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누군가의 인생 좌우명은 ‘게을러질 거면 죽어 버려’다. 나는 이 좌우명을 보고 심히 공감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내 인생의 최고 전략은 ‘성실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실함’은 ‘똑똑함’과는 달리 누구나 취할 수 있는 전략이다. 그런 점에서 퍽 민주적이다.
나의 경우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좌절감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부하는 것이 재밌고 즐거우나 지적인 재능이 부족해서 그렇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감정적인 고민에 빠져 있지 않고 그저 내가 할 일들을 성실히 함으로써 고민을 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부탁한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부탁한 일이 없으면 내가 평소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한다. 끊임없이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거다.
왜냐하면 이제 그런 감정적인 고민은 그저 감정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기쁨, 슬픔, 고통, 연민, 후회 등은 그저 감정이며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고 남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겼나. 그리고 그것이 곧 나의 삶을 실증적으로 말해준다. 내가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 뛰어난 점을 말해주고, 내가 부족하고 미숙한 점이 있다면 그 부족하고 미숙한 점을 말해준다.
외부적인 기준에 맞추는 것은 끝이 없고 나에게 적합하지도 않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공부했지만, 늘 내 공부 결과에 대한 평가에 관해서는 사회의 기준을 따랐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지키고 있는 격률은 자율적으로 공부하되 그 평가 결과에 대해서는 수긍하라는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은 그런 내게 퍽 유리한 시험이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내용을 꾸준히 반복해서 공부하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치른 수학능력시험의 결과를 수긍했고 그 시험의 성적에 맞게 대학에 입학했다. 그뿐이다.
대학에 들어가자 나는 나와 함께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에 비해 나의 지적 수준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고 느꼈다. 사실 나는 대학 4년을 통해 나 자신을 이전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변환’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변환’의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나다운 나를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대학에 입학한 것을 ‘운’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내가 원래 생각했던 공부를 계속해 나갔기 때문이다. 결국 내 생각에 나는 대학 4년 동안 내가 하고자 하는 공부를 했고 대학의 정규 교과과정은 그와 ‘병행’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꼴찌로 학부를 졸업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참 행운이었다. 대학원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계속 혼자서 공부했을 것이다.
학부, 석사, 박사 과정 모두 나는 나의 지적 능력에 비해 과분한 수준의 교육 기관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다른 뛰어난 사람들에 비교하기보다는, 나의 학부 졸업 논문, 석사 졸업 논문, 박사 졸업 논문을 생각하면서 각각의 단계마다 내가 조금씩 발전했음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나는 뛰어난 과학철학 연구자는 아니지만, 지금껏 정말 성실하게 연구했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에게 당당하다. 나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그 결과가 좋지 않을 수는 있을지라도, 나의 성실했던 삶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성실함의 위안? 그것이 정말 위안이 된다고 생각하나?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나는 이런 성실함의 위안을 무기로 삼아, 질투나 열등감 같은 소모적인 감정들과 싸워가며, 평범하고 부족한 내가 갈 수 있는 끝까지 한 번 가보고자 한다. 그것은 영광스럽거나 박수갈채를 받는 길이 아니라 그저 나의 길일 뿐이고,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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