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시간이 필요한 일

강형구 2015. 10. 25. 23:09

   나는 요즘 영국의 철학자 배리 데인턴(Barry Dainton)이 쓴 [시간과 공간(Time and Space)]이라는 책을 매주 한 장씩 요약정리하고 있다. 물론 자발적으로 이런 요약정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박사과정 수료를 위해 추가로 6학점을 더 수강해야 하기 때문에, 매주 책의 일정한 분량을 요약정리하고 이 내용을 토대로 교수님과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직장에서의 일이 끝나고 남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러한 요약정리를 위해 쓴다. 현재 이 책의 절반쯤 진도가 나갔다. 12월까지는 책 전체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년 2월까지 또 다른 책을 한 권 더 읽고 정리하면 박사과정 학점 이수는 끝날 것으로 기대한다.

 

   내년 2월 이후에는 이와 같은 요약정리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학점 이수가 끝나면 논문자격시험을 준비해야 하고,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비슷하게 시험 대상이 되는 논문들을 읽고 요약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2개의 논문자격시험이 끝나면 요약정리가 끝날까? 아마 아닐 것이다.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영어로 된 논문들과 책들을 읽어야 하고, 이 글들을 제대로 착실하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 글들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나의 언어로 정리해두어야 한다. 요약정리 작업은 아마 내가 박사학위를 취득할 40대가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내는 과학관에서 휴일 근무를 한다. 오늘 나는 아침에 아내를 직장에 바래다주고 달성도서관에서 요약정리 작업을 했다. 작업을 하다 지치면 나는 도서관 서고에 가서 책들을 구경하는데, 서고에서 대학원 선배가 쓴 책을 보았다. 선배는 서양 음향학에 대한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분으로, 현재 지방의 한 사립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부 시절과 대학원 시절에 나는 실력이 뛰어난 여러 사람들을 보았고 그네들을 부러워했다. 선배의 책을 보고 또 다시 비슷한 종류의 부러움을 느꼈지만, 나 역시 선배처럼 뛰어난 연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뛰어남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내가 속한 집단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준에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는 내가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합격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합격했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대학 시절 최소한의 졸업 기준은 학점 평점 C0였고 나는 그 기준을 통과했다. 대학원 학사규정을 찾아보니, 대학원 박사과정에서는 총 36학점을 이수해야 하고 평점은 B0 이상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이 기준을 충족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학점에 대해서 만족한다.

 

   나는 뛰어난 학점으로 졸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내가 속한 대학원 과정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뛰어난 성적으로 학위를 얻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나는 박사학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 만한 수준의 학위 논문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논문을 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논문의 주제를 확실하게 정한다. 나는 논리경험주의의 역사에 대한 논문을 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루돌프 카르납에 대해 주목하는 최근의 저작들과 달리 한스 라이헨바흐를 중심에 세우고 그를 중심으로 하는 논리경험주의의 역사를 쓸 것이다.

 

   다음은? 라이헨바흐의 원전들을 읽고 정리한다. 다음은? 카르납의 주요 저작들 및 최근에 나온 논리경험주의에 대한 저작들을 읽고 정리한다. 이를 통해 논리경험주의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길 것이고, 이 얘기를 착실하게 정리하면 학위논문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작업에서 필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끈질긴 노력이고, 이러한 노력을 위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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