드렸다. 부총리님은 나의 이력을 다소 특이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철학과를 졸업했는데, 군대에서는 육군 정보통신 장교로 복무했고, 철학이지만 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과학철학을 계속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첫 만남 이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총리님과의 인연은 계속 잘 이어지고 있다. 오명 부총리님은 1980년대에 우리나라 정보통신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신 분이다. 본인 스스로가 전자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8년이라는 기간 동안 체신부 차관과 장관의 직무를 수행하며 국내산 전전자교환기 개발 등 굵직한 사업들을 성공으로 이끄셨던 분이다.
만약 내가 학생이던 시절부터 컴퓨터 프로그램, 게임 등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육군에서 정보통신 장교로서 복무하지 않았다면, 과학사와 과학철학 전공자로서 국립과학관에 입사하여 일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런 우연들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이 모든 연속적인 우연들을 생각하면서 묘한 기분을 느낀다. 그와 더불어 다시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의 역사를 돌아보고 통신공학 책도 뒤져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저 단순히 스쳐 지나갈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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