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주말 드라마의 즐거움

강형구 2023. 4. 23. 22:03

   나는 평소에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고, 최근에는 넷플릭스도 끊어서 보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오래전부터 즐겨 보는 것은 KBS2 방송국의 주말 드라마다. KBS2의 주말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뭔지 모르게 일상생활이 안정되는 기분이 든다. 나는 막장 드라마, 과격한 드라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그런 드라마를 보려 하지 않는다. 사실 막장과 같은 일들, 과격한 일들은 실제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내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은 실제의 삶에서 대면하고 이겨내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뉴스와 KBS2의 주말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다. 극단적이고 과격한 우익과 좌익은 모두 나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 어중간하고 평범한 삶에 대한 로망과 같은 게 오래전부터 나에게 있다. 사실 그런 로망이 왜 나에게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어, 나는 부잣집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고액 과외를 받지도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다닌 학원(문봉학원, 훗날 서전학원으로 이름을 바꿨다.)은 부산에서 제법 유명한 학원이었다. 규모가 크고 학생들이 많았다. 그 학원에는 입학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시험을 제법 잘 봐서 좋은 반에 들어갔지만 내가 좋은 반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말에서 3학년 초쯤 학원에서 ‘과학고 반’이라는 걸 만들었다. 영어와 수학 시험을 쳐서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을 모아 만드는 반이었다. 나는 ‘과학고 반’ 중의 하나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조금 공부하다가 그냥 다른 반으로 스스로 나와버렸다. 그냥 거기서 가르치는 수학이 어렵기만 하고 문제 푸는 요령만 가르치는 것처럼 여겨졌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왠지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과학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비슷했다. 학교에서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과목들의 진도는 아주 빠르게 나갔지만, 사실 나는 그 내용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독서실에서 진도와는 상관없는 책들을 붙잡고 많이 읽었다. 학교를 나온 다음에는 부산 시내에 있는 몇몇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책들을 읽었다. 뭔가 ‘공부 잘하고 똑똑한’ 학생인 것을 나 스스로 좀 어색하게 느낀 것 같다. 서울대학교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면서도, 내가 뭔가 특권 있는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나는 소박하게 사는 게 좋다. 어쩌다 보니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지만, 그건 내가 지적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과학철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대한 강렬한 애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래전부터 나에게는 ‘특별한 집단’에 소속될 때 느껴지는 본능적인 불편함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이건 중요한 단점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본능적인 불편함 때문에 나 자신을 아주 다른 형태의 사람으로 바꿀 기회를 인생 속에서 여러 번 놓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각자의 운명이란 게 있는 것처럼, 나는 나의 이런 특성 혹은 성격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참 자주 봤던 영화인데, 그 영화 속 주인공인 톰 행크스는 원래 직업이 국어 선생님이었지만 부득이하게 전쟁에 참여해서 훌륭한 지휘관 역할을 한다. 하지만 군인이라는 직업은 그 사람과 잘 맞지 않는 게 사실이다. 내게 과학철학도 그렇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에 대한 나의 순수하고 소박한 애정은, 실제로 철학 학계의 현실에서 요구하는 강력하고 냉철한 토론 및 글쓰기 능력과는 다소 어긋날 수 있다. 나는 본성상 논쟁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과학철학에 대한 의무감과도 같은 애정이 나를 과학철학에 계속 머무르게 하고 있다.

 

   KBS2 주말 드라마 이야기로 시작해서 퍽 이상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어쨌든, KBS2 주말 드라마를 보면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해지고 좀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다. 나의 이런 태도를 일종의 소시민적 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실제로 그런 부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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