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반프라센, [과학적 실재론 옹호 논변들에 대한 반박] 요약 정리

강형구 2016. 7. 27. 06:55

 

 

1. 과학적 실재론과 구성적 경험론

  

1.1. 과학적 실재론이란 : 논의를 위한 개념 정의

  

소박한(naive) 정의 :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세계상(또는 세계에 대한 그림)은 참되고, 세부사항에 있어서 믿을만 하며, 과학에서 가정된 존재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과학의 진보는 발견이지 발명이 아니다.

소박한 정의의 이점 : 과학이론이 무엇인가? 과학이론은 무엇을 하는가? 라는 두 가지 질문에 답을 준다. 과학이론은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과학활동은 발명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발견하는 작업이다.

  

셀라즈(Sellars)의 정의 : 한 이론을 수용할 좋은 이유가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그 이론에서 가정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할 좋은 이유가 된다.

  

엘리스(Ellis)의 정의 : 내가 이해하기에 과학적 실재론이란 과학의 이론적 진술들은 실재에 대한 참되고 일반화된 기술이거나 그렇게 의도된 것이라는 견해이다.

  

퍼트남(Putnam)의 정의 : (주어진 이론이나 담론에 대하여) (1) 그 이론의 문장들은 참이거나 거짓이고 (2) 그것을 참/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의 어떤 것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외적인 것이란 (일반적으로는)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우리의 감각자료도 아니고, 우리 마음의 구조나 우리의 언어 등도 아니다.

  

   성숙한 과학이론의 용어는 전형적으로 지시한다는 것, 성숙한 과학에서 수용된 이론은 전형적으로 근사적 참이라는 것, 동일한 용어는 이론이 바뀐 경우에도 동일한 것을 지시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진술들은, 과학 및 과학이 대상과 맺는 관계에 대한 적합한 과학적 기술이라면 포함해야 할 부분들로서,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수용하는 견해이다.

  

반 프라센의 정의 : 과학은 이론을 통해 세계가 무엇과 같은지에 대해 문자 그대로 참인(literally true)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과학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포함한다.

 

1.2. 실재론의 대안들 : 반실재론의 기본 얼개

  

반실재론이란? 문자 그대로 참된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고서도 과학의 목표가 마련될 수 있고, 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보다는 약한(혹은 그 믿음과는 다른)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는 입장. 반실재론자는 이론을 보여주고(display), 그것이 어떤 미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반실재론자는 다음의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과학이 (문자 그대로가 아닌 방식으로) 적절히 해석되면 참이거나 참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하는 반실재론자.

  

둘째, 과학의 언어는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좋은 이론이 되기 위해 참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반실재론자. 반프라센은 둘째 입장을 취한다.

  

과학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배제하기로 한 결정은 실증주의와 도구주의로 알려진 반실재론의 형태를 배제한다. 이 결정에 따르면, 첫째, 문자적 해석 하에서 분명한 과학적 진술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진술이다. 둘째, 문자적 해석을 다듬을 수는 있지만 논리적 관계를 바꿀 수는 없다.

 

1.3. 구성적 경험론 : 이론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되 참임을 수용하지는 않는 입장

  

과학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 : 이론을 은유나 직유로 해석하는 것이나 이론은 탈신화화되거나 논리적 형식을 보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번역을 거친 이후에야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한다. 이 입장이 모두 실재론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입장은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인식적 태도나 우리가 이론을 구성할 때 추구하는 목표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한 이론이 말하는 바(what a theory says)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과학의 언어는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결정한 이후라도, 여전히 우리는 좋은 이론이 참이라고 믿을 필요도 없고 사실상(ipso facto) 그 이론이 가정한 존재자가 실재한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구성적 경험론의 정의 : 과학은 경험적으로 적합한(empirically adaquate) 이론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한 이론의 수용은 오직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만을 포함한다. 한 이론이 이 세계 속에서 관찰가능한 사물과 사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참일 때(, 그것이 현상을 구제할 때), 바로 그 때 그 이론은 경험적으로 적합하다.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은 모든 실제적 현상이 꼭 들어맞는 적어도 하나의 모형을 갖는다.

  

이념적 결정과 참의 분리 : 이론의 수용은 그 이론의 개념적 밑천들을 통해 미래의 현상들과 대면하겠다는 결정(commitment, 결의 혹은 선택)을 포함한다. 이념적 결정은 참이나 거짓이 아니다. 이념적 결정은 이론 수용의 화용론적 차원에 해당한다. 실재론자와 반실재론자는 이론 수용의 화용론적 측면에서 전형적으로 불일치한다(예를 들어 설명의 요구문제).

 

2. 이론과 관찰의 이분법’ : ‘이분법논박에 근거한 실재론 논변과 이에 대한 비판

  

2.1. 맥스웰(Grover Maxwell)의 논변 : ‘이분법을 논박함과 동시에 실재론 옹호

  

이분법 논의의 두 가지 문제 : 첫째, 우리의 언어를 이론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가? 둘째, 우리는 대상과 사건을 관찰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문제 1에 대한 맥스웰의 답 : 아니. 우리의 모든 언어는 속속들이 이론에 감염되어 있다.

  

문제 2에 대한 맥스웰의 답 : 아니. ‘직접 관찰추론사이에 놓인 상황의 연속성을 고려하자. 어떤 것을 보는 경우, 진공-창유리-안경-쌍안경-저해상도의 현미경-고해상도의 현미경 등의 과정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이 때 어떤 것을 직접 관찰이라고 하고 어떤 것을 추론이라고 할 것인가? 그 구분이 모호하다!

둘째, 만약 관찰가능한 것은 관찰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분법이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원리적 관찰불가능성의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이 개념은 그 존재자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관찰될 수 없다는 것을 유관한 과학이론이 함축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감각기관(, 전자현미경 눈)을 갖는 상이한 환경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2. 맥스웰 논변에 대한 반 프라센의 논박 : 문제 2에 대한 맥스웰의 답에 대한 비판

  

관찰가능이 모호한 술어라도 명백한 사례와 명백한 반례가 존재하면 사용할 수 있다.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보는 것은 관찰의 명백한 사례이나, 안개상자 속의 미시입자를 보는 것은 관찰의 명백한 반례이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어떤 종류의 측정 장치이다. 그래서 특정한 선천적 한계를 지닌다. 바로 이런 제한들이 관찰가능에서 가능이 지시하는 바이다. 맥스웰은 특정한 지점에 그어진 관찰적-이론적의 구분선은 우연적인 것이며 우리가 가진 생리적 구조의 함수이고, 그러므로 거기에는 어떤 존재론적 의미도 없다고 결론내리지만, 과학적 실재론의 논의에서 우리의 생리적 구조는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다. 관찰가능성이 존재와는 무관하더라도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인식적 태도와는 여전히 많은 관련을 가질 수 있다.

 

3.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 보편적인 귀추법이 실재론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는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란? 우리에게 증거 E가 주어져 있고, 대안적 가설들 HH'을 고려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만일 HH'보다 E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인 바로 그 경우에 우리는 H'이 아닌 H를 추론해야 한다.

  

귀추법의 추론 규칙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 이 추론 규칙이 허용하는 모든 결론을 기꺼이 믿어야 하고, 허용하는 것과 상충하는 결론을 명확히 꺼리면서 믿지 않아야 한다.

  

반론 1 : 그러나 우리가 귀추법의 추론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일종의 심리학적 가설이며, 이는 경험적인 가설로서 자료와 맞추어 봐야 하고 경쟁가설들과도 대결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증거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기꺼이 믿는다라는 가설은 이에 대한 경쟁가설이며, 경험 자료들에 비추어보아도 귀추법에 대한 가설에 뒤지지 않는다.

  

반론 2 : 최선 설명으로의 추론 규칙이 옳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실재론 옹호 논변에는 추가 전제가 필요하다. 이 규칙이 우리 모두를 실재론자로 만들려면, 실재론자는 자연의 모든 보편적 규칙성이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특별한 추가 전제를 가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4. 설명의 요구의 제한 : 실재론자와 달리 설명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스마트의 실재론 논변 : 경험적으로는 거의 동등하다고 할 수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가설과 코페르니쿠스 가설이 있다. 이 경우, 우리가 코페르니쿠스 가설에 대해서는 실재론자의 입장을 가지는 경우에만 프톨레마이오스 가설의 도구적 유용성을 설명할 수 있다. , 한 이론의 도구적 유용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실재론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직접적으로 미시구조를 가정하고 거시구조는 간접적으로만 가정하는 이론 T가 있다고 가정하자. 또한 T의 일부이고 T의 거시적 현상에 대해서만 말하는 이론 T'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때 T'의 성공은 T가 실재론적 참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는 경우 우연 혹은 기적이 되어 버린다.

  

스마트 논변에 대한 비판 : 만약 T'의 성공을 우연 혹은 기적이라고 믿는 이유가 T'이 규칙성을 가정할 뿐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가정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는 T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TT'을 설명한다 할지라도 T를 설명하는 또 다른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설명의 요구는 부적절하다.

 

5. 공통원인의 원리

  

   요점 : 라이헨바흐가 자신의 실재론적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제시하는 공통원인의 원리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 특히 양자역학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강한 원리이다. 이 원리는 세계에 대한 결정론적 입장과 상당히 유사하며, 그런 의미에서 양자현상에 대한 숨은 변수 이론과 통한다.

 

6. 설명의 제한 : 셀라즈의 사고 실험에 대한 비판

  

셀라즈의 사고 실험 : 화학의 초기 단계에서, 관찰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서로 상이한 황금 시료들이, 왕수에서 상이한 비율로 용해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 때 화학자들은 상이한 황금 시료들에 대해 서로 다른 미시구조를 가정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응했다. 이 경우를 보면 과학은 설명을 목표로 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해야 하며, 따라서 관찰불가능한 미시구조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함을 알 수 있다.

  

셀라즈 논변에 대한 비판 : 첫째, 만약 사고실험에서의 화학자들이 미시구조를 가정했다면 그네들은 관찰가능한 새로운 규칙성 역시도 가정했을 것이다. 따라서 완전히 관찰불가능한 물리적 변수를 도입했다는 셀라즈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둘째, 설명을 목표로 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셀라즈의 주장은 양자역학을 생각할 경우 보편적 타당성을 잃는다. 양자역학에서의 실재론적 입장인 숨은 변수 이론이 실패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셋째, 굳이 설명의 요구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구성적 경험론의 입장과 부합하는 이전 것을 수정하고 관찰가능한 규칙성에 대한 새로운 진술을 제안할 수 있는 가상적 그림에 대한 요구를 도입하더라도 사고 실험에서의 화학자들의 행동을 잘 설명할 수 있다.

 

7. 악마와 궁극 논변 : 설명에의 요구에 대해 과학 활동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으로 대응

  

원자론에 대한 러더퍼드와 파이잉어의 입장 : 러더퍼드는 전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파이잉어의 경우, 전자는 존재하지 않지만 전자를 포함한 원자 이론이 그려내는 관찰가능한 세계는 마치 그 이론이 참인 것 같은 세계와 경험적으로 정확히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입장에 대한 퍼트남의 해석 : 합리성의 요구에 의해, 두 가설의 모든 시험가능한 귀결이 같다면, 선험적으로 덜 그럴듯한 것을 수용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악마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실제로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파이잉어의 견해보다는 러더퍼드의 견해를 수용해야 한다.

  

퍼트남 해석에 대한 비판 : 파이잉어의 견해는 논리적으로 더 약하다는 점에서 러더퍼드의 견해와 다를 뿐이다. 파이잉어의 견해는 러더퍼드의 것보다 선험적으로 덜 그럴듯할 수 없다.

  

실재론의 궁극 논변 : 실재론은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철학이다. 성숙한 과학이론의 용어는 전형적으로 지시한다는 것, 성숙한 과학에서 수용된 이론은 전형적으로 근사적 참이라는 것, 동일한 용어는 이론이 바뀐 경우에도 동일한 것을 지시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진술들은, 과학 및 과학이 대상과 맺는 관계에 대한 적합한 과학적 기술이라면 포함해야 할 부분들로서,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수용하는 견해이다.

  

궁극 논변에 대한 비판 : 과학이란 생물학적 현상이며, 한 부류의 유기체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촉진하기 위해 수행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실재론과 대비되는) 매우 다른 종류의 설명이 요구된다. 현존하는 과학이론의 성공은 기적이 아니다. 과학적인 (다윈주의적) 지성에게 그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과학이론이든 간에 무시무시한 경쟁의 삶 속으로, 즉 냉엄한 정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직 성공적인 이론만이, 사실상 자연의 실제적 규칙성을 파악한 이론만이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