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관 이야기

마흔이나 되었는데

강형구 2021. 7. 30. 18:00

   요즘 부쩍 자주 하는 생각은 ‘전문성’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초, 중, 고등학교에서의 공부가 크게 전문성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머리가 똑똑하거나, 아주 노력을 많이 하면 고등학교까지의 공부를 잘 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공부 역시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니긴 하다.

 

    대학 이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학에서 평균적으로 높은 학점을 얻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대학 시절부터 집중적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길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회 속에서 실용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그게 어떤 분야라도 상관없다. 심지어(!) 과학철학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라이헨바흐의 철학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철학 연구 성과가 학술지에도 게재되지 않는가. 이 분야에 대한 연구자들이 세계적으로도 얼마 안 된다는 것을 나 스스로 인정한다. 그러나 연구하는 사람들이 적은 분야라고 하더라도 시간을 들여서 계속 끈질기게 연구하면 그 연구 성과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온다.

 

    그런데 국립과학관에서 일하는 나에게 제시되는 도전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나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전기전자 산업이나 정보통신 산업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지난 2년 동안 전자 및 통신 관련한 인물들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 되었고, 이러한 조사를 토대로 특별전을 진행하게 되었다.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한 내가 전기전자에 대해서, 정보통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겠는가. 물론 내가 육군 정보통신장교로 복무했기 때문에 이 분야에 아주 문외한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정보통신 지식이라는 것도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새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전기전자와 정보통신 관련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작년에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공학한림원에서 발간한 [한국 산업기술 발전사] 중 전기전자 및 정보통신 책자가 아주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거듭 놀라움을 느끼고 있다. 우리나라 전자 산업의 역사,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대단한 역사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내 나이 마흔이다. 이 정도 나이면 나의 전공 분야인 과학철학에 정착하여 이 분야를 계속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게 될 나이이기도 한 것 같은데, 이렇게 늦은 나이에 나는 새삼스럽게 전자와 정보통신 분야로 빠져들고 있다. 과학관의 학예사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 분야에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이야기들이 많이 있고, 전시 아이템들도 아주 많이 있다. 또한 과학관에서 이 분야와 관련한 과학기술자료들을 잘 모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료를 수집한다는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기업에서는 시장에서의 생존에만 집중하는 나머지 자신이 생산한 물건들을 잘 보관하지 않는다. 이러한 물건들을 보관하고 이 물건들의 의미를 보존하는 것은 과학관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1~2년 해서는 그다지 성과가 나지 않을 것 같다. 아예 10년 이상을 염두에 두고 계속 진행해나가야지만 제대로 된 전문성이 쌓일 수 있을 것이다. 전자 및 정보통신 관련 자료들을 모으고, 이 자료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발굴하고, 이를 토대로 과학관에서 전시하는 것이다. 이미 다 알려져 있는 뻔한 이야기들을 쉽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몰랐던 우리 스스로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찾아내서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서 이런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된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제법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