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나의 바람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자 노력해 왔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란 무엇이냐? 나는 대한민국에서 남자로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군대에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부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진정 사랑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내가 교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은 채 최소한 석사과정만 마치자는 생각으로 공부했다.
박사 과정에서 휴학하고 취직 준비를 할 때, 나는 한 편으로는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했다. 내 주제에 무슨 박사 공부냐. 사실 공부는 내게는 일종의 사치이지 않았는가. 석사과정 2년 동안 실컷 공부했으니 됐다. 이제 나도 남들처럼 취직 준비를 해서 평범한 직업을 얻고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혹은 힘겹게 살아가자. 철학만을 전공하고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하지 않았던, 학점도 그리 좋지 않았던 내게 취업이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사적인 항전의 마음가짐으로 겨우겨우 운 좋게 살길을 뚫어내었던 것 같다.
유명한, 세상에서 인정받는 학자? 나는 과학사와 과학철학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대단한 학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저 공부하는 게 좋았을 뿐이고, 능력이 부족하지만 좋아서 공부를 계속했을 뿐이며, 결국 박사학위를 받고 일할 수 있는 대학을 찾다 보니 운 좋게 내게 맞는 대학을 찾았을 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의 방식으로 연구해 왔다.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에 관한 연구를 학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물론 중간에 다른 저자가 쓴 책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부탁을 받아서 한 일이었지 내가 자발적으로 한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나는 라이헨바흐 및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저자들을 연구해 나갈 계획이다.
나의 이 연구가 사회에서 주목받을 만한 큰 가치를 가질까? 나는 그런 주목을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계속 이 연구를 해 나가는 일이 나에게 중요하다. 나에게는 이 연구를 해서 번역하고 논문을 써 철학 학술지에 게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이 연구를 해서 우리 사회의 과학철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 사회로부터 큰 주목을 받는 것이 나에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을 할 뿐이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그냥 나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다. 지금껏 혼자 나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걸어갈 것이다. 그 길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내가 기대했던 풍경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 기억으로 지금까지 세상이 나를 특별하게 원했던 적은 없었다. 단지 나는 세상이 마련한 여러 제도적 장치들을 애써 뚫고 들어가, 그 속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인정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면 내 평생 세상이 나를 원하는 경험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늘 나는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애쓸 뿐, 세상이 나를 원하는 상황은 나에게는 아예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사실 세상이 나를 원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나는 지금까지 해 왔던 나의 일들을 조용히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이 나를 원할 때까지 나의 시간과 공간에서 내 나름의 작업을 한다. 세상이 절실하게 급하게 나를 원할 일이 앞으로도 일어날 것 같지 않다. 그냥 나는 내가 하려고 하고 내게 주어지는 일들을 할 뿐이며, 그 일들이 조금씩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소소한 만족을 얻는다. 하지만 언젠가 세상이 나를 원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굳이 피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한 사람을 사용하기 위해 원한다. 그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부름에 응하는데, 이는 일종의 사회적 의무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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