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모교 도서관에서

강형구 2015. 9. 7. 20:12

모교 도서관에서

 

   일찍 퇴근을 한 까닭에 모교 도서관에 들렀다. 도서관에 들르기 전에 학생회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밥을 먹고 도서관 자료실에 있는 한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이런 저런 옛 기억들이 떠오른다. 자료실로 걸어오던 중 우연히 쳐다본, 도서관 벽에 붙어 있던 한 포스터에는 예전에 알고 지냈던 후배가 학술대회의 발표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간 시간이 사뭇 아득하게 느껴졌다.

 

   내게 도서관은 내 젊은 날의 열정과 안식을 상징한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학교를 그만두고 부산 시내에 있는 도서관들을 전전하며 혼자 공부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 나는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고, 학교에서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들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학교를 나와 도서관에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읽었다. 그러한 독서는 흥미로웠으면서도 고독했다. 책 속에서 위대한 학자들의 사상은 찬란히 빛났지만, 과연 내가 그들의 사상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도서관에 오래 있었다. 나는 책들이 들어서 있는 자료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학생들이 시험 공부를 하는 열람실에는 잘 가지 않았다. 나는 어린 시절 장난감을 가지고 이야기 줄거리를 스스로 만들어 내며 노는 것을 즐겼는데, 책을 읽는 것도 비슷했다. 나는 내가 꿈꾸는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읽고 싶은 책,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이었다. 지극히 이기적인 바람이었다. 내가 위대한 물리학자나 철학자가 아니어도 좋았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이 과학을 좀 더 심오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도서관에서 일하고 책을 읽으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겐 해야할 일들이 있었다. 졸업을 해야 했고, 군대를 가야 했고, 취직을 해야 했다. 학부 졸업 후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 홍천도서관에서 책 읽는 시간은 내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 취직을 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박사 과정 학점의 대부분을 취직 후에 이수했는데,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시간은 직장인인 내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내가 첫 번째로 번역한 책인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의 번역 작업 역시 대부분 모교의 도서관에서 이루어졌다. 그 시절 나는 주말마다 도서관에 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상에 앉아 책을 번역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 늘 고향을 그리듯, 나 역시 늘 도서관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삶을 그린다. 언젠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다시금 도서관으로 돌아가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살리라. 그 때 나는 내가 꿈꾸었던 책을 쓰는 것에 도전할 것이다. 과학, 특히 수학과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는 그런 책을 쓸 것이다. 만일 그것이 나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개의치 않고 도전할 것이다. 점점 밤이 깊어 가고, 오늘 내게 남은 시간들이 조금씩 과거로 흘러가고 있다. 내가 스무살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서관 책상에 앉아 어린 아이처럼 꿈을 꾼다.

 

'일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적인 시간  (0) 2015.10.11
산문의 감성  (0) 2015.09.20
운동과 공부  (0) 2015.09.04
중간 현황 점검  (0) 2015.09.04
정착과 성장  (0) 2015.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