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양자역학의 철학 독서노트 08

강형구 2016. 10. 28. 06:55

10: GRW 이론, 결풀림, 신정통해석

데이비드 Z. 앨버트 지음, 차동우 옮김(2004), 양자역학과 경험(서울: 한길사), 5파동함수의 무너짐(119-154)”.

 

    양자역학의 측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폰 노이만은 측정이 수행되지 않는 물리적 과정측정이 수행되는 물리적 과정을 구분하는 두 개의 규칙들을 제시했다(1955). 하지만 측정이라는 개념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폰 노이만의 규칙들은 그다지 소용이 없다.

  

   과연 양자역학에서 파동함수의 무너짐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1961년에 위그너는 파동함수의 붕괴를 일으키는 것은 의식을 가진 인간의 마음이라는 해석을 제안했다. 위그너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계의식적인 계를 구분한다. 하지만 문제는 위그너 자신이 의식적인 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측정에 의식을 도입한 위그너와는 달리, 일군의 학자들은 파동함수의 무너짐또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시적인 수준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의식 혹은 마음의 도입 없이도 물리 법칙들에 의해 미시적 계로부터 거시적 계로의 이행이 일어난다. 이 때 순수하게 미시적인 계거시적인 계가 구분되는데, 여기서도 과연 거시적인 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측정의 문제가 골치아픈 것은 이 문제가 경험에 의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무너짐에 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론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일반적으로 이 두 이론이 서로 다른 실험결과를 도출하는 경우가 존재하며, 따라서 이에 대한 실험적 측정을 하면 어떤 이론이 무너짐에 관한 올바른 이론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측정 기구가 환경과 상호작용한 이후에는 두 이론 중 어느 경우가 옳은지를 따질 수 없게 되는 데 있다. 측정 기구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은 피할 수 없는 까닭에, 실질적으로 우리는 두 이론 중 어느 이론이 옳은지를 판가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측정의 과정(무너짐)에 대한 가장 그럴싸한 이론을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고안해내는 것이다. 우선 알버트는 무너짐에 관한 이론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들을 제시한다. 첫째, 이론은 같은 실험에서 같은 결과를 얻는 것을 보장한다. 둘째, 이론은 보른의 확률해석 규칙을 유지한다. 셋째, 이론은 실험적 사실들과 합치한다. 우선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무너짐 이론은 거시적 대상이 항상 특정한 위치를 갖게끔 해야 한다.

  

   위치에 대한 거시적 개념을 유지하면서도 무너짐을 설명하는 이론을 만들 수 있을까? 만약 입자의 파동함수가 무너질 때 이 파동함수에 위치 연산자의 고유함수가 곱해진다고 생각하면 어떤가? 다시 말해, 측정에서의 무너짐은 측정 장치를 이루는 수많은 입자들 중 하나의 입자에 관한 무너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이론을 기라르디, 리미니, 베버의 이름을 따서 GRW 이론이라 부른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고립된 미시적 계에서는 파동함수의 무너짐이 일어나지 않다가, 미시계와 거시계가 결합된 후 결합된 복합계의 특정한 입자의 위치와 관련된 측정값이 산출된다.

  

   GRW 이론에 의하면 파동함수가 무너진 입자의 운동량과 에너지는 불확실한 방식으로 변화할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실험에 의해서 감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실험결과에 대한 보고가 지금껏 없었다는 데 있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GRW는 무너짐이 발생할 때 입자의 파동함수에 곱해지는 것을 위치 연산자의 고유함수가 아니라 종 형태의 함수로 변경했다. 이렇게 함수를 변경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실험결과와 일치하면서도 파동함수의 무너짐에 의한 에너지와 운동량의 변화를 실험이 감지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과연 GRW 이론은 양자적 현상에 대한 표준적인 측정결과들을 훌륭하게 설명하는 것일까? GRW 이론의 두 가지 전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측정 장치의 바늘은 측정의 결과를 표시한다. 둘째, 서로 다른 결과값들에 대해 측정 장치의 바늘은 공간 내에서 다른 위치를 나타낸다. 과연 양자현상에 대한 모든 측정장치들이 GRW 이론의 두 전제를 만족시키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않다. 위치의 변화가 아니라 에너지의 변화만을 요구하면서도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는 측정장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측정장치에서 광자는 위치가 변하지 않느냐고 대응한다고 해도, 광자의 파동함수는 매우 짧은 시간에 공간으로 퍼져나가므로 이 변화를 실제로 측정할 수가 없다. 요컨대, GRW 이론에서의 무너짐이 요구하는 위치의 변화 없이도 제대로 작동하는 측정장치들이 존재한다.

  

   위와 같은 난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GRW를 고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측정에 관한 무엇인가가 위치의 거시적인 변화와 틀림없이 관련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관찰자의 신경계통 내부에서의 위치 변화를 탐색할 수 있다. 우리는 망막의 위치 변화가 없다면 시신경의 위치 변화를, 시신경의 위치 변화가 없다면 뇌 상태와 관련한 이온들의 위치 변화를 찾아볼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다른 종류의 예민한 관찰자의 신경계통에서 그와 같은 위치의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알버트가 예를 드는 의 경우처럼, 특정하게 설정된 미시적 계가 거시적인 위치 변화를 일으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찰자로 하여금 양자적 계의 속성에 대해 파악할 수 있도록 고안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결론적으로, GRW 이론은 측정과 관련해 관찰자가 어떤 심리적 경험을 할지 확고하게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측정의 문제(파동함수의 무너짐)에 대해 GRW 이론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알버트의 결론이다.

  

   [논평 및 질문] 알버트가 지적하는 난점 이외에도 GRW 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난점들을 추가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측정 당시 측정장치를 이루는 입자들 중 왜 번째 입자에 대해서 파동함수의 무너짐과 해당 입자의 위치 연산자의 고유함수(혹은 확률 분포를 고려한 종 모양의 함수)가 대응하는지를 GRW 이론은 설명해 주는가? 만약 그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실제로 이 이론은 파동함수의 무너짐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한 것 아닌가?

  

   또한, GRW가 파동함수의 무너짐과 대응시킨 대상을 연산자의 고유함수에서 종 모양의 함수로 변경시킨 것에 어떤 이론적인 근거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혹시 이러한 변경은 이 이론을 이미 알려진 부정적인 실험결과와 합치할 수 있도록 임시방편적으로 이루어진 것 아닐까? 만약 이러한 임시방편성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GRW 이론의 신빙성을 상당히 떨어뜨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