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경상지역에 서식하는 과학철학 연구자

강형구 2023. 1. 5. 09:12

   아버지를 따른 나의 본적은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이고,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부산에서 자랐다. 나는 고등학교 1-2학년 시절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왜냐하면 이때 나는 그 무엇보다도 책들 속에서 스스로 모험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서점과 도서관에서 놀기 좋아했던 나는 책들을 구경하며 내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고 나름대로 이해한 후 다른 책으로 넘어가는 요령을 익혔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은 내게 평생토록 남게 되었다.

 

   부산 서면의 부전도서관과 영광도서, 동보서적(지금은 사라졌다)이 없었다면 나는 그런 독서 습관을 기를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나는 철저히 부산이라는 지역의 물질적인 여건 속에서 자라났다. 이후 나는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녔고, 강원도 홍천에서 군 생활을 했으며, 다시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직장을 다녔다. 그런데 서울과 홍천이 내게 지역에 대한 애정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그저 그 지역의 도서관을 애용했을 뿐이다. 내가 서울이 좋다고 생각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서울의 문화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은 과학관, 미술관, 박물관, 연극, 뮤지컬 등 누릴 수 있는 문화의 수준이 국내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 또한 수도권에 남아 있기보다는 다른 지역의 문화 수준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판단한다. 굳이 나 자신이 수도권에 편입되기를 바라지는 않는 것이다. 2011년에 취업을 준비할 때 내가 이 직장 저 직장을 가려서 갈 형편은 아니었지만, 최종적으로 2곳의 공공기관에 합격했을 때 한국장학재단을 선택한 것은 장학재단이 조만간 대구로 이전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에는 본가 친척들 몇 분이 계셨고 대구는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북도 성주와도 가까웠다. 대구는 나의 고향이자 부모님이 계신 부산과도 가까운 편이었다. 사실 나는 부산에 있는 공공기관에 취직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나로서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 속에서 최선을 선택한 셈이다.

 

   약간 돌아서 오긴 했지만, 결국 나는 내가 고등학생 시절 스스로 시작했던 과학철학 연구를 계속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으니, 이제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어도 전혀 마음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심적으로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나는 나의 본적인 경상북도 성주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사는 테크노폴리스는 대구 외곽의 신도시로,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대구의 수성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집값이 싸고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 활기찬 동네다. 게다가 교통로도 사방으로 뚫려 있어, 차를 운전하면 서울까지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나는 굳이 내가 수도권에 진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경상지역에 서식하는 한 명의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이 지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지역의 과학철학 발전을 위해 애쓸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나의 고향인 부산에 정착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대구도 썩 나쁘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내가 사는 테크노폴리스의 이점은 대구의 남서쪽에 위치해서 국내의 그 어느 지역과도 비교적 자유롭게 교통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군사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나는 경상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과학철학 분야의 강력한 기계화보병사단(기동성과 전투력을 갖추고 있음)이 되고자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수도권 편중 현상을 경계해왔다. 이는 수도권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서울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이상, 서울을 존중하되 서울 이외의 지역도 골고루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경상지역에 서식하는 과학철학의 친구이다. 지금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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