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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이지 않는 삶

나는 나 자신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고, 나의 정체성이다. 나의 아내와 세 아이는 내가 목숨을 걸고 이 세상에서 지켜야 하는 존재다. 나의 정체성은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나는 과학철학 연구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는 과학철학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근거로 사회적인 인정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으며, 이런 사회적 활동이 사회 속에서 내 가족을 지킬 수 있게 해 준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에게는 내 가족과 내 정체성 이외에 버리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 없다. 그것은 곧 그것 말고 다른 것들은 그냥 쉽게 웃어넘길 수 있다는 얘기다.    비록 정년 트랙 교수이긴 하지만 정년 보장을 받지는 않은 상황이므로, 나는 스스로 6년 계..

일상 이야기 2024.10.23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그제와 어제는 아내가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출장이라, 부산에 계신 어머니께서 대구로 올라오셔서 아이들을 같이 봐주셨다. 어제 오전에는 큰딸 지윤이와 함께 평소 자주 가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어느덧 지윤이는 카페에서 시간을 잘 보낸다. 눈높이 국어, 한자, 수학, 윤선생 영어교실을 한 다음, 자기가 보고 싶은 영상을 보면서 3시간 넘는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버틴다. 얘가 벌써 이렇게 크다니. 그새 나는 헐레벌떡 학술대회 발표 준비를 했다. 괜히 의욕만 앞서서 대동철학회 가을 학술대회에서 덜컥 발표하겠다고 신청했는데, 아직 발표문 작성이 덜 된 것이다. 에구 어떡하나. 이게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점심때 집에 와서 식사한 다음에, 아이들에게 동네 근처에 있는 롯데시네마에서 “와일드 로봇”이라..

일상 이야기 2024.10.20

차분한 가을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자연 풍경을 보며 약간의 쓸쓸함을 느낄 수도 있다. 차분하고 애틋한 음악을 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계절이다. 오늘 문득 학교에 출근하면서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라 생각했다. 출근하는 길에 싱어송라이터 최유리, 백예린의 잔잔한 음악을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고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가족 이외에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어쩌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가끔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오고, 나는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이에 응한다. 큰딸의 친구가 주말에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하고, 둘째와 셋째의 어린이집 친구와 그 부모님이 주말에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한다...

일상 이야기 2024.10.17

관용적 태도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늘 있다. 내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같을 필요는 없으므로, 생각의 차이가 있을 때 그 차이가 무엇인지, 왜 그러한 차이가 생겼는지를 서로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소통이 늘 의견의 일치로 유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달라, 한 시간 동안 대화를 한 뒤에도 여전히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면 그 대화는 가치가 없는 것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서로의 관점 차이를 다시금 자세히 확인했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몇몇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자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은 그 관용적 태도 때문이다. 실제로 카르납은 ‘관용의 원리(principle of tolerance)’를 철학의 주요 원리로서 공식화한 바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

일상 이야기 2024.10.13

평범함과 행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넌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냐. 갑툭튀. 나는 나를 갑툭튀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더 멋지게 나 자신을 포장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 호기심이 많았고, 모범생으로서 공부를 잘했으며, 진지했고, 이러쿵저러쿵.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대신 나는 나 자신을 우연, 아이러니, 역설의 복합체로서 본다.    다만 나는 유약한 사람만은 되고 싶지 않다. 이 세상에 태어나 여러 산전수전을 겪으며 살아남은 강인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덧붙어 있는 여러 이름은 유의미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허상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살아 있느냐, 얼마나 건강하게 살아 있느냐이다. 어쩌면 인간 사회 속에서 언어를 사용하며 체계적인 노동 분업의 ..

일상 이야기 2024.10.09

왜 철학은 계속 철학이 무엇인지를 물을까

과학사가이자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은 과학의 특징을 ‘정상과학’이라 했다. ‘정상과학’이 되면 표준적인 모형, 문제 풀이 방식이 안정적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철학적인 논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과학의 이와 같은 ‘안정적인’ 측면은 과학 하는 인간 정신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마치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자아와 초자아가 정신 구조 전체에서 아주 작은 일부를 차지할 뿐인 것처럼 말이다. 표면적으로는 억제되어 있지만 무의식에서는 늘 철학적 경이로움과 질문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미 쿤은 과학의 ‘진화로서의 진보’를 말할 때 철학의 강인한 생명력을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패러다임의 가장 강력한 적은 패러다임 자신’이라는 쿤의 주장도 아주 깊은 통찰을 주긴 한다. ..

연구년에 관한 생각

지난 학기는 대학교수로서의 첫 번째 학기라 비교적 바쁘고 정신없이 보냈는데, 이번 학기는 그나마 좀 차분하게 지내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이번 학기에는 철학 과목을 2개 강의하고 있어 나 자신의 정체성을 다소 찾은 느낌이 든다. 어떤 수업이든 처음 할 때는 힘이 든다. 수업 자료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 수업 자료를 만들면, 다음에 수업할 때는 기존의 수업 자료를 수정하면 되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절약한 시간에 다른 책과 논문을 읽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읽고 생각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업 교재의 생각이 아닌 나만의 생각이 형성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철학”이라는 수업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수업을 하는 첫 번째 학기에는 시중..

남은 반평생을 준비함

나는 이 세상,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매우 치열하게 살아간다고 믿는다. 실로 그럴 수밖에 없다. 삶은 매일 전쟁이고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던 나 역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애썼다. 나는 요즘 나를 이러한 비유를 들어 생각한다. 일반 병사로 입대해 전쟁 통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겨우 살아 남아 중위나 대위 정도로 진급한 군인. 살아남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아주 빛나는 무공을 세운 것은 아니었기에, 현재 대위이며 소령 진급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과연 장군까지 진급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그래도 중령이나 대령까지 군 생활을 해도 군인으로서 실패하지는 않은 것 아닐까?    나는 10년..

일상 이야기 2024.09.29

성실하되 너무 열심히 하지 않기

아내는 종종 ‘내 손이 느리다’라며 핀잔을 준다. 이건 맞는 이야기다. 아내는 나보다 일 처리가 훨씬 빠르다. 내가 뭘 하고 있으면 답답하다면서 자기가 해 준다. 그러면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와 유사한 상황이 나에게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나는 좀 느린 편이라서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를 좀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다만 나는 아주 성실하긴 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일어난 이후부터 계속 꾸준하게 내가 할 일을 한다. 나에게는 성실함이 최대의 무기였다. 공부할 때도 나는 그냥 성실하게만 했다. 내가 딱히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실..

일상 이야기 2024.09.26

생활하는 철학자

철학사를 보면 역사에 남은 철학자 중에서는 집이 부유해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았던 철학자가 많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런 유형의 철학자가 아니다. 우리 집은 1990년대까지는 제법 벌이가 괜찮은 의류 도매상인의 집안이었지만, 1997년의 대규모 외환 위기 이후 우리 집안의 가세는 계속 기울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도 해외 연수를 가지 않았고 극도로 절약하는 삶을 살았다. 서울대학교는 국립대학이라 사립대학에 비해 등록금이 저렴했다. 나는 대부분 학교에서 제일 저렴한 밥을 사 먹었고, 커피는 대개 자판기에서 뽑아 마셨다. 남들이 궁상을 떤다고 비판해도 상관없었다. 그게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육군 장교는 군 복무도 하고 돈도 벌자는 내 나름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복학 후 대학원에 다니..

일상 이야기 202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