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어를 뛰어나게 잘하는 편은 아니다. 주로 나는 영어를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순수하게 문법능력이나 어휘능력의 측면에서 볼 때 나보다 영어를 잘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철학과 과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고 있다. 특히 과학철학의 한 사조인 논리경험주의에 대해서는 배경지식도 많이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해도 역시 깊은 편이다. 따라서 적어도 논리경험주의에 관한 영어책들을 한글로 옮기는 것에서 나는 강점을 갖고 있다.
글을 읽는 것은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그런데 번역이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글쓰기보다 더 어렵고 힘들다. 번역은 진도 역시 늦은 작업이다. 다른 나라 말로 쓰인 문장의 문법을 이해해서 그것을 우리말의 문법에 맞게 하나씩 하나씩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번역 작업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 하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하지는 않기 때문에 혹은 해봤자 크게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나 역시 솔직히 말해 번역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번역한다. 한글로 된 글들은 한글로 된 다른 글들을 배경으로 삼아 성장하고 발전한다. 영어 혹은 독일어로 된 글들은 한글로 된 글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언어로 쓰인 글들을 기반으로 성장한 학문을 우리가 제대로 소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글들을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어떤 것을 옮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당연히 아니다. 더욱이 다른 문화의 유산을 우리 땅으로 우리 문화로 옮겨 심는 작업이 쉬울 리가 없다.
단순히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요약하고 정리한 글을 수십 번 읽어봐야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어떻게든 이 책 전문을 독해하는 데 도전해야 한다. 그런데 영어나 독일어로 된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일이 쉽겠는가. 제대로 원전을 독해하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릴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한글로 옮겨진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한 달 만에 이 책을 읽어낼 수 있다. 번역이란 힘이 드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이 끝나면 독자들에게는 굉장한 도움을 준다. 물론 엉터리같이 번역하면 독자들이 번역문을 이해하기 위해 원문을 다시 찾아보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기기도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서양 학문 원전들에 대한 번역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번역이 더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번역된 책들을 일반 대중들에게도 더 활발히 홍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나 출판계에서나 학문 원전에 대한 번역이 적합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논문 실적을 끊임없이 교수들에게 강요하고 있어 교수들은 원전 번역을 위한 시간을 내기 힘들다. 출판계에서는 원전을 번역해봤자 판매량이 많지 않아 원전 번역을 꺼리고, 번역 비용도 번역자들에게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해야 한다. 나는 아마추어 번역가다. 나는 직장 근무가 끝난 후 여가 시간에 번역을 한다. 다른 직원들이 휴일에 캠핑을 가거나, 여행을 가거나, 스포츠를 할 때 나는 나의 시간을 번역에 바친다. 내가 번역하는 책을 사람들이 많이 읽는 것도 아니다. 고작 100~200명의 사람들이 책을 사서 읽고, 그 중에서 제대로 읽는 사람들은 100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번역한다. 번역할 가치가 있는 책이기 때문에 번역하고, 번역된 책을 읽을 누군가를 위해서 번역한다. 나이가 들어 내 또래의 직장인들이 골프를 치러 갈 때 나는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번역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부디 내 미래에 행운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