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종종 ‘내 손이 느리다’라며 핀잔을 준다. 이건 맞는 이야기다. 아내는 나보다 일 처리가 훨씬 빠르다. 내가 뭘 하고 있으면 답답하다면서 자기가 해 준다. 그러면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와 유사한 상황이 나에게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나는 좀 느린 편이라서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를 좀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다만 나는 아주 성실하긴 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일어난 이후부터 계속 꾸준하게 내가 할 일을 한다. 나에게는 성실함이 최대의 무기였다. 공부할 때도 나는 그냥 성실하게만 했다. 내가 딱히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게 꾸준하게 하니까 성적은 점점 잘 나왔다. 그런데 나는 성실하긴 했던 반면 경쟁을 중시하지는 않았다. 성실하게 무엇인가를 하는 게 좋았을 뿐, 성실하게 해서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공부? 성실하게 열심히 하자. 그러다 보면 성적이 잘 나오겠지? 나오면 좋고, 안 나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나는 성실하긴 하지만 너무 열심히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 7시부터 공부한다고 하면, 나는 기를 쓰고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하지는 않는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종종 멍하게 생각에 빠진다. 공부를 정말 잘하는 사람들은 정말 집중해야 효율적이며 시간을 아낄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전혀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다. 공부하는 것은 내게는 일종의 ‘시간 보내기’이다. 책을 읽거나 논문을 읽고 있으면 사실 그게 적어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마음 편하게 그런 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당연히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성실하게 한다. 예를 들어 논문을 쓰거나 강의 준비를 하는 것에 나는 진심으로 공을 들인다. 여기서 핵심은 이거다. 다른 사람은 1시간 만에 강의 준비를 끝내고 다른 일을 하지만 나는 2-3시간 만에 강의 준비를 해서 다른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크게 한탄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기기도 한다. 이는 느림보 거북이가 토끼와의 경주에서 자신의 느린 걸음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느림을 느긋하게 즐기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렇듯 나는 다소 느리므로 의식적으로 일을 많이 벌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일을 많이 벌이면 곧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내가 이런 유형의 사람임을 나 스스로 잘 알기에, 아마도 나는 더 큰 유형의 사람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조직 내에서 중요한 보직을 맡는다든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책을 맡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그런 일을 잘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막상 그렇게 되면 나와 다른 사람들 모두 다소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나는 애초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려는 욕심, 내 능력을 초과하는 많은 일들을 해내려는 욕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여유로움이 좋다. 그래서 더 성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실해야 틈틈이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나의 느림을 답답해하며 나의 일을 해 주시는 것 역시 너무 감사하다. 사실 그냥 그대로 두면 내가 천천히 할 텐데, 그래도 감사하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성실하니까 그와 더불어 ‘열심히 할 것’이라고 짐작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좀 더 여유로움을 부리기 위해서 성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열심히 하는 것보다 천천히 즐기면서 하는 게 좋다. 열심히 하는 것은, 잘 하지도 못하고 내게 맞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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