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양자역학의 철학 독서노트 10

강형구 2016. 11. 3. 06:53

 

12: 운동의 양자 이론

 

  

데이비드 Z. 앨버트 지음, 차동우 옮김(2004), 양자역학과 경험(서울: 한길사), 7보옴의 이론(181-230)”.

 

데이비드 봄 지음, 이정민 옮김(2010), 전체와 접힌 질서(서울: 시스테마), 4양자론과 숨은 변수(101-150)”.

 

    지금까지 살펴본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 GRW 이론, 결풀림 이론, 여러-세계 해석, 여러-마음 해석은 모두 양자역학의 힐버트 공간 정식화라는 표준적인 양자역학 체계를 전제로 논의를 진행했다. GRW 이론에서 슈뢰딩거 함수에 물질 입자들의 요동을 기술하는 별도의 보정항을 추가했다 하더라도, 이 이론은 전체적으로 볼 때 양자역학의 힐버트 공간 정식화를 큰 수정 없이 받아들인다. 어떤 것에는 해석이란 이름이 붙고 어떤 것에는 이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들 모두는 양자역학의 힐버트 공간 정식화에 대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양자현상에 관한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이론을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봄은 양자역학의 힐버트 공간 정식화라는 확립된 형식체계의 의미를 재해석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양자역학을 이론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힐버트 공간 정식화자체만 보아서는 그 형식체계에 등장하는 상태 벡터와 슈뢰딩거 방정식이 실제로 물리적 세계에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에 반해, 고전역학이 우리에게 고전적 세계에 대한 이해 가능한 심상을 제공하는 것과 유사하게, 봄의 역학은 우리에게 양자적 세계에 대한 이해 가능한 심상을 제공한다.

  

   봄의 이론에는 입자이 등장하며, 이 둘은 모두 세계에 실재한다. 파동함수

은 세계에 실재하는 을 나타낸다. 입자와 장 모두 시각값과 위치값을 갖는다. ‘은 아양자 수준에서 마구잡이로 요동치고, 실제로 양자역학에서 쓰이는

값은 이러한 요동의 평균값이다. ‘입자의 요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 봄의 이론에서 입자는 고전 퍼텐셜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양자 퍼텐셜의 영향도 받는다. “따라서 입자는 일정한 궤적이 아닌 브라운 운동과 같은 경로를 따른다(; 114).” 봄의 이론에서

을 입자의 질량,

를 위상함수,

를 파동함수,

를 고전퍼텐셜,

을 양자퍼텐셜이라 할 때, 입자의 속도는

로 정해진다.

  

   시각

에서의 파동함수가 주어졌을 경우 하나의 입자가 공간의 특정한 점에 놓일 확률은 해당 점에서의 파동함수의 절대값의 제곱과 같고, 이를 알버트는 봄 이론의 기본적인 공리’(혹은 통계적 공리)라 부른다. 이 공리의 덕택으로 봄의 이론은 기존의 양자역학과 동일한 실험 결과값을 산출한다. 이 이론은 하나의 입자에 대해 1차원에서 3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고, 하나의 입자로부터 여러 입자들로 확장할 수 있다. 봄의 이론에서는 입자와 장이 세계에 존재하고, 장을 표상하는 파동함수의 움직임에 따라서 입자가 공간에 있는 점에 놓일 확률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봄 이론의 형이상학은 고전역학의 형이상학과 똑같다(알버트; 181).

  

   봄 이론의 중요한 특징들을 살펴보자. 봄의 이론에서는 입자의 운동을 유도하는 것이 파동함수이고, 파동함수는 위치에 따라서 다른 대상들과 상호작용을 달리 하기 때문에, 입자(전자)의 처음 위치가 같다고 하더라도 측정 장치의 위치에 따라서 측정값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전자의 단단하기는 전자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측정 방법 및 측정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문맥 상의 성질이 된다. 실제로 봄의 이론에서는 입자의 위치를 제외한 입자에 대한 모든 관측가능량들이 문맥 상의 성질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들은 있다. 입자의 파동함수가 특정 관측가능량의 고유함수일 경우, 측정 결과값은 문맥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연속적인 측정이 이루어질 경우, 두 측정에서의 결과값은 항상 일치한다. 또한 봄의 이론은 하나의 입자가 아닌 여러 입자들을 다룰 때 비국소적인 성격을 띤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서의 속도함수 알고리즘은 하나의 입자가 갖는 속도가 다른 입자의 위치에 의존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봄의 이론은 EPR 역설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해결한다. 봄의 이론에 따르면 두 입자의 파동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입자가 EPR 사고실험에서 등장하는 측정 장치를 통과한 이후에는 마치 두 입자의 파동이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알버트에 따르면 봄의 이론은 몇몇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우선, 봄의 이론에서는 측정 장치의 위치 등과 같은 환경 조건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따져야 하는 까닭에 일종의 절대적 기준계동시성의 절대적 표준을 요구하는 듯 보이고, 이는 특수 상대성이론에 위배된다. 만약 우리가 입자의 파동함수만을 알고 위치를 모른다면, 우리에게는 봄의 이론이 말하는 절대 기준계를 설정할 방법이 없어진다. 다시 말해, 이는 우리에게는 환경에 따라 측정 결과값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음을 뜻한다.

  

   봄의 이론에서는 입자이 실재하고 결정론적으로 변화하지만, 입자를 측정하는 측정 장치와 입자가 만들어내는 복합계의 파동함수는 입자가 측정 장치를 통과 이후 하나의 상태로 무너지는 듯한 결과값을 산출한다. 또한 역설적으로 봄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봄의 이론에서 말하는 입자의 절대적 위치값을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당 입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일종의 측정을 수행할 경우, 이러한 측정으로 인해 입자의 파동함수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특정 계의 파동함수를 알 수 있고, 파동함수만을 알고 있을 경우에는 비결정적인 기존의 양자역학과 동일한 결과값을 산출하도록 봄의 이론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봄의 이론은 경험적인 영역에서 양자역학을 벗어나지 않는다.

  

   봄의 이론은 양자역학적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물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들에 의거해 봄의 이론을 비판했다. 첫째, 이 이론에서 말하는 양자 퍼텐셜의 근거가 불명확하다. 둘째, 이 이론에서의 말하는 입자의 절대적 위치및 요동하는 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 ‘위치개념에 실제적인 물리적 내용이 없다(; 116-117). 봄은 이같은 비판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론으로부터 불확정성원리와 같은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관계가 유도될 수 있고, 이 이론이 고에너지 영역극소 영역에서 양자역학과는 다른 예측을 할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옹호한다.

  

   양자역학의 여러-마음해석을 옹호하는 알버트는,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된 측정 장치가 머리 속에 설치된 한 사람의 사례를 제시한다. 알버트는 봄의 이론이 옳을 경우 그 사람이 동일한 측정에 대해 답변 방식(말로 보고하는 것과 문서로 보고하는 것)에 따라 다르게 답할 것임을 보임으로써 봄 이론의 불합리함을 증명하고자 한다. 경험적 측정값에 관해서는 봄의 이론여러-마음해석이 같은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알버트는 봄의 이론이 명확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측정 장치 바늘의 미래 위치)여러-마음해석이 명확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례와 그 역의 사례(측정에 대한 인간 마음의 판단)를 제시함으로써, 두 이론이 동일척도로 비교될 수는 없음을 주장한다. ‘여러-마음해석은 물리학이 관찰자가 생각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 보는 반면, ‘봄의 이론은 물리학이 물리적 대상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라 본다.

  

   나는 알버트가 제기한 사고 실험이 매우 작위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두뇌가 알버트가 말한 방식으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알버트의 사고 실험은 명백하게 봄의 이론에게 불리하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나는 알버트의 문제 제기가 봄의 이론에 대해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과연 봄이 주장하는 것처럼 봄의 이론이 고에너지 영역과 극소 영역에서 기존의 이론과는 다른 예측값을 합당하게 산출할 수 있는지에 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고, 이후의 실험을 통해 봄의 이론에 따른 예측값이 실험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면, 봄의 이론은 옳은 이론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봄이 말하는 요동치는 장입자의 절대적 위치가 어떤 물리적 내용을 갖느냐의 문제는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양자역학이 경험적 성공을 통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처럼, 봄의 이론도 경험적 성공을 통해 과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