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산문의 감성

강형구 2015. 9. 20. 18:40

 

   텔레비전을 틀면 짧은 분량의 뉴스들이 끊임없이 흐른다. 인터넷 포털이나 SNS 사이트에 들어가면 여러 종류의 단편적인 글들이 산재해 있다. 그 짧은 정보들 속에 의식을 섞으며 나의 정보 또한 중간 중간에 끼워 넣으면, 나의 삶 역시 짧고 단편적인 것으로 변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길고, 순간순간 우리에게 나타나는 감정들과 생각들은 풍부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

 

   요즘은 긴 산문을 읽으면, 산문의 정서 혹은 산문의 감성이 옛 시대 인간 문화의 흔적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감성이 어린 시절 나의 마음을 키워왔다.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오직 전화밖에 없던 어린 시절,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할 일이 없을 때 집에 있던 세계 전래동화 전집을 읽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에는 부모님께서는 이문열씨가 편역한 삼국지 10권을 사주셨고, 나는 틈날 때 마다 그 책들을 지치지 않고 거듭해서 읽었다.

 

   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난 뒤인 2001년에 나는 처음으로 휴대전화를 샀다. 그 이후 1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10분에 2~3번씩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휴대전화로 수시로 인터넷에 접속해 메일을 확인하고 SNS에서 지인들의 근황을 확인한다. 물론 세상이 바뀌었고 아마도 이러한 추세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방식의 소통이 나의 정신적 성장을 돕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정신은 나와 오래도록 길게 대화할 수 있는 방식의 소통, 즉 산문적인 소통을 통해 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산문적인 소통의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장편소설이나 에세이, 강의록이었다. 장편소설에서는 한 명의 화자가 얘기하는 긴 이야기에 충분한 여유를 갖고 빠져들 수 있었다. 에세이집에서도 비슷했다. 에세이에서는 같은 사람이 여러 다른 이야기들을 하더라도, 작가는 오직 한 사람이었고 그 사람 특유의 세상을 보는 방식이 이야기들 속에 표현되었다. 강의록의 경우, 한 분야를 진득하게 연구한 능숙한 전문가가 자신의 분야를 꿰뚫는 통찰을 갖고 긴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는 맛이 있었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했다는 것이 아마도 나로 하여금 산문적인 감성을 잊지 않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긴 산문에서 펼쳐지는 인간 정신의 깊이가 주는 쾌감이 있다. 한 선배의 추천으로 쇼펜하우어가 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을 때, 그 책이 제시하는 세계상을 음미하면서 느꼈던 그 감동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서양의 문화적 전통에서 개인의 정신을 위대하게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와 같은 산문적인 감수성의 깊이에 있다고 본다. 산문에서 정신의 깊이가 드러난다는 것, 그것이 아마도 서양 문명에서 글쓰기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일 것이다.

 

   점점 내 삶 속에서 산문적인 감수성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는 것은 퍽 서운한 일이다. 이러한 산문적인 감수성은,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밀리고 있기에 애써 지켜야 하는 하나의 문화적인 전통이 되어가고 있다는 예감이 든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러한 산문적인 감수성 속에서 옛 사람들의 정신을 후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계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글쓰기, 오직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글쓰기는 우리에게 어떤 감동도, 어떤 새로운 통찰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산문의 감성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 아내와 나는 대구의 한 서점에서 책 두 권을 샀다. 나는 조지 오웰의 [1984], 아내는 201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샀다. 친구들에게도 스마트폰이 아닌 책과 함께 이루어지는 산문적 소통, 산문적 감성의 음미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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