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내가 바라는 소소한 것

강형구 2023. 1. 24. 22:34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버지께서는 부산 동래구 명륜동에 있던 1층 단독주택을 허물고 새로 3층짜리 집을 지으셨다. 지하실은 아버지의 의류도매업을 위한 창고이자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1층은 다른 가족에게 세를 주었다. 우리 가족은 2층과 다락방인 3층을 썼다. 새집으로 들어가면서 나에게도 방이 하나 생겼다. 아주 좁은 방이었지만 침대와 옷장과 책상이 있었다. 방문을 닫으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나의 방이 아주 좋았다.

 

   학창 시절 나는 오직 1개의 학원만을 다녔다. 어머니의 성화를 이길 수 없어서였다. 학원에서는 수학과 영어를 매일 1과목씩 70분간 가르쳤다. 월, 수, 금요일에 수학을 가르친다면, 화, 목, 토요일에는 영어를 가르쳤다. 나머지 과목들은 모두 혼자서 스스로 공부했다. 학교와 학원에 다녀온 후 내 방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학교와 학원 숙제를 하던 그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조용히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그저 행복했을 뿐이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런 고독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군대에 입대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나는 장교 생활을 했기에 ‘퇴근’이라는 게 있었고, 퇴근을 한 후에는 집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 재충전의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살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석사 학위를 할 때, 직장 생활할 때도 가끔 그런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집에서 나의 시간과 공간이 사라졌다.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나는 박사학위 논문 작업을 대부분 집 밖인 도서관과 카페에서 했다. 내가 얼마나 카페를 많이 다녔는지, 카페 매니저분과 직원분이 내가 친숙해져서 가끔 전날 팔고 남은 케이크를 나에게 무료로 주곤 했다. 하지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집 안에 나를 위한 공간이 있는 것이다. 작은 나의 방에 책장과 책상이 있어, 그곳에서 글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싶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은 사치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사학위까지 받게 된 이상 나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넓은 방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책장과 책상이 놓여 있기만 하면 된다. 책장과 책상이 좋은 것일 필요도 없다.

 

   나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퍽 소박하고 수수한 사람임을 알 것이다. 나는 옷과 장신구와 음식에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지만 내가 고급스러운 수집광인 것도 아니다. 나는 유튜브에 접속해서 음악을 들으면서 만족하고,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는 것에서 만족한다. 나에게는 그저 조용히 글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에게는 조직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싶은 욕망도 별로 없고, 무엇인가 대단한 학문적 업적을 성취하고 싶은 욕심도 별로 없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시간과 공간일 뿐이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 그저 나를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된다.

 

   당연히 나는 나의 사회적 책무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먹고 살려면 그에 합당한 노동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육아휴직을 했으니 당연히 집안일과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해야 하고, 강사로서 생활하고 있으니 당연히 수업을 준비해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소소하게 원하는 것은, 나의 이러한 책무들을 마치고 남은 하루 동안에 조용히 나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나는 오직 그것만을 바란다. 그 시간 동안 진행되는 내 생각, 그 시간 동안 쓰인 나의 글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에는 크게 관심이나 미련을 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