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내가 교수라는 사실을 온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나와 같은 사람이 교수가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교수라는 사실은 너무나 우연히 혹은 운 좋게 일어난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지면서도, 이렇게 우연한 일이 일어나기에 이 세상은 살만한 게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사실 나는 매우 진지하고 성실한 유형의 사람이긴 하며, 사람의 유형만 보면 나는 철학 교수로서 매우 적합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근에 발급받은 공무원증(교육부)을 늘 소지하고 다닌다. 그리고 나의 공무원증을 볼 때마다 괜히 자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내가 교육 공무원 교수가 되다니! 나의 공식적인 신분은 교수로 이미 확정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교수-되기’의 과정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아직 충분한 교수, 100% 교수가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지금보다 더 읽기, 생각하기, 쓰기에 몰두해야만 충분한 교수가 될 것 같다. 내게 남은 2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말 교수로서 의미 있는 작업을 해서 그 성과를 남기고 싶다.
우선,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의 주요 저작들을 매년 1권씩 번역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경험과 예측](1938년)이 조만간 출판될 것이고, 지금은 [시간의 방향](1956년)을 번역하고 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한 시대라고 하더라도 주요 과학철학 저술들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연구는 여전히 필요하다. 라이헨바흐의 기호논리학, 확률론, 법칙에 관한 연구 등이 여전히 번역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의 1928년 저서 [시간과 공간의 철학] 역시 새로운 번역을 요구하고 있다. 라이헨바흐를 철학적으로 제대로 연구하는 일,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소명이다. 이것은 나 스스로 찾아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기도 하다.
약간 더 범위를 확장하여, 카르납(Carnap)과 슐리크(Schlick) 등 라이헨바흐 이외의 다른 주요 논리경험주의자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다. 이 작업은 아마 내가 온전히 진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이헨바흐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내가 카르납과 슐리크에 대한 연구(주로 물리학의 철학과 관련하여)를 진행할 수는 있을 것이며, 나 이외에 다른 논리경험주의 연구자가 국내에서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아인슈타인(Einstein), 에딩턴(Eddington), 바일(Weyl)과 같은 철학적 물리학자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또한 나 혼자만 진행하기에는 나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지금껏 7권의 책을 번역했고 11편의 과학철학 논문을 게재했다. 지금부터 23년 이후 퇴임할 때는(2047년 8월 말) 30권의 책을 번역하고 50편의 과학철학 논문을 게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제자 욕심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소속이 철학과가 아닌 교양학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제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내가 번역한 책과 내가 쓴 논문을 읽고 영감을 받아 계속 과학철학을 하게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나는 나 자신이 계속 과학철학을 해나갈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며 만족한다.
아마도 나는 2024년이 끝나고 2025년이 되면 좀 더 교수다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보다 좀 더 교수 같은 마음가짐과 행동을 갖출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교수, 특히 과학철학 전공 교수라서 나는 너무 행복하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과학철학 교수라고 해도 상관없다. 하루 종일 과학철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하니까. 부디 내가 23년 뒤에 30권의 번역서와 50편의 학술논문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매일 꾸준하게 성실하게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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