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촘스키의 일상언어와 과학이론 이분법에 대한 비판적 검토

강형구 2016. 10. 17. 07:01

 

촘스키의 일상언어와 과학이론 이분법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여는 말 : 촘스키의 일상언어와 과학이론 이분법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1928~)는 생성문법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그가 주창한 생성문법 이론은 언어학계에서 인간의 언어능력을 잘 설명해주는 성공적인 과학적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언어학에서 촘스키가 일으켰던 혁명은 이제 혁명의 시기를 지나 언어학계 내에서 언어학을 지배하는 안정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촘스키가 일으킨 언어학 혁명의 여파가 단지 언어학이라는 분과영역에만 머무르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언어학에서의 혁명과 더불어 촘스키의 이론은 인간의 언어, 마음, 지칭 등에 대해 이전까지의 언어철학자들이 전개해 온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작업들에 과격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촘스키는 언어철학의 목적, 방법, 방향에 대한 급진적인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언어철학의 핵심적인 세 가지 주제들인 심신 문제’, ‘지칭 의미론’, ‘의미 및 내용 외재론모두에 대해서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위와 같은 언어철학에서의 세 가지 주제들에 대한 촘스키의 비판에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원론이라는 근본적인 이분법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근본 틀이다. 세계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과학이론적 탐구와 일상언어적 탐구가 가능하지만, 두 종류의 탐구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이러한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원론이 촘스키의 언어철학적 논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저술들 곳곳에서 드러난다. 언어철학에서의 심신문제에 대해 논하고 있는 논문 언어와 마음 연구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와 이원주의에서 촘스키는,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분하는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을 비판하면서 자연과학적 탐구의 대상은 일상적인 개념들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자연과학적 탐구가 일상적인 개념들을 대상으로 할 경우, 서로 같은 부류에 속하는 물리적인 두 사건들 사이에서조차도 법칙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역할은 촘스키의 지칭 의미론 및 외재주의 비판에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논문 언어 사용을 설명하기에서 촘스키는 언어에 대한 내재적인 탐구가 언어의 의미에 대한 이해에는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퍼트남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퍼트남이 사용하는 인간’, ‘언어 말하기등과 같은 개념들이 과학적인 개념이 아닌 일상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물리학자들이 일상적인 담화에서 물리적인 개념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언어학자들 또한 인간’, ‘언어’, ‘마음과 같은 개념들의 일상적인 사용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에서의 이해가 진행되어 가면서 과학적 개념들은 날카로워지고 일상적인 측면들을 점차적으로 잃어가며, 자연언어에서 적용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론적 성질을 갖게 된다. 이같은 이원론에 기반한 비판은 더밋(Dummet) 등이 제시한 공적 언어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촘스키에 따르면 더밋의 논의에 등장하는 공유된 언어’, ‘공동체라는 개념들 또한 일상적 개념들이며 따라서 과학적 탐구에 적합한 일관성을 갖지 못한다.

  

   또한 외재주의를 비판하는 논문 내재주의적 관점에서 본 언어에서 촘스키는, 일상적 개념에 대한 연구와 특정 현상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론을 만드는 것은 각각 서로 다른 지적 영역에 속하며, 일상적 담화와 자연주의적 탐구는 분명하게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언어와 마음에 대한 일상적이고 목적론적인 개념은 언어와 마음에 대한 자연과학적 탐구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 그리고 많은 언어철학자들이 자연과학적 탐구에 적합하지 않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촘스키의 논의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렇듯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은 촘스키의 언어철학적 입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간의 언어와 마음에 대한 철학적설명과 언어학적설명을 구분하려는 언어철학자의 견해들을 비판하는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촘스키의 이러한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이 어떤 근거들을 토대로 주장되고 있는지, 또한 과연 이 이분법이 충분한 타당성을 갖고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촘스키의 언어철학과 심리철학 전반을 평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본 논문에서 나는 우선 촘스키가 제시하는 일상언어와 과학이론 이분법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해보려 한다. 촘스키 본인이 이 이분법을 주제로 삼아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를 하지 않은 까닭에, 나는 주로 2000년에 출판된 그의 책 언어와 마음 연구에 있어서의 새로운 지평들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논문들을 참고로 그의 이분법을 재구성할 것이다. 이러한 재구성을 통해서 촘스키의 이분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근거들에 의거하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며, 이 근거들이 촘스키의 이분법을 어떤 방식으로 지지하고 있는지 또한 명료해질 것이다. 이렇듯 촘스키가 제시하는 이분법의 실체가 드러나고 나면, 이 이분법이 과연 타당한지 타당하지 않은지, 타당하다면 어떤 지점들에서 타당하며 타당하지 않다면 어떤 지점들에서 타당하지 않은지를 객관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나는 앞에서의 재구성을 토대로 촘스키의 이분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특히 나는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에 대한 촘스키의 이와 같은 이분법이 인간의 과학이론 습득 및 과학적 활동과 관련된 여러 중요한 실천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함을 보일 것이다. 내 생각에 촘스키의 이분법은 일상언어만을 사용할 수 있던 어린 아이가 오랜 시간의 학습과 교육 과정을 통해 과학자 공동체에 포함되어 과학적 활동을 수행하는, 우리 주변에서 빈번히 살펴볼 수 있는 명백한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또한 나는 촘스키의 이분법에 근거해서는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들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이분법이 이에 대한 적합한 설명을 부당하게 배제하고 있음을 보일 것이다. 또한 나는, 만일 촘스키가 이른바 과학형성능력(Science Forming Faculty)’을 가정할 경우 위의 사항들에 대한 적합한 설명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설명의 힘이 그다지 크지 않음을 보일 것이다.

  

   뒤이어 나는 버지(Tyler Burge)가 주장하고 있는 비개체주의의 관점이 인간의 과학 습득과 과학적 용어들의 의미에 대한 적합한 설명을 제공해줄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촘스키의 이분법이 지닌 문제들은 이 이분법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촘스키의 이분법은 언어와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할 때 방법론적으로 유용할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방법론적 이분법은 인간의 언어 및 마음과 관련된 다수의 문제들을 신비한 것으로 남겨놓는 한계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언어학적 설명이 아닌 철학적 해명이 가능하며, 버지의 비개체주의가 제시하는 철학적 해명 또한 이에 속한다. 언어학이 메울 수 없는 언어학적 신비를 철학적 해명이 메울 수 있는 까닭에 여전히 마음에 대한 철학적설명이 가능하고 필요한 것이다.

 

2. 촘스키의 일상언어와 과학이론 이분법에 대한 체계적 재구성

 

  

   고대 그리스와 인도의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언어학적 탐구의 역사는 유래가 깊다. 이러한 탐구의 전통은 중세를 거쳐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 이어져오지만, 촘스키가 생각할 때 이른바 자연과학적 언어학이 시작한지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전반기에 이르면 수학과 물리학, 기계공학, 컴퓨터 과학 등과 같은 형식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인간의 언어와 마음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본격적인 경험과학의 영역에 자리잡게 된다. 비록 촘스키가 그의 논문들 곳곳에서 영국의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의 탐구가 철학적 탐구가 아닌 경험과학적 탐구였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흄의 심리학적 인식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흄이 방법론에 있어서 마음에 대한 탐구를 물리학을 비롯한 다른 자연과학적 탐구들과 차별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흄은 뉴턴주의 물리학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 물리학의 경험과학적 방법론을 마음에 대한 탐구에도 적용시키려고 애썼던 철학자들이었다.

  

   촘스키가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인용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과학사적 사례들이 있다. 그 첫째는 뉴턴주의 물리학의 부흥이다. 뉴턴(Issac Newton, 1642-1727) 그 자신이 깊은 영향을 받은 데까르뜨적 자연철학의 전통에서는 모든 물리적 물체들이 접촉을 통해서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접촉을 통해서만 물체들 사이의 힘이 전달된다는 원리는 일견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적 사실들과도 잘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뉴턴이 제시한 보편중력의 법칙은 데까르뜨 물리학의 핵심적인 원리인 접촉 작용의 원리를 위반하는 것으로 보였다. 보편중력 법칙에 따르면, 질량

을 갖고 있는 물체 A와 질량

를 갖고 있는 물체 B가 거리

만큼의 간격 만큼 떨어져 있을 경우 두 물체 AB 사이에는 크기가

(이 때 G는 중력상수이다)이라는 힘이 작용하는데, 문제는 이 힘이 순간적이고 지속적으로 작용한다는 데에 있었다.

  

   뉴턴 자신도 이러한 보편중력에 대한 구체적인 물리적 메커니즘을 제시하려고 노력했고, 특히 그는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가 그랬던 것처럼 태양과 행성들 사이에 자기력과 유사한 힘이 발생하지 않는가하고 추측하기도 했다. 뉴턴이 살던 당시 이러한 추측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자기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했던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가 태양과 지구 또한 일종의 자석이라는 학설을 제시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턴의 물리학이 지상과 천상의 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 너무나 뛰어난 과학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뉴턴의 시기 이후 보편중력의 법칙은 물리학에 있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일종의 선험적 원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촘스키는 이같은 뉴턴 물리학의 성공을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이 분리되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촘스키가 생각할 때 뉴턴 물리학 이후 물리학에서는 더 이상 일상언어 및 이와 결부되어 있는 일상적 직관이 물리학 이론을 정당화시켜주는 근거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뉴턴 물리학의 성공은 과학이론이 발전하고 그러한 발전의 정당성 여부를 평가하는 근거가 일상적인 담론들과 분리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물리학에서의 중요한 개념들(, 질량, 속도, 가속도 등)이 일상적인 개념들로부터 그 단초를 얻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개념들이 수학적 이론(해석기하학, 미분적분학)과 결합하고, 개념들이 갖는 의미 및 적용 범위 또한 세련화되기 시작하면서, 물리학적 추론과 물리학의 이론 전개, 물리학을 통한 경험적 예측들의 산출 및 이에 대한 객관적인 시험 절차 등이 전문화되고 독자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이에 따라, 특정한 물리학 이론이 말하는 바가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 부합하는지의 여부는 점차적으로 그 이론의 과학적 성공을 평가하는데 있어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상적인 직관과의 합치 여부가 과학이론을 평가하는데 있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기준은 더 이상 과학이론 평가에 있어 중심적인 기능을 담당하지 못한다. 이는 20세기에 이르러 화학 이론의 대부분이 물리학 이론으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화학과 물리학은 서로 선명하게 구분되는 분과 학문들이라고 생각되었고, 화학에서의 핵심적인 원리들과 법칙들은 물리학의 원리들 및 법칙들과 통합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전자기학과 실험물리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고, 19세기 말을 지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고전적인 양자이론을 거쳐 현대적인 양자역학이 완성된다. 물리학 이론인 양자역학을 토대로 해서 화학적 원리들과 법칙들이 성공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다수의 물리학자들과 물리화학자들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으며, 이는 일상적인 직관과의 합치 여부가 아니라 적법한 자연과학적 성공만이 해당 과학이론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합당한 기준임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인 것이다.

  

   만약 과학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례들에 대한 위와 같은 평가가 촘스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과학을 바라보는 촘스키의 관점은 쿤(Thomas Kuhn, 1922-1996)의 그것과 상당부분 유사함을 추측할 수 있다.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 이전의 시기에는 하나의 분과학문에 서로 이질적인 이론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이 분과학문이 정상과학에 들어서고 난 이후에는 정상과학의 발전과 진보를 전반적으로 관장하는 패러다임이 과학자 공동체의 행위, 언어, 이론적 탐구 등을 강력하게 제약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과학자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용어들이 표면적으로는 비과학자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용어들과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이 용어들의 구체적인 의미들 및 적법한 적용범위는 비과학자 공동체의 그것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촘스키는 20세기 중반 이후 언어학 또한 물리학 및 화학 등과 같은 분과 과학들처럼 정상과학의 단계에 이를 수 있었으며, 그런 까닭에 더 이상 언어학은 일상적인 직관과의 합치 여부로 인해서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촘스키는 과학적 언어학인 내재주의 언어학에 대한 여러 언어철학자들의 비판이, 뉴턴 물리학이 등장했을 때 많은 데까르뜨주의자들이 뉴턴의 물리학을 격렬하게 비판한 것과 유사하다고 판단한다. 촘스키가 생각할 때 언어철학자들은 언어학이 이미 정상과학의 단계에 들어섰는데도 불구하고 정상과학 이전에 통용되는 일상적인 개념들 및 일상적인 직관을 기초로 과학적 언어학을 비판한다는 데에 핵심적인 문제가 있다. 물리학의 경우 사람들은 더 이상 물리학에서 등장하는 여러 힘들과 작용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물리학을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은 우리가 물리학적 물체들에 대해서 접할 수 있는 가지각색의 다양한 현상들을 모두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해서 물리학을 비판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물리학 이론은 세계에서 보여지는 다채로운 물리학적 사건들을 추상적이고 이상화된 상태공간에서 표상하는 까닭에 실제 세계에서 아주 제한된 적용 범위만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물리학 이론을 부적절한 이론이라고 비판하지 않는 것은 이 이론이 명확한 과학적 성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학적 언어학의 경우에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과학적 언어학 또한 인간의 언어와 관련된 복잡다양한 현상들을 모두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언어학에서 등장하는 원리들 및 개념들이 내적인 독립성과 자율성을 획득한 이후 충분한 경험과학적 성공을 거둔 까닭에, 과학적 언어학이 우리의 직관과 부합하지 않다거나 언어와 관련된 현상들을 모두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과학적 언어학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촘스키에 따르면 언어학에 대한 언어철학자들의 비판은 대개 위와 같은 부적절한 비판의 부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심적인 것물리적인 것이 분명히 분리된다는 주장, ‘공적인 언어가 존재한다는 주장,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세계에 실재하는 것과 대응된다는 주장 등은 모두 과학이론과 과학적 용어가 아닌 일상언어와 일상적 용어에 대한 직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촘스키가 생각할 때 경험과학적 탐구에 적합한 용어들은 일상적 의사소통에 적합한 용어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경험과학적 탐구에 적합한 용어들은 설명적 힘기술적 적합성을 갖고 있고, 이 용어들을 통해서 여러 언어학적 현상들에 대해서 체계적인 이론을 수립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의사소통에 적합한 일상적인 용어들의 경우, 이 용어들에는 너무나 많은 배경적 요소들이 개입하는 까닭에 이들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일상적인 용어들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시도한다면 이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될 것이며,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수립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촘스키는 사회언어학적 탐구와 민속지학적 탐구가 일종의 과학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탐구가 경험과학적인 적합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생물로서의 인간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언어적 능력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한 경험과학적 이론은, 적어도 현재의 상황에서는 내재주의적인 언어학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촘스키의 판단이다.

  

   과학이론적 용어들과는 달리 일상언어가 갖는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촘스키가 지적하는 것은 일상언어의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이다. 퍼트남이 예로 드는 이라는 일상언어적 용어를 사용해서 생각해보자. 만약 정수기의 필터가 특정한 종류의 ()’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필터일 경우, 그 필터를 통과해서 나오는 액체를 우리는 그냥 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유리잔에 담긴 담수에 차가 담겨진 티백을 잠시 담궜다가 뺄 경우, 우리는 그 유리잔에 있는 액체를 이 아닌 라고 부를 것이다. 두 경우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액체들의 구성 성분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대부분의

분자들과 일부 차 성분의 분자들), 우리는 그 액체들의 구성 성분을 근거로 해당 액체들에게 일상적인 용어를 적용하지는 않는다. 비교적 그 지칭체가 맥락독립적이고 관심독립적이라고 여겨지는 자연종 명사인 에게서도 이와 같은 맥락의존성과 관심상대성을 찾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일상언어적 용어들에게서도 맥락의존성과 관심상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일상언어적 용어들의 적용에 있어 나타나는 맥락의존성과 관심상대성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일상언어적 용어들의 맥락의존성과 관심상대성은 이들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불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수립하기를 요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촘스키가 과학이론과 일상언어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직관을 가질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이론의 기술적인(technical) 용어들은 그 용어들과 관련된 우리들의 일상적인 직관과는 상관이 없으며, 이 이론이 성공적이라고 밝혀진다고 해서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에 이론적 지칭 관계 R과 유사한 R'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R'에 관한 직관을 가질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 직관과 관련되는 일상적 개념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없으며, 우리가 텐서결정불가능성과 같은 용어들에 대해서 직관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기술적 혁신을 통해 등장한 용어들에 대해서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을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학적 언어학에서 등장하는 용어들에 대한 직관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과학적 언어학은 진정한 경험과학적 이론이며, 이 이론에 등장하는 용어들은 일상적인 용어가 아닌 과학적인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학이론에 등장하는 용어들에 대한 직관을 가질 수 없는 것은 과학적 개념들이 일상적 개념들과는 독립적인 발전의 논리와 평가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적인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일상적인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가 갖는 직관이 의사소통의 합당성과 적절성 여부를 평가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과학적 활동의 진행과 평가에 있어서는 이같은 직관이 크게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학이론적 용어들에 대한 일상적인 직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경험과학적 탐구가 진행됨에 따라서 과학이론적 용어들이 일상적인 용어들과 차별화되는 독립적인 의미론적 특성들을 갖게 되는 것과 병행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과학이론과 일상언어의 이분법에 대한 촘스키의 입장을 정리해보자. 촘스키에 따르면 뉴턴 물리학으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의 출현 이후, 과학이론의 발전 및 평가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과학이론적 용어들과 일상언어적 용어들의 의미, 논리, 사용 등은 분리되었으며, 과학자들은 더 이상 과학이론을 평가할 때 우리가 갖는 일상적인 직관과의 합치 여부를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하지 않게 되었다. 한 분과학문이 이른바 정상과학의 범주에 소속되고 나면, 그러한 과학에 속하는 이론적 용어들은 더 이상 일상적인 용어들에서와 같은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을 갖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과학이론적 용어들이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을 갖게 될 경우, 이는 적합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과학이론적 용어들에 대한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직관이 과학적 탐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탐구가 진행되면서 과학이론적 용어들이 우리의 일상적 직관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멀어지기 때문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20세기 중엽 이후 언어학도 비로소 이러한 정상과학의 범주에 포함되었으며,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논리를 근거로 발전하고 평가되는 하나의 엄연한 경험과학이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언어학적인 용어들은 맥락의존적이거나 관심상대적이지 않으며, 이 용어들에 대한 일상적인 직관 또한 가질 수 없다. 또한 특정한 언어학적 용어들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직관이 아닌 경험과학적 성공 기준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일상적인 용어들에 대한 직관에 근거해서 언어학을 비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는 과학적 언어학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촘스키의 입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촘스키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검토

 

  

   이제 나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재구성 된 촘스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우선 뉴턴 물리학의 등장에 대한 촘스키의 과학사적 평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데까르뜨주의의 물리학이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 부합하는 물리학이었던 반면 뉴턴주의 물리학이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 부합하지 않는 물리학이었다는 촘스키의 평가는 과학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뷔리당(Jean Buridan, 1300-1358?), 오렘(Nicole Oresme, 1323-1382) 등 후기 중세 자연철학자들의 물리학적 작업을 계승해서 갈릴레오의 역학이 등장했을 때,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역시 지구가 질량을 가진 물체를 끄는 힘을 자연적 본성이라고 설명했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서의 개념과 상당부분 부합하는 것이었다. 물질이 단순히 연장과 질량만을 가진 비생명적인 존재라는 개념은 데까르뜨의 시대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일상적인 직관과 부합하지 않았고, ‘힘이 물질들의 충돌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데까르뜨 역학의 원리 또한 사람들이 에 대해 갖고 있던 일상적인 직관과 부합하지 않았다.

  

   데까르뜨 역학의 원리는 오직 데까르뜨주의 물리학을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만 직관적으로 자명한 사실이었다. 당시 근대화학의 원조 격이었던 연금술에 종사하던 학자들 및 자기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럽고 고유한 힘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이 힘들이 다른 물질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믿고 있었다. 이와 같은 뉴턴 당시의 과학적 상황을 생각해볼 때, 뉴턴 본인이 연금술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또한 뉴턴 당시 영국의 과학자 사회에서는 태양과 행성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어떤 수학적 형태를 띠고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행해졌는데, 뉴턴의 적수로 알려졌던 후크(Robert Hooke, 1635-1703) 역시 태양과 행성들 사이에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하는 힘이 작용할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후크에 비해 뉴턴이 두드러지는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세 운동법칙들과 보편중력의 법칙을 결합해서 종합적인 이론적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데 있었다. , 뉴턴이 제시한 보편중력의 개념 그 자체는 영국의 과학자 공동체에 있어서는 비교적 친숙하고 익숙한 사실이었다.

  

   물론 뉴턴의 물리학이 이전까지 물리학을 지배해오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러나, 뉴턴 물리학을 기점으로 과학이론적 개념이 일상적인 개념 및 직관과 결별했다는 촘스키의 평가는 왜곡되거나 과장된 것이다. 촘스키의 입장에서는 뉴턴의 보편중력 개념이 단지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영국의 과학자 공동체에만 친숙했고, ‘과학자 공동체가 갖는 직관은 일상적인 직관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뉴턴 당시에는 19세기 중엽 이후에야 등장한 전문적인 과학자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영국의 왕립학회 회원들 중 상당부분은 과학에 전문적으로 종사하지 않는 비전문가들이었다. 다시 말해, 당대의 과학적 지식에 대한 풍부한 교양을 갖춘 비전문가들 또한 뉴턴의 보편중력 개념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뜻이다. 뉴턴의 물리학을 프랑스로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볼테르(François-Marie Arouet, 1694-1778)와 샤틀레 부인(Émilie du Châtelet, 1706-1749) 또한 전문적인 과학자가 아니었다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리학이 정상과학의 범주에 포함된 이후 물리학 이론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가 그 이론이 등장한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상적인 직관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촘스키의 평가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혁명적이라고 평가받았던 이론들은 대개 당시의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문적인 물리학자들의 직관과도 부합하지 않았지만, 이후 이 이론들이 설명력과 예측력에 있어서 매우 성공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면서 직관과의 합치와는 무관하게 정통적인 과학이론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혁명적인 과학이론이 등장하고 나면, 이 이론에 등장하는 원리들과 개념들은 이후의 학자들에게는 매우 당연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이와 같은 수용은 비단 과학자 공동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뉴턴주의 물리학의 부흥 및 발전 이후 뉴턴 물리학에서의 주요 원리들과 개념들은 초중등 및 고등 교육기관에서 빈번하게 교육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회자되고 논의되었다.

  

   따라서 과학이론과 일상언어가 선명하게 분리되고 과학이론적 세계와 일상언어적 세계가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촘스키의 구분은 다소 과장되고 강한 것이다. 만약 촘스키가 이와 같은 자신의 강한 입장을 지속할 수 있으려면, 과연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명확한 구분을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이론을 진행시키는 논리와 과학이론을 평가하는 방법론적인 기준이 일상언어적 용어 및 일상언어적 직관과 비교적 두드러지게 구분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로부터 곧바로 과학이론과 일상언어의 이분법이 도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촘스키는 일상언어적 용어들이 맥락의존적이고 관심상대적인 반면 과학이론적 용어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이 사항에 대해서 촘스키 자신이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논의를 하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특히 촘스키는 일상언어적 용어들의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예들을 제시하고 있을 뿐, 과학이론적 용어들이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으로부터 명료하게 차단됨을 신빙성 있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또한 촘스키의 입장에서 설명해야 하는 중요한 현상이 있다. 일상적인 언어만을 사용할 수 있던 인간이 점차적인 학습을 통해서 과학이론들을 습득하게 되고, 이후 과학자 공동체에 소속되어 과학적 활동을 수행하게 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일상적인 언어와 일상적인 직관만을 갖고 있던 인간이 어떻게 과학이론을 습득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촘스키가 말하는 것처럼 과학이론과 일상언어가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면, 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일상적인 언어와 직관을 가진 인간에게 과학이론을 이해할 수 있고 과학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인간은 해당 이론에 고유하고 제한적인 추론 과정을 따라가면서, 특수하고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과학이론적 개념들, 원리들 및 추론들을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연습하면서 과학이론을 이해하고 실질적인 과학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이 이전까지 갖고 있던 일상언어적 개념들과 직관들이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정교하고 제한된 방식으로 사용될 경우, 일상언어적 개념들과 직관들은 과학이론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촘스키의 입장에서도 위와 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언어적 활동의 기반이 되는 내재적인 언어능력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활동의 기반이 되는 내재적인 과학형성능력(Science Forming Faculty)’을 가정하는 것이다.언어능력과는 구분되는 인간 종에 보편적인 내재적 능력인 과학형성능력을 가정할 경우, 과학이론과 일상언어의 이분법이라는 촘스키의 입장은 유지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 세계와의 경험적 상호작용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과학형성능력이 적절하게 촉발될 경우, 마치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과학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일상적인 언어사용과 과학적 활동은 서로 이질적인 내재적 능력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용어들은 맥락독립적이고 관심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이 용어들에 대한 일상적 직관 또한 전혀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촘스키 본인이 인정하고 있듯이 그가 언급하는 과학형성능력은 현재로서 하나의 사변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들 또한 제시된 바가 없다. 비록 촘스키가 과학적 언어학의 성공과 유효성에 대해서는 자신 있는 입장을 취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과학형성능력이라는 가설을 통해 인간의 과학적 활동을 설명할 수 있는 체계적인 이론(기술적 적합성과 설명적 적합성을 갖춘)을 제시하지 않은 까닭에 그가 제안하는 과학형성능력개념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학형성능력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촘스키의 입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또한 그다지 쉽지 않아 보인다. 촘스키는 분명 과학적인 언어학이 과학적 언어가 아닌 자연언어를 다룬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과학적 언어학은 과학이론적 용어들이 갖는 복잡하고 전문적인 의미들을 규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촘스키로서는 ‘I-언어수행체계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과학적 용어들의 의미가 생성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이 동일한 기제를 통해서 생성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는 왜 동일한 기제를 통해 생성됨에도 불구하고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이 이질적인 종류의 의미를 갖는지를 추가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가적 설명이 그의 언어학 범주 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촘스키는 인간의 과학이론 습득 및 과학적 활동이라는 명백한 현상을 일종의 설명할 수 없는 기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과학이론 습득 및 과학적 활동이라는 현상 또한 자유롭고 이성적인 인간 행위이기 때문에, 촘스키는 이 현상이 인간에게 영원한 신비로 남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할 경우, 촘스키가 제시하는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은 적절하지 않은 구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이론적 용어들의 본성 및 과학적 활동의 본성 자체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는 일종의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는 주장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촘스키의 입장에서는 과학적 이론 습득 및 과학적 활동은 경험과학적으로 탐구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곧바로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는 주장이 도출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촘스키는 일상언어적 용어들이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 과학이론적 용어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을 전혀 가질 수 없다는 두 가지 사실 만으로도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촘스키의 생각과는 달리 과학이론적 용어들 또한 전적으로 맥락독립적이고 관심독립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 행성 위에서 질량을 가진 물체가 낙하하는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 때 우리는 물체의 낙하 운동 가속도가 일정하다고 상정할 수 있다. 물체가 낙하하는 행성에 비해 무시할 만큼 작고, 낙하 높이 또한 상대적으로 낮으며, 물체와 행성 사이의 기체로 인한 마찰력이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일 경우에 그렇다. 그러나 만약 물체가 상대적으로 클 경우, 낙하 높이가 높을 경우, 기체의 마찰력이 일정 정도 이상일 경우에는 낙하 운동 가속도가 일정하다고 상정할 수 없다. 우리는 맥락과 상황에 따라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계산 결과의 정확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서 물체의 낙하 운동 가속도를 다르게 설정한다.

  

   ‘낙하 운동 가속도라는 과학이론적 용어가 보이는 이와 같은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을 촘스키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촘스키는 과학이론적 용어의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은 일상언어적 용어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구분된다고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의 측면에서 두 종류의 용어들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는 촘스키의 주장은 문자 그대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촘스키가 자신의 주장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두 경우에 있어서의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이고 설득력있는 논변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현재까지 촘스키 본인이 이러한 논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맥락의존성관심상대성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과학이론적 용어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떠한 일상적인 직관도 가질 수 없다는 촘스키의 주장은 어떠한가? 나는 이러한 주장 또한 유지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촘스키의 이러한 주장은 여러 주요 과학자들의 입장 및 과학적 실천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경우 우리가 이 이론에 대한 일상적인 직관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많은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양자역학이 모든 과학이론을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상대성이론의 경우 비록 이 이론의 많은 귀결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 부합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초가 되는 정의들과 공리들 및 원리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에 상당히 부합한다. 상대성이론은 고전역학에 비해 개념적으로 더 단순해졌다는 아인슈타인 본인의 평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철학자인 라이헨바흐의 경우 상대성이론의 이론적 귀결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 부합하는 공리들과 정리들을 토대로 도출될 수 있음을 보인 바 있다. 더 나아가, 현재의 많은 과학적 실천들 속에서 과학자들이 우리의 직관과 상당부분 부합하는 각종 모형들과 메커니즘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과학적 언어학에 등장하는 이론적 용어들에 대한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을 갖기 힘들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 언어학이라는 이론에 특수한 현상일 뿐이며, 모든 적법한 경험과학적 과학이론들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나는 과학이론과 일상언어의 이분법이라는 촘스키의 입장이 과도하게 강한 입장이며 그런 까닭에 적법하게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였다. 물론 여러 측면에서 과학이론과 일상언어가 보여주는 특징들 사이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이러한 정도의 차이를 근거로 촘스키와 같이 이분법적 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적 언어학이 과학이론적 용어들의 의미 및 과학적 활동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다는 것을, 따라서 인간의 과학이론 습득 및 과학적 활동은 끝내 우리에게 신비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합법적인 지적인 탐구가 반드시 촘스키적인 의미에서의 경험과학적 탐구로 한정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언어학이 신비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지적 탐구 또한 그 문제를 신비로 남겨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촘스키의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과학이론 습득 및 과학적 활동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해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해명을 버지의 비개체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

 

4. ‘비개체주의의 관점에서 본 과학적 용어와 과학적 활동

 

  

   버지(Tyler Burge)가 표방하는 심적 내용의 비개체주의(Non-individualism)’는 퍼트남의 잘 알려진 논문 의미의 의미로부터 중요한 단서를 얻어서 등장했다. 퍼트남은 그의 논문의미의 의미에서 이른바 쌍둥이 지구 사고실험을 통해 개인의 심적 상태만으로는 개인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와 외연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주장을 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언어적 노동의 분업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고 이 가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회언어학적이고 심리언어학적인 탐구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퍼트남이 생각할 때 언어는 마치 증기선과도 같이 복수의 사람들의 협동적 활동이 필요한 도구이다. 언어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이 논문에서 퍼트남은 비단 언어적 노동의 분업가설만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특히 그는 이 논문에서 과 같은 자연종 용어들이 고정지시적일 뿐만 아니라 지표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했지만, 자연종 용어들에 대한 퍼트남의 이같은 주장의 합당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버지는 그의 논문 개체주의와 심적인 것에서 퍼트남으로부터 비롯된 문제의식을 더 확대심화시킨다. 그는 이른바 관절염 사고실험을 통해, 개인이 동일한 물리적 이력과 동일한 비지향적 심적 이력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을 넘어선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개인의 심적 내용의 본성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인다. 버지가 제시하는 사고실험이 표면적으로는 퍼트남의 쌍둥이 지구 사고실험과 매우 유사한 듯 보이지만, 버지는 퍼트남과는 달리 자신의 사고실험이 주체가 불완전한 이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심적 내용을 부여할 수 있는 모든 단어들에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버지에 따르면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들만 이러한 단어들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숱한 용어들 통한 이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철학적 통찰은 심적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심적 내용과 심적 표상이 가능하게 만드는 일반적인 조건구조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이 통찰이 옳다는 것은 우리가 추가적으로 경험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선험적이며, 이것의 선험성과 옳음은 우리의 직관적인 반성을 통해 확보된다.

  

   버지는 뒤이은 논문개체주의와 심적인 것에 대한 후기에서, 자신의 앞선 논문이 무엇을 주장하고자 했으며 그 논문의 언어철학적이고 심리철학적인 의의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버지에 따르면 그는 개인의 지향적, 표상적, 심적 상태들과 사건들은 대개 구성적인 방식으로 개인이 더 넓은 사회적 환경과 갖는 관계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그의 논문은 개개인의 믿음이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어떤 종류의 심적 상태를 갖고 있으며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해당 개념에 대한 완전한 개념적 해명을 갖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을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경험적 정보들을 통해 그 개념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완전한 해명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해당 개념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적 해명이 완전무결해질 수 없음을 선험적 반성을 통해서알 수 있다. 언어적 개념과 관련된 심적 내용은 그 구조비개체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퍼트남의 경우 촘스키의 언어학이 구문론에만 적용되고 의미에 대해서는 별다른 통찰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버지의 경우는 촘스키 언어학의 방법론 및 성과들을 상당부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 버지는 실제의 많은 언어적심리적 구조가 의식적 내성, 직관적 판단, 철학적 반성을 통해 접근 불가능하다는 데에 촘스키와 동의하며, 과학적 언어학에서 볼 수 있는 인간 언어와 마음에 대한 이상화(idealization)의 작업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지는 언어에 대한 모든 의미있는 지적 탐구가 경험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촘스키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버지에 따르면 조심스럽게 사용된 직관적 판단 또한 우리에게 관련된 주제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다. “반성을 통한 지식은 능숙함, 다양한 사례들에 대한 직관에 근거한 반성, 논증적 또는 다른 추론적 검사, 수정에의 개방 등을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가운데 직관과 반성을 통해 특정한 판단을 얻었을 경우 그러한 판단은 우리에게 진정 의미있는 지식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들의 의미가 부분적으로 인지 능력의 내재적인 구성 성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이것 만으로는 의미의 모든 측면들을 설명할 수 없다. 버지에 따르면 우리의 인지적 구성에 있어 선험적으로 알 수 있고 선험적으로 보장되는 요소들은 내재적이지 않다.” 의미가 비개체적으로 개체화된다는 것은 과학적 언어학이 아니라 의미의 조건과 구조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부터 얻은 결론이며, 이는 의미에 대한 가치 있는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버지는 직관과 반성적 판단이 지식을 산출할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직관과 반성이 의미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는 부적절하다는 촘스키의 비판에 반대하고, 더 나아가 촘스키가 대변하는 과학적 언어학 및 마(Marr)로 대표되는 인지심리학 역시 순전한 내재주의적 이론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문들에서도 버지가 제시한 사고실험에서와 유관하게 유사한 심리학적이고 의미론적인 용어들 또는 개념들(믿다, 지각하다, 의미하다, 지칭하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버지의 이같은 비개체주의는 과학이론의 습득 및 과학적 활동이라는 현상에 대한 적합한 설명을 제공해줄 수 있는가? 나는 버지의 입장이 이에 대한 충분히 합리적인 철학적 해명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버지는 과학이론 및 일상언어의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과학적 언어학의 많은 성과들을 긍정하고 있으며,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들의 부분적인 의미가 우리의 내재적인 인지적 구조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 버지는 과학적 언어학의 성과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촘스키와는 달리 철학적 의미론과 과학적 의미론이 양립가능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버지는 촘스키의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론과 일상언어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버지가 개개의 인간들이 어떤 방법을 통해 점차적으로 언어에 대한 경험적으로 더 정교하고 적합한 개념적 해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면, 버지는 과학이론의 습득 및 과학적 활동이라는 현상을 신비로 남겨두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버지는 더밋과는 달리 공유된 언어를 가정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언어적 활동 및 개념에 대한 인간의 이해 증진을 설명한다. 버지에 따르면 인간들은 공통적인 생물학적 특징들을 갖고 있고, 거의 동일한 지각적인지적 기관들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은 태양계에 속한 행성 지구라는 비교적 유사한 물리적 환경 또한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경험하는 지각적 경험들 중 많은 것들은 기초적이며 보편적이다. 세계와의 공통적인 지각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인간의 심적 상태 또한 어느 정도 고정되며, 이같이 지각적으로 고정된 사례들은 우리가 언어적이고 의식적으로 갖는 단어 또는 개념과 연결되어 단어 또는 개념의 전형적인 적용을 결정한다. 우리가 단어 또는 개념에 대해 갖는 개념적 해명은 지각적 경험으로부터 혹은 다른 사람들의 언급들로부터 추론되지만, 인간이 불완전한 개념적 해명을 갖고 있더라도 그 개념을 무리없이 적용할 수 있다. 지각을 통해 도달된 사례들은 특정한 개념적 해명의 시도가 적합한지의 여부를 평가하는 초석이 되며, 개념적 해명은 사례들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진보를 이룬다. 개념 혹은 의미에 대한 개념적 이해의 진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각적 능력과 개념적 해명이 결합한다고 해도, 모든 가능한 상황 속에서 한정적인 적용을 갖고 있는 개념들의 올바른 적용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사례들에 대해 맺는 우리들의 인지적 관계들은 근본적으로 오류가능하며”, 우리는 관련된 논증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개념적 해명을 자력으로 혹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 수정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경험적 통찰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며, 더 나은 경험적 통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일정한 개념들에 대한 더 나은 특성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버지는 이같은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두 가지 주요한 근거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인간은 지각추론의 도구를 공유하고 있으며 인간이 접하는 사례들이 공공적이다. 둘째, 다른 인간들이 한 인간의 개념적 해명을 정정해줄 수 있으며, 인간으로서는 오류 불가능한 해명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개인의 언어적이고 인지적인 원천이 넓어질수록 사례들에 대한 접근에 있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증가하게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보충하기 위해 타인들의 경험에 의존한다.

  

   이와 같은 버지의 설명에 따르면 더 이상 인간의 과학이론 습득과 과학적 활동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 남지 않는다. 비록 어린아이가 부분적으로 자신이 구사하는 단어들의 의미를 내재적으로 알고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늘 어린아이는 물리적 세계와 접촉하고 사회 속에서 타인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의사소통하는 까닭에, 아이의 심적 내용은 항상 비개체적으로 개체화된다. 아이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개념들에 대한 해명을 진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또는 책을 비롯한 각종 매체들을 통한 학습에 의해서 스스로의 개념적 해명을 진전시킬 수 있다. 과학의 습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된 아이는 교사 및 다른 학생들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또한 해당 과학 분과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쌓여온 지식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과학책들을 지속적으로 학습함을 통해서, 과학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에 대한 더 나은 개념적 해명을 갖게 되고 그러한 해명들의 적용에 숙달된다.

  

   이상과 같은 설명은 과학과 관련되어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관찰할 수 있는 실천들을 잘 설명해준다. 과학을 가르치는 어떤 교과서를 펼쳐보아도 그 교과서에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와는 차별화되는 과학이론적 용어들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중요한 이론적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논의가 전개되어 나갈수록 개념들의 적용 방식 및 적용의 제한조건들이 점차적으로 세련되고 정교해진다. 물론 수학이나 물리학의 경우에는 그 자체만 보아서는 일상적인 직관을 얻기 힘든 수식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지만, 수식들이 독자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늘 일상언어적 표현들을 통한 설명과 더불어서 사용된다. 또한 우리는 과학이론을 배우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추론할 뿐만 아니라 단계적이고 제한적으로 직관을 사용하는 법을 습득하지만, 이러한 직관이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는 판이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혹자는 상대성이론 또한 그 이론의 주요 귀결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는 심각하게 반하지 않는가 하고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은 다음과 같이 답변될 수 있다. 상대성이론의 가장 기초가 되는 공리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 부합하는 반면, 이러한 공리들 및 특정한 정의들을 토대로 추론의 사슬을 이어간 결론은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의 공리들은 뉴턴역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경험적으로 문제가 없는 공리들인 반면, 뉴턴역학의 여러 귀결들은 경험적으로 문제가 있는 절대 시간절대 공간을 전제로 한 귀결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만약 우리가 뉴턴역학의 여러 귀결들이 우리의 직관과 부합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뉴턴역학이라는 과학이론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뉴턴역학의 귀결에 대한 우리의 익숙함 또한 일종의 학습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며, 이같은 익숙함은 상대성이론에 대한 학습에 의해서 충분히 정정될 수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상대성이론의 공리들 및 그 귀결들 또한 익숙하고 직관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물론 버지의 비개체주의는 인간이 과학이론을 습득하고 과학적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과학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연언어적 활동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하는 과학적 언어학과 과학적 활동에 대한 비개체주의적관점에서의 설명이 동일한 수준에 있지 않음은 분명해보인다. 그러나 버지의 비개체주의는 경험과학 탐구이 아닌 철학적 반성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적어도 지금까지의 분석철학적 전통에서 보기 힘들었던 의미에 대한 혁신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버지의 비개체주의적인 철학적 통찰은 의미에 관한 연구가 과학적 언어학과 인지심리학 뿐만 아니라 사회언어학적 탐구도 필요로 함을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퍼트남과 더불어 버지는 의미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고, 이는 다름아닌 철학적 추론과 반성적 작업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철학적 반성을 통해 얻어진 결론이 인간 언어의 의미에 관해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준다는 것, 더 나아가 비개체주의의 관점이 인간의 과학이론 습득 및 과학적 활동에 대해서 충분히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해준다는 것은 결코 사소하게 생각할 수 없는 사항들이다.

  

   특히 인간의 심적 내용이 물리적 환경 및 사회적 환경에 의존하고 있기에 늘 인간은 불완전한 개념적 해명을 갖고 있다는 선험적인통찰, 인간의 개념적 해명이 점차적으로 수정되고 정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완벽하게 될 수는 없다는 통찰, 인간의 개념적 해명은 늘 타인들에 의한 수정에 열려있다는 통찰은, 비록 그 통찰이 직접적인 경험과학적 탐구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적 의미의 본성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과연 이러한 이해가 소설이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이해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적인 반성을 통해 도달한 이해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이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과학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중요한 과학자들은 늘 철학적 반성을 수행했으며, 중요한 과학적 원리들 및 과학적 추론의 방법들 또한 철학적인 반성 작업을 토대로 얻어진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후의 사회언어학적인 탐구가 인간 언어가 보여주는 다양한 의미들의 본성, 특히 인간의 과학적 용어들이 갖고 있는 의미들의 본성에 대한 본격적인 지적 탐구를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탐구가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또한 분명한 것은, 일종의 철학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에 입각해서는 인간의 과학이론 습득 및 과학적 활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반면, 버지의 비개체주의적 입장에서는 이에 대한 충분히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적어도 철학적 측면에서 버지의 입장은 촘스키의 입장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맺는 말: 언어학적 신비와 언어철학적 해명

 

  

   경험과학으로서의 언어학이 다룰 수는 없지만 적법한 언어철학적 해명이 가능한 현상들이 있다. 그러한 현상들을 대표하는 사례가 바로 과학이론의 습득과 과학적 활동이라는 현상이다. 촘스키는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이 현상을 일종의 신비로 만들지만, 이는 촘스키의 생각처럼 원천적으로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이 아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버지의 비개체주의의 관점에서는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을 도입하지 않으면서도 이 현상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개체주의적인 설명은 과학적 설명이 제공해줄 수 없는 철학적해명이다. 언어의 의미에 대한 진정한 통찰을 단지 과학적 언어학만이 제공할 수 있다는 촘스키의 입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가 갖는 의미들이 우리의 마음에 비개체적인 방식으로 개체화된다는 것,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의미를 갖는데 있어 우리 자신 너머에 있는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에 구성적으로의존한다는 것은 철학적 반성을 통해 얻어진 의미있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적 언어학과는 별도로 언어철학이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실제로 철학적 탐구가 이후의 경험과학적 탐구를 유도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례들을 과학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고, 이는 인간의 언어와 의미가 갖는 본성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적 탐구와 철학적 탐구는 서로 양립불가능한 적대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보충하는 관계를 이룬다. 과학적 탐구가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한 적절한 철학적 해명이 이루어질 수 있고, 철학적 해명으로는 본격적인 탐구가 불가능한 주제들에 대해서 과학적 탐구가 연구를 진행시킬 수 있다. 철학자들은 과학적 탐구의 귀결들로부터 중요한 철학적 통찰을 얻을 수 있고, 과학자들 또한 과학적 추론, 과학적 방법론 및 과학이론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귀결들로부터 과학적 실천에 관련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정상과학적 탐구가 진행된 이후에는 더 이상 그 과학에 철학적 통찰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입장은 수용되기 힘들다.

  

   촘스키의 생각처럼 경험과학적 탐구가 불가능해지는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점들에서 볼 수 있는 명백한 현상들을 그저 다룰 수 없는 신비로 남겨두기보다는 이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제시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철학적 해명에 등장하는 여러 논증들 또한 나름의 체계성과 일관성을 가지며, 철학적 해명을 단순한 비과학적 이야기로 취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적 언어학을 통한 탐구가 불가능한 지점에 촘스키가 일상언어와 과학이론의 이분법이라는 철학적 주장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철학적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이고자 했다. 흥미로운 것은 촘스키의 철학적 주장이 철학적 탐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비판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촘스키의 철학적 주장은 합당하게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 입장을 대체할 수 있는 더 나은 철학적 주장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버지의 비개체주의이다. ‘비개체주의의 입장을 토대로 우리는 언어학적 신비를 언어철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버지가 과학적 언어학의 상당부분을 수용하고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과학적 탐구가 가능해지는 지점에서는 과학적 설명이 철학적 설명보다 더 납득할만하고 강력해진다는 것은, 근대과학의 출현 이후 철학이 자신의 영역을 점차적으로 분과학문들에 넘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잘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탐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현상들과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이러한 현상들과 문제들에 철학적 반성과 탐구가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반성과 탐구는 이러한 현상들과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제시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이들과 관련된 과학적 탐구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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