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생활하는 철학자

강형구 2024. 9. 22. 14:36

   철학사를 보면 역사에 남은 철학자 중에서는 집이 부유해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았던 철학자가 많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런 유형의 철학자가 아니다. 우리 집은 1990년대까지는 제법 벌이가 괜찮은 의류 도매상인의 집안이었지만, 1997년의 대규모 외환 위기 이후 우리 집안의 가세는 계속 기울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도 해외 연수를 가지 않았고 극도로 절약하는 삶을 살았다. 서울대학교는 국립대학이라 사립대학에 비해 등록금이 저렴했다. 나는 대부분 학교에서 제일 저렴한 밥을 사 먹었고, 커피는 대개 자판기에서 뽑아 마셨다. 남들이 궁상을 떤다고 비판해도 상관없었다. 그게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육군 장교는 군 복무도 하고 돈도 벌자는 내 나름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복학 후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계속 과외를 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BK 조교를 해서 얻는 장학금으로는 등록금 정도만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사과정 입학 후 집안의 경제 사정이 급격하게 나빠졌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휴학을 결심했고 취직을 준비했다. 더 늦어지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동안 알뜰살뜰 모은 돈을 갖고 매일 취직 준비에 몰두했다. 너무 취직 준비에 몰두해서 일시적으로 시력도 나빠졌다. 그렇게 나는 취직 준비 6개월 만에 취직에 성공했다. 오직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이렇듯 내게는 실용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상인인 아버지를 보고 배우며 자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한국장학재단에서 국립대구과학관으로, 국립대구과학관에서 국립목포대학교로 이직할 때도 결심을 하면 망설임 없이 실행했다. 우리 집이 아주 풍요롭지 않은 이상, 나에게 역사에 남을 철학자가 될 특별한 자질이 없는 이상, 나는 나에게 유리한 생존을 위해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얻고자 하는 바를 얻으려 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부정은 일절 없었다. 나는 대학 입학을 위해 고액 과외를 받은 적이 없고, 취직 준비를 위해 큰돈을 쓴 적도 없다.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서 부정한 행위를 한 적도 없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나의 노력을 통해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과분한 운이 따랐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오로지 하늘과 나의 운명에 감사할 따름이다.

 

   대학교수에게는 대학교수가 할 일이 있다. 교육과 연구가 대학교수가 할 일이다. 그래서 학교에 있을 때는 교육과 연구에 매진한다. 집에 있을 때는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집안을 닦고, 빨래를 하고, 고장난 것들을 고쳐야 한다. 아이들에게도 꾸준히 사건들이 일어난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할 수 있고, 학교에서 어딘가를 다칠 수도 있으며, 갑자기 고열이 찾아오거나 전염성 질환에 걸릴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위기를 거쳐 가며 아이들은 어른으로 자라게 된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이 건강한 어른으로 잘 자라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그뿐이다. 아이들은 나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특히 나는 좋은 대학 입학이라는 맹목적인 목표를 아이들에게 강제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기 위해 애썼다. 아내와 맞벌이하는 것, 남편 때문에 아내가 희생하지 않게 하는 게 나의 목표였고 나는 그 목표를 이루었다. 반칙하지 않고 사는 것 또한 나의 목표였고 실제로 지금껏 반칙하지 않으면서 살았다. 아이들 셋을 낳아 아내와 함께 아등바등 열심히 키우고 있다. 실로 내게는 ‘성공하는 삶’이 목표가 아니라 ‘잘 살아남는 삶’이 목표다. 무엇보다 나는 아이들이 무슨 대학 무슨 학과를 가기보다는 제 성격과 특기를 재주껏 살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남길 바란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남고, 가능하다면 너희의 자식을 낳아 잘 길러보거라. 누구나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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