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관 이야기

아마추어의 즐거움

강형구 2021. 8. 4. 21:54

 

   과학관에서 내가 하는 일의 즐거움은 가령 이런 것이다. 나는 업무 과정에서 우연히 오명 전 부총리님을 알게 되었고, 부총리님을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부총리님이 쓰신 책들과 관련 자료들을 받아 읽었다. 1940년에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교수와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우연한 계기로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된 후 체신부 차관과 장관을 하며 1980년대 우리나라 전자정보통신 산업을 약진하게 만든 중요한 한 명의 인물을 알게 된 것이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님을 알게 된 것도 흥미롭다. 1944년에 태어나 어렸을 때 큰아버지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후 삼성에 입사하여 새로운 사업으로 전자산업을 제안했다. 이후 40년 동안 삼성에서 일하며 삼성전자를 후진 기업에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나는 윤종용 부회장님이 쓴 [초일류로 가는 생각] 1, 2권을 읽었다. 학자가 아니라 기업인이 쓴 책답게 솔직담백하고 단순했다. 그는 1969년 일본 산요 전기에 기술 연수를 가서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미 전자산업의 기반이 잘 갖춰진 일본에 반해 한국에는 공장도 없고 전자제품을 만들 수 있는 원천 기술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40년이 지나 우리는 일본 전자산업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전자산업 강국이 되었다.

 

   자동제어공학 분야의 권위자인 권욱현 교수님도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943년에 포항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줄곧 1등만을 한 분이지만, 특이하게도 실제로 장치들을 손으로 만지고 만들고 고치는 것을 즐겨하신 분이고,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도 연구실에서 대학원 학생들과 각종 전자통신장치들을 직접 만드셨다. 그래서 권욱현 교수님은 자동제어 분야의 세계적인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의 많은 벤처 기업들을 양성하시기도 한 것이다. 권욱현 교수님은 대학 동기인 윤종용 부회장님과 자신을 비교하며, 만약 나에게 재능이 있었다면 교수보다는 창업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신다.

 

   오늘은 지난 번 권욱현 교수님을 찾아 뵈었을 때 빌린 책인 [제어시스템공학]을 읽고 있다. 물론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100% 이해할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잘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도 내가 직접 교수님이 쓰신 책을 읽어보아야 자동제어공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감을 잡을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나 스스로 교수님에 대한 전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할 때마다 거듭 아마추어의 입장으로 돌아간다. 저울 특별전을 준비할 때는 측정의 역사를 들여다보았고, 농기구 특별전을 할 때는 우리나라의 전통 농기구들과 농기계에 대해서 공부했다. 지진 특별전, 영상 및 계측기기 특별전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하학 특별전의 경우에는 나에게 기하학과 관련된 약간의 소양이 있긴 했지만, 기우항 교수님께서 쓰신 전문적인 미분기하학 논문들을 읽기에는 턱없이 지식이 부족했다. 이번 전자산업 특별전도 마찬가지다. 전시 준비를 위해 전기전자, 정보통신, 자동제어공학을 새로 공부한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나라 산업과학기술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나는 그저 이러한 만남을 기쁘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명 부총리님, 윤종용 부회장님, 권욱현 교수님과 같은 대단한 분들을 만나서 기쁜 것이 아니라, 이분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것들을 읽고 이해하고 그것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서 기쁜 것이다. 물론 나의 주 전공은 따로 있다. 20세기 전반기 과학철학의 역사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순간 전기전자, 정보통신, 자동제어공학에 대해 읽으며 만족감을 느낀다. 나는 과학관의 학예사로서 매번 마주해야 하는 이와 같은 아마추어의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이 일은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나와 다른 한 인간의 삶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