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는 아직도 국민교육헌장의 다음과 같은 시작 문구가 남아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독립을...” 초등학교 1학년 때 혹은 2학년 때 나는 교과서의 맨 앞에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려고 애썼다. 아마도 당시 학교 담임선생님께서 외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리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으레 그러하듯, 나 역시 학교 선생님의 말을 별 생각 없이 충실하게 따랐다. 몇 년이 지나자 국민교육헌장은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에게는 국민교육헌장과 비슷하면서도 덜 급진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 ‘국기에 대한 경례’다. 내가 기억하는 초기의 국기에 대한 경례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후 이 문구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표현이 빠졌고, 문구가 좀 더 부드럽게 바뀌었다.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도 나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어렴풋이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 혹은 민주화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다양한 출판사의 교과서들로 과목을 배웠다. 예를 들면 수학은 금성출판사 교과서로 배웠고 물리는 한샘출판사 교과서로 배웠다. 교과서마다 스타일도 달랐고 각 주제에 대한 서술방식이나 깊이가 조금씩 달랐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과목별로 선호하는 출판사가 있었다. 수학의 경우, 나는 우정호라는 수학교육과 교수님이 집필에 참여하셨던 교과서를 좋아했다. 그 교수님이 쓰신 수학 관련 책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사소한 자유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교과서를 골라 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물론 나는 단일한 국사교과서를 배운 세대에 속한다. 한국사 역시 검정 제도를 거쳐 다양한 교과서들이 발간되게 바뀌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사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유지하면서, 집필진의 스타일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하거나 여러 가지 보조 자료들을 교과서 특성에 맞게 수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끔씩 일제 통치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로 부드럽게 서술하거나 군사 독재를 미화하는 식으로 한국사를 서술한 교과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부에서 한국사 검정 제도를 부실하게 운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이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거리낌 없이 진행해나가고 있고, 일본이 갈수록 우경화하면서 독도 영유권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사에 대해 일반적인 수준의 지식만을 갖고 있는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 역사 연구를 추진하고 중국이나 일본의 자국 중심적 역사 서술로부터 우리 고유의 역사를 지켜나가는 게 좋겠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에 대한 연구 지원을 강화해나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던 상황에서 교육부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상하다. 기본적인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교과서가 있다면 검정 심의에서 통과 시키지 않으면 된다. 왜 갑자기 역사 서술의 자율성을 침해하려고 하는 걸까? 왜 학생들로부터 역사 교과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없애려는 걸까? 국정화가 아니라, 검정 통과 기준을 좀 더 엄격하게 만들거나 좀 더 전형적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 형성 없이, 제대로 된 국민 여론의 수렴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렇듯 갑작스럽게 국민들을 분열에 빠뜨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