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양자역학의 철학 독서노트 09

강형구 2016. 11. 2. 06:51

 

11: 여러-세계 해석

 

  

데이비드 Z. 앨버트 지음, 차동우 옮김(2004), 양자역학과 경험(서울: 한길사), 6동역학 그 자체(155-179)”.

 

    다시 양자역학의 힐버트 공간 형식화로 돌아가자. 양자역학에서 물리계의 상태는 힐버트 공간의 벡터로 표현되며, 이 벡터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따라 결정론적으로 변화한다. 문제는 이러한 벡터가 우리의 경험 영역으로 들어올 때 발생한다. 관찰, 측정, 검출 등과 같은 경험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양자역학적 계의 상태가 관찰가능하게 되는데, 이 경험적 상호작용에서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 보른의 확률해석 규칙이다. 하지만 슈뢰딩거 방정식은 보른의 확률해석 규칙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 없다. 왜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인 계의 상태 변화가 경험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불연속적이고 확률적인 것으로 변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양자역학이라는 물리이론 그 자체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해석이 개입된다. 앞선 5장에서 살펴본 GRW 해석은 측정의식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으면서 위치라는 거시적 개념으로 파동함수의 무너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안된 해석이었다. 적어도 GRW 해석은 파동함수의 무너짐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예 파동함수의 무너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혹은 파동함수의 무너짐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양자역학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을 1957년 휴 에버렛(Hugh Everett)이 제안했고, 이것의 정확한 명칭은 양자역학에 대한 상대적 상태정식화이다.

  

   에버렛의 문제의식은 양자역학의 불연속적 과정이 일반 상대성이론과 양립가능하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양자역학의 불연속적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측정 전에는 중첩되어 있던 가능한 상태들 중 특정한 상태 하나가 측정을 통해 구체화된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러한 구체화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양자역학적 계가 특정한 상태 하나로 귀결되는 것(파동함수의 붕괴)이 아니라, 가능한 다양한 상태들이 관찰을 통해 각자 가지치기(분기, branching)’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때 이러한 상태들은 서로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며, 이러한 상대적 관계와 분리시켜 하나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에버렛, 457).

  

   이와 같이 파동함수의 붕괴를 부정하는 양자역학 해석이 극복해야 하는 여러 단점들이 있다. 우선 가지치기한 상태들 사이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해야 한다. 양자역학의 힐버트 공간 정식화에서, 하나의 물리적 상태는 기저(basis)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측정과 관찰을 통해서 가지치는 상태들 또한 기저의 설정에 따라서 달라짐을 의미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기저를 선택하게끔 하는 새로운 일반 원리를 이론에 추가해야 한다. (이에 대해, SEP6.2절에서 배이드먼은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기저를 적절하게 설정한 다음에는, 가지치는 동안에 서로 다른 상태들이 맺는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다. 이 관계를 적절히 설정해야만 파동함수의 무너짐을 부정하는 해석 또한 양자역학의 실험적 결과들과 부합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이드먼(Vaidman)존재의 측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 개념은 보른의 확률해석 규칙과 부합하도록 설정되어 있어서, ‘존재의 측도가 큰 상태일수록 그 상태가 갖는 확률의 값이 커진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가능한 상태 A의 확률이

이고 가능한 상태 B의 확률이

이라면, 이 때의 확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SEP, 4절 참조)

  

   위에서 제시된 두 문제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핵심적인 물음이 또 하나 있다. 만약 가능한 상태들이 가지를 친다면’, 이 때 가지를 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물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 정말 물리적인 세계가 가지치기에 따라 복수의 세계로 분리된다는 것일까? 이렇게 관찰과 측정에 따라 여러-세계가 분기한다는 입장을 취하면 여러 문제들이 발생한다. 우선, 대체 어떤 물리적인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세계들이 분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오직 우리가 속한 세계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므로, 경험할 수도 없는 불필요한 세계들을 존재한다고 설정하는 것은 이른바 오컴의 원리에 어긋난다. 따라서 알버트는 양자역학의 상대적 상태 정식화여러-세계해석으로 보기보다는 여러-마음해석으로 보기를 제안한다.

  

   ‘상태들의 가지치기를 측정하는 인간의 마음과 관련짓는 것은, 복수의 세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을 가정해야 하는 여러-세계해석에 비해 여러 모로 덜 부담스럽다. 알버트의 기본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물리적 계는 마음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물리적 계가 가질 수 있는 여러 상태들 또한 마음들 중 일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물리적 계가 결정론적으로 변화할 때 마음들도 이에 대응해서 결정론적으로 변화하지만, 측정이 일어난 특정한 시점에서의 마음들의 분포는 정확히 양자역학의 실험 결과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설정된다. 예를 들어 상태 A가 시각 t에서 일어날 확률이

일 경우, 그 시각에서의 전체 마음들 중 절반이 상태 A와 대응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여러-마음해석에서는 물리적 계와 마음을 분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 계와 마음 사이의 대응관계 또한 설정하고 있다. 대체 알버트가 말하는 마음이란 물리적 계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마음또한 측정이나 의식처럼 모호하고 불분명한 개념이라면, 이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 만약 알버트의 주장처럼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이것이 물리적 계와 대응관계를 맺는다고 해보자. 그런데 왜 마음은 양자역학의 실험결과들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물리적 계의 변화에 발맞춰서 변화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대체 마음물리적 계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토록 기묘한 대응이 일어난단 말인가?

  

   ‘여러-마음해석은 양자역학에서의 측정 문제를 물리적 계가 아닌 인간의 마음혹은 측정할 수 있는 존재자의 마음문제로 옮기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 초점의 전환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마음에 대해서 연구할 것인가? ‘마음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그것이 물리적 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연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 두뇌의 신경작용을 신경생리학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마음마음이 물리적 계와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연구할 수 있을까? 섣불리 판단하기는 힘들겠지만, 나는 이와 같은 시도가 별 쓸모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리라고 예상한다.

  

   ‘여러-세계혹은 여러-마음해석은 모두 측정의 문제혹은 파동함수의 무너짐 문제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의도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없애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측정 문제는 양자역학의 형식이론이 구성될 때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형식화(힐버트 공간 형식화)에도 형식이론의 일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다. 측정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보른의 해석 규칙은 양자역학에서 제거할 수 없으며 이 규칙은 양자역학의 경험적 기초를 제공한다. 앞으로 지금의 양자역학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양자이론이 등장하지 않는 한, ‘측정의 문제를 제거하려는모든 시도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