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양자역학의 철학 독서노트 01

강형구 2016. 10. 18. 06:59

 

 

힐버트 공간, 벡터 공간, 벡터, 연산자

 

    플랑크(Planck)1900년에 검은물체로부터 방출되는 빛에너지가 띄엄띄엄한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고(E=nhν), 1905년에 아인슈타인(Einstein)이 빛은 파동이 아니라 알갱이라는(E=hν) 이론을 제시했다. 보어(Bohr)가 자신의 고전적 원자이론(1913)을 제안할 때 보어는 각운동량의 양자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으면서도 대응원리및 고전 전자기학의 요소들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 플랑크에서 보어에 이르기까지의 양자이론은 그야말로 고전물리학적인 직관 및 개념과 양자역학적 직관 및 개념이 뒤범벅된 상태에서 발전했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Schroedinger)의 파동역학의 등장으로 이러한 상황은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비록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또한 고전물리학적인 개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수립한 이론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적인 수학적 형식체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을 수립하려던 초기부터 원자 이하의 현상에 대한 직관을 갖는 것을 포기했고, 다만 주어진 실험자료들을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형식체계를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반면 슈뢰딩거는 여전히 파동이라는 직관을 유지하길 원했지만, 그가 자신의 슈뢰딩거 방정식을 도출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는 파동에 관한 편미분방정식이론이라는 수학이론이 수학자들(특히 힐버트Hilbert와 쿠랑Courant)에 의해서 개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리적 현상에 대한 정합적인 수학적 형식체계가 잘 개발되고 나면, 이 체계에 대한 이론은 해당 물리현상에 대한 인간의 일상적인 직관과는 별도로 발전되고 체계화된다. 이 같은 측면(인간의 감각경험에 기반한 직관과는 별도로 해당 현상에 대한 수학적 형식체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은 물리이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해왔는데, 양자역학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에 이어 디랙(Dirac)이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을 아우를 수 있는, 수학적으로 더 간결하게 형식화된 양자역학을 제안했고, 폰 노이만(von Neumann)은 지금껏 물리학자들에 의해 개발되어 온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이론이 어떤 종류의 수학적 상태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 상태가 표현되고, 그 상태와 관련된 연산자들은 무엇인지등과 같은 형식적 문제들을 비교적 완결적으로 정식화한다. 다시 말해 폰 노이만은, 실제로 이루어진 다양한 경험과 실험을 바탕으로 여러 형태의 수학적 추론과 추측을 통해 이렇게 설키고 저렇게 설키며 개발되어 온 양자역학을, 경험과는 어느 정도 분리된 수학적 상태공간으로 엄밀하게 정식화한 것이다. 이제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분업화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수학적 형식이론 그 자체를 탐구하고 개발할 수 있다. 둘째, 그들은 형식이론에서 등장하는 상태공간, 상태, 연산자 등이 실제의 경험 및 실험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탐구할 수 있다.

  

   경험 및 실험과 하나하나 대조해가며 물리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학이 물리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경험 및 실험과 독립적으로 발전될 수 있는 독자적인 논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의 경우,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이 이론은 원리이론인 까닭에 비록 그 이론의 귀결들 중 많은 부분이 우리의 일상적 직관과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이 이론의 전개 과정은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과 상당히 부합한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경우에는 달랐다.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어떤 기초가 되는 특정 원리들을 토대로 개발된 이론이 아니라, 고전물리학에서 유효하다고 판정된 주요 원리들 및 19세기 중엽 이후 산적하게 된 여러 실험자료들을 토대로 다양한 추측들이 얽히면서 등장한 이론이다. 그런 까닭에 양자역학에서는 최종적으로 체계화된 형식이론과 우리의 실제적 경험 또는 실험과의 괴리가 크고, 수학적으로 개발된 형식이론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등장한다. 따라서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의 형식이론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으며, 앨버트와 휴즈 모두 이후의 철학적 논의를 위해서 그들의 책 초반부에는 양자역학의 형식이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상이 내가 힐버트 공간, 벡터 공간, 벡터, 연산자라는 수학적 개념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한 내용들이다.

  

   이제 나는 양자역학의 형식이론의 기초가 되는 여러 개념들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려 한다. 우선, 양자역학의 형식이론은 벡터 공간이라는 수학적 상태공간에서 전개된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벡터는 사건의 물리적 상태를 대표한다. 벡터 공간에 속한 임의의 벡터는 그 공간에 속한 기저(basis)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 연산자란 어떤 벡터로부터 새로운 벡터를 만드는 메커니즘이며, 양자역학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아닌 선형연산자이다. 선형연산자는 행렬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으며, 연산자

와 벡터 B에 대해

가 하나의 수일 때,

B=

B일 경우, B를 연산자

의 고유값

를 지닌 고유벡터라고 한다. 양자역학의 알고리듬을 요약해보면, (A) 물리적 상태는 벡터로 대표되며(물리적 상태), (B) 물리적 계에서 측정가능한 성질은 주어진 계와 연관된 벡터 공간에서 선형 연산자로 대표되며(측정가능한 성질), (C) 임의로 주어진 계를 대표하는 상태 벡터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한 결정론적인 법칙(슈뢰딩거 방정식)이 존재하며(동역학), (D) 상태 벡터가

인 계가 있을 때, 측정된 성질 B와 연관된 연산자의 고유값이

인 고유 벡터를 B=

라고 할 때, 이 측정의 결과로 B=

를 얻을 확률은

B=

의 제곱이며(실험과의 관계), (E) 측정은 원칙적으로 언제나 반복될 수 있는 까닭에, 측정하기 직전에 계 S의 상태 벡터가 무엇이었는지에 관계없이 관측 가능량 O에 대한 측정 결과(O=

)에 따라서, S의 상태 벡터는 O의 고유 벡터이고 그 고유값은

이어야만 한다(무너짐). 이상의 다섯 가지 알고리듬들이 양자역학의 형식체계가 경험 및 실험과 관계 맺는 데 있어 적용되는 원리들이며, 이것들이 왜, 어떻게 우리의 경험과 맞아떨어지며 우리가 어떻게 이같은 원리들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남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