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관 이야기

국립과학관 속 과학철학 전공자

강형구 2021. 11. 7. 17:56

   대학 속 과학철학 전공자는 국립과학관 속 과학철학 전공자보다는 입장이 덜 애매한 것 같다.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교양 과학철학 강의를 하거나,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좀 더 심화된 과학철학 강의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국립과학관 속 과학철학 전공자의 역할은 퍽 애매하다. 특히 나는 서양 과학철학 전공자로서 20세기 전반기의 물리학 이론들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연구하고 있는데, 이런 내가 한국의 국립과학관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문득 내가 이런 의문을 떠올린 이유는 오늘 국립중앙과학관에서 근무하고 계신 한 연구관님의 행적을 찾아보았기 때문이다. 이분은 과학관에서 20년 이상 일하면서 겨레 과학의 원리와 의의를 일관되게 연구하고 계신다. 서양 과학사와 서양 과학철학을 공부한 나는 과연 국립과학관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성과를 남길 수 있는 것일까? 만약 내가 영국의 과학관에서 근무했다면 뉴턴, 패러데이, 맥스웰이 남긴 실물 자료들을 보존하고 연구할 수 있었을 것이며, 만약 내가 독일의 과학관에서 근무했다면 아인슈타인,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등이 남긴 실물 자료들을 보존하고 연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 아닌가?

 

   그러면 대체 국립대구과학관은 나를 왜 뽑은 것인가? 정말 과학기술자료를 수집, 조사, 연구, 전시하기 위해 나를 뽑은 것인가? 실제로 국립대구과학관 입사 이후 내가 이런 종류의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다. 기증 받은 저울들을 소재로 삼아 특별전을 개최했고, 농기구와 물리 계측기기들을 가지고 특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한 미분기하학자의 수학 연구 자료들을 토대로 기하학 특별전을 개최했으며, 지금은 한국의 전자산업을 주제로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나의 작업이 전문적인 연구 성과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과학사 및 과학철학 전공자로서 일반적인 수준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지식을 활용하여 전시 콘텐츠를 개발하고 이를 전시로 구현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국립과학관에서 학예사로 근무하고 있는 나의 고민은 조금씩 더 커진다. 과연 과학관 업무를 하면서 나는 어떻게 과학철학 전공자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의 전통 과학을 역사적, 민속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기틀이 잡혀 있고, 우리나라의 자연사 자료를 생물학적이고 지질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는 일 또한 어느 정도 기틀이 잡혀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국립과학관에서 전통 과학의 원리를 연구하는 것과 자연사 연구를 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국립과학관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아직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전공이 서양 과학사와 서양 과학철학이라면 그러한 어색함은 더 심해진다.

 

   그러나 국립과학관에서 다루고 있는 과학적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서양의 과학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서양 과학사 및 서양 과학철학 전공자가 한국의 국립과학관에서 특정한 기여를 할 필요가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그 기여란 무엇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물음을 앞에 두고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국립과학관의 자연과학 또는 공학 전공자가 할 수 없는 일을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 전공자가 할 수 있다면 대체 그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와 같은 차별화된 일을 할 수 없다면 국립과학관이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 전공자를 뽑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 전공자는 타 전공자와는 차별화되는 방식으로 과학자와 과학기술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고 이와 연계된 전시를 기획 및 운영할 수 있으며 전시품을 만들고 교육 프로그램 또한 고안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그렇게 차별화된 방식으로 일하고 있나? 나는 과학철학 전공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것일까? 언제쯤 나는 이 물음에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