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원은 조직의 부품이다. 팀원은 팀의 부품이고, 팀은 부서의 부품이며, 부서는 본부의 부품이고, 본부는 기관의 부품이며, 기관은 부처의 부품이고, 부처는 나라의 부품이다. 한국장학재단에서, 국립대구과학관에서 내가 했던 일들은 제법 가치 있는 것이었지만, 일을 끝내면 혹은 조직을 떠나고 나면 내가 한 일들은 공적인 일들로 남고 그 속에서 나의 이름은 사라지거나 잊힌다. 그 대가로 기관은 나에게 급여를 지급한다. 부품으로서 역할을 잘 해냈기 때문이다.
대개 사회 속에서 언어는 실질적인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렇게 사용되는 언어를 운반하고 작동시키는 개인들은 독립적인 존재라기보다는 능률적인 기계에 가깝다. 하지만 조직과 사회는 개인들이 직접적인 실용적 목적 없이 유희에 가까운 방식으로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매체가 책이다. 물론 책이 인간을 더 바람직한 기계처럼 만들려 할 수 있다. 더 부품다운 인간, 더 기계 같은 인간을 만드는 책도 많다. 사실 그런 책을 읽고 연습하면서 더 훌륭한 전문가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내 생각에 연구자가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기쁨이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가 속한 조직 혹은 기관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라고 장려하는데, 나는 때때로 그런 조직과 기관이 있다는 사실을 퍽 경이롭게 여긴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그런 조직과 기관을 처음 만들었나? 특히 나는 철학과 관련된 조직과 기관을 생각하며 혼자 키득키득 웃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조직과 기관이야말로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엉뚱한 발명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날씨 좋은 어느 날, 길을 걸어가다 옆에 있는 검은색 개미 떼를 본 적이 있나?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인간은 그 개미 떼의 구성원 개미처럼 집단의 목적을 위해 열심히 혹은 맹목적으로 일하는 존재 아닌가?
개미 떼 구성원 개미가 자신을 독립적이며 고유한 존재라고 여기게 만드는 생각을 제조하는 별도의 조직과 집단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게 어쩌면 철학 조직과 집단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철학 조직과 집단의 일은 생각하고 글을 써서 그것을 구성원들의 머릿속에 유통하고 구성원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책은 동화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 오히려 철학책은 동화책-되기를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철학책이 철학자들에게만 읽힌다면 사회가 철학에 명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아직도 인상 깊게 기억하는 일이 있다. 대학원생들이 대학원 수업 시간에 발제하거나 논평할 때, 지도교수셨던 조인래 선생님께서는 “쇼타임”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철학자도 “쇼맨”이다. 철학적 담론을 가지고 “쇼”를 한다는 것이다. “철학 쇼”는 철학자가 이따금 예외적으로 하는 일인가? 오히려 늘 철학자는 사회 구성원들 앞에서 “철학 쇼”를 하게끔 역할을 받은 사람 아닌가? 철학 동화를 쓰고, 철학 쇼를 하는 사람이 철학자 아닌가? 그래서 철학자를 연기하는 사람과 비슷한 부류로 생각하는 것은 흥미로운 자극이며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사회의 모든 곳에서 “쇼”가 필요하듯 철학 “쇼”도 필요하다. 청혼이 일종의 “쇼”인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철학자들 역시 “쇼”를 한다.
철학자는 생각하고 쓰고 “쇼”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언어 사용의 측면에서 철학자만큼 독자성을 띤 구성원은 거의 없다. 자신의 이름표를 붙여 언어적 산물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다른 구성원들은 언어 사용에 있어 거의 기계처럼 작동한다. 나는 조만간 인공지능이 그런 방식의 기계적인 언어 사용을 상당 부분 대체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언어 노동이 줄어들면 언어 유희의 기회가 늘어날까? 나는 그럴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런 희망적인 전망 속에서, 쓰고 생각하고 쓰면서 생각하고 철학 쇼를 하는 철학자들의 입지가 더 강화될 것이라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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