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최소주의에서의 의미론, 화용론, 형이상학

강형구 2016. 7. 25. 06:56

 

 

최소주의에서의 의미론, 화용론, 형이상학

 

1. 여는 말 : 언어철학의 삼중주- 의미론, 화용론, 형이상학

 

   언어는 세계에 대한 창이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창이기도 하다. 세계에 대한 창으로서의 언어는 주로 수학과 물리학, 즉 자연과학에서 주로 사용되며, 이러한 언어를 우리는 이른바 형식언어라고 부른다. “같은 것에 같은 것을 더하면 서로 같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상호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 “정지 질량이

인 물체는

의 에너지를 가진다등의 문장들은, 비록 인간이 가진 언어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하더라도,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 일반(수 및 물리적 대상)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진술들의 참과 거짓은 인간과 무관하게 객관적인 성질을 갖지 않겠는가? 만약 우리가 기초적인 논리학을 토대로 이러한 진술들을 재구성할 수 있다면, 형식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모든 복잡한 진술들의 참과 거짓을 그 부분 진술들의 참과 거짓의 조합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 적어도 수, 물리적 대상 등 객관적 사물들로 구성되는 사태의 참과 거짓은 정확하게 따질 수 있지 않겠는가?

  

   ‘형식언어의 논리화및 이를 통한 객관적 사태의 정당화라는 위와 같은 야심찬 기획은 수학과 자연과학 모두에서 무너진 듯하다. 수학에서는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이 제기된 이후 힐베르트(Hilbert)가 형식주의 프로그램을 추진함으로써 수학의 객관적 토대를 구축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물리학에서는 논리경험주의자들(Logical Empiricists)이 가장 기초적인 관찰 진술들 및 귀납의 원리를 토대로 물리 이론 전체의 타당성을 보장하려고 시도했지만, 물리학적 지식에 대한 귀납적 정당화의 한계가 밝혀지고 1960년대 이후 등장한 과학철학의 역사적 전회를 통해 관찰의 이론 적재성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이러한 시도 또한 그다지 가망이 없음이 대부분의 과학철학자들로부터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자연언어는 어떠한가? 인간의 자연언어는 어떤 종류의 사태를 표현하며, 그러한 사태를 객관화시키고 형식화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형식언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유사하게 자연언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 또한, 이러한 철학적 탐구를 통해 자연언어와 관계된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인간의 의지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수에 대한 사고 및 물리적 세계에 대한 사고가 수리철학과 물리철학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듯, 자연언어를 통한 생각의사소통세계와의 상호작용은 언어철학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과연 자연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다채로운 현상들에 대한 철학적인 작업이 가능할 것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러한 철학적 작업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형식언어에서 등장하는 표현들과 진술들의 뜻과 지시체의 경우 상대적으로 객관화가 용이한 반면, 자연언어적 표현들 및 진술들의 뜻과 지시체는 그것들이 제시되는 다양한 맥락에 민감하게 의존하기 때문에 완벽한 객관화와 형식화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1970년대까지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만약 자연언어가 형식화될 수 없다면, 자연언어의 조합성(compositionality)을 함수 개념을 적용해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현상을 이론화하는 것, 현상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 지성이 보여주는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자연언어 현상에서 등장하는 많은 언어적 표현들은, 형식언어와는 달리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만으로는 그 자체로 관련되는 언어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이른바 일상언어학파에 속한 철학자들을 통해 표명되었다. 자연언어적 현상에 대한 완전한 이론은 의미론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의미론과는 독립된 화용론이라는 별도의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예를 들어 황소가 달려오고 있다라는 표현은 진위문이기도 하지만, 맥락에 따라서는 수행문(경고의 의도를 띤)일 수 있으므로 단순히 이 표현의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으로는 이 표현이 등장한 언어적 현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자연언어를 통해 표상되는 사태의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으로는 자연언어적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1970년까지의 견해였다고 볼 수 있다.

  

   자연언어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을 변화시킨 최초의 언어철학자는 데이빗슨(Davidson)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문참과 의미(Truth and Meaning)에서, 자연에 대한 일반 의미론은 의미의 진리조건을 회귀적으로 산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진리조건 의미론). 타르스키의 제자 리처드 몬태규(Richard Montague)의 경우, 논문일상언어를 양화하는 적절한 방법에 대하여(On the proper treatment of quantification in ordinary language)에서, 자연언어에서의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의 진리조건이며, 문장의 진리조건은 가능세계로부터 진리치로의 함수라는 가능세계 의미론을 주장했다. 자연언어를 형식화하려는 이러한 철학적 작업은 카플란(Kaplan)과 그라이스(Grice)에 이르러 그 정점에 이른다. 카플란에 의하면 자연언어에서의 의미는 특성(character)과 내용(content)으로 구분된다. 맥락에 민감하게 의존한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지표사(indexical)가 포함된 발화의 의미는 그 발화의 특성(character)과 내용(content)의 함수이며, 따라서 지표사가 포함된 자연언어에 대해서도 형식 의미론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보인 것이 카플란의 주된 공헌이었다. 그라이스는 자연언어와 형식언어에서의 진리조건이 본질적으로 같으며, 다만 자연언어와 형식언어가 보이는 차이가 이른바 함축(implication)’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자신의 함축 이론을 발전시켰다.

  

   자연언어적 표현, 진술, 문장의 객관적인 진리조건은 의미론이 다루고, 의미론이 다룰 수 없는 자연언어적 현상의 부수적 특성들을 화용론이 다룬다는 이분법적 구도는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구도는 화용론에게는 불리한 구도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진리조건을 따짐으로써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세계 속의 어떤 사태를 표명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언어의 객관적 진리조건이 근본적으로 화용론적 상황 혹은 화용론적 요소와 무관하게 구분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화용론적 상황 혹은 화용론적 요소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지표사 및 자연언어적 표현의 함축 또한 의미론적 구도 속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해명될 수 있다면, 언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철학적 통찰을 얻고자 하는 언어철학적 작업 속에서 화용론이 차지하는 입지는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상을 통해 현상 그 너머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 현상을 통해 그 현상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철학적 탐구의 근본적인 동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언어철학 또한 현상을 넘어서는 학문이라는 뜻의 형이상학(形以上學, metaphysics)’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은 언어철학을 양분하는 의미론과 화용론 중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아마도 형이상학은 진리조건이라는 진지한 개념을 독차지하고 있는 의미론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철학에서 진리조건이 중심적인 개념이라면, 자연언어적 현상이 보여주는 기타 화용론적 효과들은 이러한 진리조건에 대한 부수적이고 우발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언어에서의 진리조건에 대한 객관적인 형식 의미론을 구축할 수 있다. 이 때 형이상학은 화용론이 아닌 의미론의 곁에 있다.

 

  

2. 맥락주의의 도전 : 의미론적 진리조건은 화용론적 요소들에 종속되는가?

 

   과연 진리조건은 의미론적 논의만으로 그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자연언어적 현상에서의 화용론적 요소들은 자연언어적 표현이 갖는 진리조건에 대한 부수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가? 과연 화용론적 요소들은 카플란이 얘기하는 것처럼 특성에서 내용으로의 함수로 해석될 수 있는가? 혹은, 그라이스가 얘기하는 것처럼 객관적인 진리조건을 갖는 말해진 것에서부터 함축된 것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도구인가? 이러한 기존까지의 견해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바로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한 맥락주의자들이다. 맥락주의자들에 의하면 단순히 의미론만으로는 자연언어적 표현의 진리조건을 결정할 수 없다. 진리조건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용론적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화용론적 요소들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지만 자연언어적 표현의 진리조건이 결정된다. 자연언어에 대한 엄격한 형식 의미론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의미론은 화용론에 종속되며 언어에 대한 형이상학은 의미론이 아닌 화용론을 통해 가능하다.

  

   맥락주의자의 대표자인 프랑수아 르카나티(François Recanati)2004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인문자 그대로의 의미(Literal Meaning)에서 맥락주의의 주요 논제들 및 이에 대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 문장이 발화되었을 때 그것을 문장의 의미말해진 것이라는 두 요소로 나눌 수 있다고 하자. 이 때 문장의 의미는 이른바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고 할 수 있지만, 과연 말해진 것의 의미또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한 아이가 놀다가 넘어져서 손에 작은 상처가 났다고 하자. 그 상처로 인해 아이의 손에서는 약간의 피가 났고, 피를 보고 놀란 아이는 숨이 끊어져라 울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 아이의 어머니가 너는 죽지 않을거야라고 발화했다면 이 발화를 통해 말해진 것은 과연 무엇일까? 스탠리(Stanley)로 대표되는 지표주의자들처럼, ‘말해진 것은 다만 이 문장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충족되지 않는 최소한의 의미가 언어적인 요소를 근거로 촉발되는 것일까? 아니면 말해진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화용론적 과정이 개입해야만 하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위의 발화가 제기된 상황 속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너는 죽지 않을거야라는 발화 그 자체의 문장의 의미혹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함축된 것으로 순차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그 발화 상황에 걸맞게 무의식적으로 그 발화의 말해진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과정은 단순히 언어적인 요소에 의해 촉발되는 언어적 과정이 아니다. 르카나티는 이 과정을 일차적인 화용론적 과정(primary pragmatic process)’이라고 일컫는다. 이 과정에는 순수하게 언어적인 요소(지표사)로 인해 화용론적 요소를 개입시키는 포화(saturation)’의 과정이 포함되지만, 문제는 이러한 일차적인 화용론적 과정 속에 포화 이외에도 풍부화(enrichment), 이완(loosening), 의미론적 전이(semantic transfer) 등 어쩔 수 없는 과정과는 구분되는 선택적과정들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르카나티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띤 말해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해진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차적인 화용론적 과정이 요구되며, 이는 말해진 것으로부터 확인될 수 있는 자연언어의 진리조건이 전적으로 의미론 내에서만 결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자연언어의 진리조건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용론적 고려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르카나티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원리가 바로 이용가능성 원리(availability principle)’이다. 이 원리에 의하면 자연언어에서의 화자와 청자가 해당 언어적 표현이 나타내는 진리조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조건을 의식적으로알 수 있어야 한다. 르카나티는 이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의미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최소한의 의미론적 명제에서부터 말해진 것으로 이행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차단한다. 따라서 르카나티의 시각에서는 말해진 것의 최소적인 의미를 주장하는 캐펠렌과 르포의 의미론적 최소주의의 입장 또한 유지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자연언어에서 표현된 문장의 진리조건은 직관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르카나티의 이용가능성 원리는 이러한 우리의 직관과 상치하지 않는 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만약 르카나티가 말하는 이용가능성 원리에 문제가 있다면, 이 문제는 현재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리조건개념에도 적용된다. 과연 자연언어적 표현의 진리조건을 판단함에 있어서 기존의 직관적 기준을 사용해도 될 것인가? 만약 이 기준에 문제가 있다면, 이후 우리는 발화를 통해 표현된 명제에 어떤 진리조건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진리조건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르카나티의 논의로부터 따라 나오는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이 있다. 만약 르카나티가 말하는 것처럼 말해진 것의 의미가 일차적인 화용론적인 과정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과정의 본성을 어떻게 규명할 수 있는가? 만약 그 과정에 대해서 명쾌하게 이론적으로 규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언어철학이라는 이론적 작업이 해야만 하는 명료화 작업을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개인의 잠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차적인 화용론적 과정의 본성을 우리는 어떤 방식과 근거를 통해 규명할 수 있는가? 르카나티는 잠정적으로 정상적인 해석자(normal interpreter)’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 정상적인 해석자는 정상적으로 일차적인 화용론적 과정을 수행할 수 있고, 그 해석자가 사후적으로 반추해서 해당 표현에 대한 직관적인 판정을 하는 경우, 그 과정이 어떤 종류의 과정이었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정상적인 해석자의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또 정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르카나티는 명쾌한 철학적 분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만약 이 분석이 순수하게 언어철학적 논의 내에서만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이 분석을 이루기 위해서 인지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기타 분야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언어적 현상의 본질을 언어 그 자체를 통해서 탐구하려는 언어철학의 본질적인 특성을 상당 부분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르카나티가 자신의 전 저서에 걸쳐서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스탠리로 대표되는 지표주의의 입장이다. ‘지표주의의 경우 자연언어적 표현에 있어서의 진리조건이 화용론적 요소에 의해서 영향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진리조건의 맥락 의존적인 변화는 해당 표현의 언어적인 요소로 인해 촉발되며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언어적 요소를 추적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표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르카나티는 지표주의적 입장에 근거해서 추적된 진리조건이 원래 발화의 진리조건과 직관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대응한다. 진리조건을 언어적 측면에서 최대한 제한하려는 지표주의의 공격에 대한 르카나티의 대응에서도 주가 되는 것은 진리조건의 직관적인 측면이다. 과연 자연언어의 직관적 진리조건을 유지하면서도 진리조건에 대한 의미론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맥락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직관적인 진리조건이 변화하는 진술들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직관적 진리조건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언어철학에서의 의미론의 우위를 유지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위와 같은 맥락주의자들의 입장을 받아들일 경우, 적어도 진리조건을 결정함에 있어 의미론은 화용론에 종속되어야 함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의미론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진리조건에 있어 의미론에 대한 화용론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 둘째, 지표주의자들의 입장처럼, 여전히 진리조건을 결정하는 데 있어 의미론의 우위를 고집하는 것. 셋째, 기존에 생각되었던 진리조건 개념을 포기하는 동시에 의미론과 화용론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시키는 것. 이러한 세 가지 선택지 중에 세 번째 선택지를 택한 언어철학자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최소주의자(minimalists)’들이다.

 

  

3. 의미론에 대한 최소주의적 구제 : 의미론적 진리조건의 최소화, 혹은 형이상학과의 분리

 

   맥락주의에 대한 반대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캐펠렌과 르포의맥락에 무관한 의미론 : 의미론적 최소주의와 언화행위 다원주의에 대한 옹호(A Defense of Semantic Minimalism and Speech Act Pluralism)는 출판된 이후 동시대 많은 언어철학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온건한 맥락주의에서 급진적 맥락주의로에서 저자들은 온건한 맥락주의자의 입장이 어떤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급진적 맥락주의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특정한 발화가 제시된 맥락이 변경될 경우 그 발화의 진리조건 또한 변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논증을 맥락변경논증(Context Shifting Argument)’이라고 하자. 만약 온건한 맥락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맥락변경논증을 사용한다면, 이 논증은 어떤 임의의 문장에 대해서도 적용이 가능하므로, 결과적으로 온건한 맥락주의는 단지 상상력이 부족한 급진적 맥락주의의 입장에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이렇듯 온건한 맥락주의가 급진적 맥락주의로 간주될 수 있음을 보인 후, 저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맥락변경논증이 잘못 쓰였는지를 보인다. 캐펠렌과 르포에 의하면, 맥락변경논증을 사용하는 논자들은 의미론적 내용에 대한 이론이라면, 대화자들이 언화행위 내용에 대해 갖는 모든 혹은 대부분의 직관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잘못된 가정(Mistaken Assumption)’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잘못된 가정은 예화에 의해 촉발된 직관들이 의미론적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할 근거를 제공하므로, 이를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급진적 맥락주의를 받아들이는 결과가 초래된다. 따라서 캐펠렌과 르포는 이 가정을 과감하게 포기하고자 한다. , 의미론은 언화행위 내용에 대해 우리가 갖는 모든 직관들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급진적 맥락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 책의 제 2급진적 맥락주의에 대한 논박에서는 세 가지 근거를 토대로 맥락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첫째, 저자들은 자신들이 고안한 세 가지 종류의 맥락민감성 시험을 토대로 기존에 맥락적으로 민감하다고 알려진 표현들을 시험한다. 첫 번째 시험은 간-맥락적 인용부호제거 간접 보고(Inter-Contextual Disquotational Indirect Reports) 시험이다. 특정한 맥락에서 화자 S에 의해 발화된 u가 있다고 하자. 이 맥락과 유관하지 않은 다른 맥락에서 ‘Su라고 말했다라는 문장이 발화되었을 경우, 이 발화가 의미 있게 성립하는 맥락이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면 발화 u에 포함되어 있는 (맥락 민감성 여부가 의심되는) 표현은 맥락 민감적이지 않다. 두 번째 시험은 집합적 기술(Collective Description) 시험이다. 이 시험에 따르면, 만약 ‘Av이다’, ‘Bv이다가 각각 참인 맥락이 있을 경우 ‘ABv이다가 참인 맥락이 있다면 동사구 v는 맥락 민감적인 표현이 아니다. 세 번째 시험은 간-맥락적 인용부호제거(Inter-Contextual Disquotational) 및 참된 맥락변경논증(Real Context Shifting Argument) 허용여부 시험이다. 만약 비록 S라 하더라도 ‘S이다라는 발화가 거짓인 경우가 있다가 참인 맥락이 있다면, S에 포함된 표현은 맥락 민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해당 표현을 말하기의 맥락, 대상 맥락에 모두 포함하는 참된 맥락변경논증 시험 또한 통과하게 된다.

  

   맥락주의자들이 맥락 민감적이라고 주장했던 다수의 표현들은 저자들이 제시한 위와 같은 세 가지 시험들을 통과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들은 실제로는 맥락 민감적이지 않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급진적 맥락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이어서 저자들은 급진적 맥락주의의 결론을 받아들이면 언어를 통한 상호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며, 더 나아가 급진적 맥락주의는 내적으로도 일관되지 못하므로 (맥락주의에 따르면 맥락주의에서 제시하는 주장 그 자체 또한 맥락 의존적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맥락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의 3부에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의미론적 최소주의언화행위 다원주의의 의미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들이 언어를 매개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아주 빠른 속도로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언어를 통해 공유되는 최소한의 명제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저자들이 앞서 제시한 세 가지 시험을 통과하는 표현들만 맥락 민감적이며, 그 이외의 표현들은 맥락 민감적이지 않다. 캐펠렌과 르포에 의하면, ‘이 사과는 붉다라는 표현은 이 사과가 붉은 경우 오직 그 때에만 참이다. 더 이상 이 표현에 대한 진리조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없다. 물론 이 사과는 붉다라는 표현은 그 표현이 제시되는 맥락에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참인 것이 어떤 경우에는 거짓일 수 있지만, 우리는 이 표현에 대한 최소한의 명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러한 공유가 없다면 자연언어를 통한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맥락주의의 입장을 취할 수 없는 경우 결국 의미론적 최소주의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저자들에 따르면 의미론적 최소주의에는 7가지의 설명적 힘이 있다. 오직 의미론적 최소주의를 통해서만 매우 제한된 맥락 민감적 표현들의 집합을 인식할 수 있고,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 속에서도 간-맥락적 인용부호제거 간접보고가 왜 성립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으며, 똑같은 내용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맥락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오직 의미론적 최소주의를 통해서만 언화행위 내용과 의미론적 내용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으며, 화자가 말한 것은 화자가 말한 것에 대해 보고하는 보고자의 맥락에 의해서 결정됨을 보여줄 수 있으며(말해진 것에 대한 외재적 관점), 의미론과 형이상학 사이의 적절한 관계 설정을 할 수 있고, 심리학적으로 실재적인 의미론적 내용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 11장에서는 의미론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한 저자들의 핵심적인 주장이 제시된다. ‘A가 붉다A가 붉다는 명제를 표현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비가 온다는 비가 온다는 명제를 표현할 뿐이다. 의미론은 위와 같은 표현들에 대해 이 이상의 무엇인가를 말할 수도 없고, 말할 필요도 없다. 만약 이 이상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는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의미론이 아닌 형이상학이다. 의미론적 최소주의가 표방하는 최소 명제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은, 형이상학자들이 할 일이지 의미론자들이 할 일은 아니다. 저자들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른바 일반화 논증(General Strategy)을 제시한다. “붉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과연 붉은 것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간주할 수 있다. , 형이상학적 탐구는 이러한 공통점에 대한 질문(CQ)에 답변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저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붉음이라는 표현에 대해 CQ라는 형이상학적 문제가 제기된다고 가정할 때, ‘안쪽이 붉음’, ‘물 속에서 붉음등과 같은 표현들에도 마찬가지로 CQ라는 형이상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붉음이 가진 공통적인 특성들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붉음과 관계된 무한히 많은 사례들(사방이 붉게 색칠된 방에서의 붉음’, 빛이 하나도 없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의 붉음등등)이 가진 공통적인 특성들을 탐구해야 하는 것처럼, “‘안쪽이 붉음이 가진 공통적인 특성들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려 할 경우 안쪽이 붉음과 관계된 무한히 많은 사례들(안쪽이 붉은 사과’, 안쪽이 붉은 사람’, 안쪽이 붉은 가스등등)을 탐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붉음과 관련된 표현이 아무리 세분화된다고 해도 그 표현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질문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결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허무주의(Nihilism)에 빠져들게 되는 것 아닌가?

  

   캐펠렌과 르포에 의하면 우리는 이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건전한 상식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허무주의에 대한 좋은 논증은 존재하지 않으며, 형이상학적 허무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언어철학과 자연과학 모두 성립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4. 구제 이후 : 무엇이 남았으며 무엇을 잃었는가?

 

   캐펠렌과 르포는 최소주의가 갖는 설명적인 힘에 호소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언어철학이란 기존에 잘 알려져 있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언어적 현상을 잘 설명하는 역할을 탐구 활동인가? 철학이란 상식에 호소하는 활동이 아니라, 상식을 교정시키는 규범적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활동이 아니던가? 하지만 현대의 언어철학자들이 극복해야 하는 상황은 아주 까다로워 보인다. 자연언어적 표현들의 경우 그 표현들이 제시되는 맥락에 민감하게 영향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러한 영향을 우리의 의식적인 직관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면, 과연 말해진 것이 형성되는 과정을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 르카나티가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의 잠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으로 설명할 것인가? 만약 의미의 조정(modulation)이 화용론적 과정임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그 조정 과정 속에서 기존의 의미론적 의미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만약 맥락주의가 제시하는 의미론적 포텐셜의 개념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다수의 사용들을 통해 축적된 역사적생물학적인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러한 설명 속에서 언어 고유의 의미가 자리할 수 있는 위치는 어디인가?

  

   캐펠렌과 르포로 대변되는 최소주의자들은 맥락주의의 결론으로부터 도출되는 위와 같은 질문들을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의미론을 구제하기 위해서, 기존까지 의미론에서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진리조건의 개념을 의미론과 분리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와 동시에 진리조건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의미론이 아닌 형이상학이 해야 할 일이 되고, 형이상학은 의미론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은 의미론이 아니라 화용론이 다루어야 하는 대상이 되는가? 최소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적인 의무를 화용론이 수행하는 것을 인정하는가? 캐펠렌과 르포는 12의미론과 심리학에서, 의미론적 최소 명제는 심리학적으로 실재하며 이러한 심리학적 실재에 대한 탐구는 화용론이 아닌 심리학의 임무임을 주장한다. 인간들이 어떤 인지적 상태를 유지하면서 의사소통하는지, 이러한 의사소통에 있어 최소 명제가 담당하는 인지적 기능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탐구해야 하는 것은 의미론도, 화용론도 아닌 심리학이다. 이러한 최소주의자들의 구획 속에서 형이상학은 그 길을 잃는다. 이전까지 진리조건과 함께 의미론 안에 있던 형이상학은, 진리조건에 대한 탐구가 심리학이라는 개별 과학으로 떠넘겨지면서 언어철학 속에서 자리할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만약 최소주의자들의 이러한 구도를 받아들인다면, 의미론과 화용론은 엄격하게 구분되고, 의미론이 언어를 통해 다룰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제한된다. ‘나는 학교에 간다라는 표현이 오직 나는 학교에 간다는 명제를 나타낼 뿐이고, ‘나는 세계의 구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라는 표현이 오직 나는 세계의 구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라는 명제를 나타낼 뿐이라면, 의미론자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것 뿐이라면, 대체 의미론을 통해 우리는 언어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더 배울 수 있겠는가? 또한 이러한 경우 우리가 의미론자를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의미론에 대한 최소주의적 구제 이후, 비록 의미론이 그 독자적 영역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게 남은 것은 왜소함과 초라함 뿐인 듯 하다. 만약 최소주의자들이 언어를 매개로 한 원활한 의사소통을 일종의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직관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왜 그들은 기존의 직관적 진리조건이 발화의 맥락에 따라 변화된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만약 맥락주의자들의 맥락변경논증에 문제가 있다면, 그 논증이 적용되는 범위와 위력을 제한함으로써 의미론직관적 진리조건의 공생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캐펠렌과 르포는 자신들의 언화행위 다원주의(Speech Act Pluralism, SPAP)’를 어떤 방식으로 정의하는가? 그들에 의하면 언화행위 다원주의는 이론이 아닌 관찰들의 집합일 뿐이다. 우리는 언화행위 내용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을 수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언화행위 내용에 있어 우리에게 숨겨진 것은 없다(Nothing is Hidden)’. 우리가 어떤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듣는 경우, 화자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듣는 바로 그 내용이다. 그러한 당연한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더 이상의 이론적 탐구를 할 수 없으며 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저자들의 이론적 태도는, 의미론과 화용론 모두에서 언어철학자들의 작업을 단순히 자연언어적 현상을 잘 기술하는 데그치게끔 한다. 실제의 자연언어적 현상은 언어철학자의 분석적 탐구 능력을 초과하기 때문에, 언어철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현상을 가장 그럴듯하고 정교하게 드러내는 기술적 이론(descriptive theory)’을 발전시키는 것이 된다. 카플란과 그라이스의 작업을 통해 의미론의 주도 하에 의미론과 화용론이 밀접하게 결속하는 듯 보였다면, 캐펠렌과 르포의 최소주의에 이르러 의미론은 그 최소한의 이론적 영역으로, 화용론은 아예 이론화 작업이 포섭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이전한 듯 보인다.

  

   의미론의 독자적 영역을 보장하려는 시도에 대한 최소주의자들의 대의에 대해 일부 언어철학자들이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이 의미론화용론형이상학 제각각의 분명한 구분과 분리를 주장하는 최소주의자들의 입장에 반대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굳이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면서까지 의미론의 독자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의미론과 화용론이 서로 어떻게 관계맺는지에 대해서, 더 나아가 그 둘이 형이상학과 어떻게 관계맺는지에 대해서 더 탐구할 수 있고 더 탐구해야만 하는 것 아닌가? 만약 말해진 것에 대해서 의미론과 화용론이 대결하고 있다면(지표주의자 대 맥락주의자), 이러한 대결을 더 진전시킴으로써 이 두 입장을 더욱 더 정교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재 맥락주의의 입장에서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에 대한 잠정적인 설명 만을 제공할 수 있을 따름이라고 하더라도, 이 입장에서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을 더 명료하게 해서 의미론과의 명시적인 대결을 더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현재 지표주의의 입장에서 맥락 민감적인 표현들과 관련된 언어적 요소를 추적함에 있어 사후적인 방식으로 뒤쫓아가는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다 하더라도, 이 프로그램을 더욱 더 정교화시킨다면 언어와 맥락이 관계맺는 더 복잡한 양상을 밝힐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의미론적 내용에 대한 이론이라면, 대화자들이 언화행위 내용에 대해 갖는 모든 혹은 대부분의 직관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가정을 단순히 잘못된 가정으로 취급하고 과감하게 버리는최소주의자의 결단에는 문제가 있다. 그 가정이 현재의 논의 구도 아래에서 유지될 수 없다면 어떤 이유에서 유지될 수 없는지, 만약 그 가정에 대한 수정을 통해 직관적 진리조건의 개념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추가적으로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캐펠렌과 르포가 제시하는 일반화 논증에도 문제가 있다. 과연 붉음이라는 표현과 관련된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안쪽이 붉음이라는 표현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문제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단지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어떤 표현이 공통적으로 갖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데 국한되는 것인가? 이전까지 의미론과 형이상학은 어떻게 관계 맺어 왔으며, 의미론과 형이상학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 없이 의미론과 형이상학을 과격하게 분리시키는 것이 과연 문제에 대한 타당한 해결책인가?

  

   형이상학적 허무주의로까지 논의를 진전시키고, 형이상학적 허무주의를 철학적 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실천적인 근거에서 거부하는 캐펠렌과 르포의 논의는, 의미론과 화용론의 대결에 대한 완전한 해결이 아닌 임시방편적이고 미봉적인 해결에 불과하다.

 

  

5. 맺는 말 : 의미론에 대한 최소주의적 구제의 의의와 한계

 

   최소주의적 구제로 인해 의미론과 화용론 사이의 전쟁은 끝났는가? 이러한 구제로 인해 의미론과 화용론이 각자에게 합당한 자리를 찾고, 앞으로 각자 어떻게 이론적 탐구를 해야 할 지에 대한 방향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는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최소주의적 구제는 의미론자들과 화용론자들 모두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다. 만약 최소주의가 의미론과 화용론 사이의 전쟁을 종결시키려 했다면, 최소주의는 두 입장 모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전협정을 제시했다. 최소주의적인 정전협정은 의미론과 화용론이 나아갈 방향이 명쾌하게 제시하지도 않았다. 이 협정에 따른다면 의미론과 화용론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협소해지고, 이전까지 언어철학과 함께 결속되었던 형이상학을 외부로 분리시킴으로써 최소주의적 구제는 언어철학의 철학으로서의 본 기능을 상실하게끔 만들 것이다. 따라서 의미론과 화용론 사이의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만 하며,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최소주의적 논변에서 집중적으로 제기된 두 가지의 문제는 앞으로의 논의가 어떤 방향에 집중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중요한 시사를 주고 있다. 캐펠렌과 르포는 자신들의 책 제 1부에서 이른바 맥락변경논증이 아무런 제한없이 사용될 경우 어떤 극단적인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온건한 맥락주의이든 급진적 맥락주의이든, 맥락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사용하는 맥락변경논증의 타당성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아야 한다. 지표사가 포함된 표현 및 지표사가 아닌 표현 둘 다에 맥락변경논증이 적용될 수 있다 하더라도, 두 종류의 표현이 같은 종류로 맥락 민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맥락변경논증이 자연언어의 모든 표현들에 적용된다면, 그러한 논증을 통해 얻어진 결론은 보편적일 수 있겠으나 한갓 사소한(trivial) 것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맥락주의에서의 맥락변경논증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끔 만든 것, 그것이 최소주의적 주장에서 파생된 첫 번째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최소주의자들은 기존까지 의심할 여지 없이 받아들여졌던,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진리조건의 개념에 다시금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자연언어에서의 발화 u가 주어졌을 경우, 우리는 우리의 언어 능력, 인식 능력, 직관 등을 통해서 그 u에 대한 가능한 진리조건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조건들은 발화가 제시되는 배경 맥락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변경 가능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과는 붉다라는 표현은 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방이 온통 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는 방 안에서 사과는 붉다라는 표현은 거짓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가능한 상황을 고려한다고 해서 사과는 붉다라는 표현의 참된 정도가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이 온통 빨간색일 수 있는 확률은, 외부 세계에 대한 현재까지의 우리의 지식에 근거한다면 매우 희박하다. 만약 붉다라는 표현에 인위적인 성격이 포함된다면, ‘붉음을 표현하는 빛의 파장을 조사해서 이 개념을 전자기파의 파장 범위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표현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진리조건을 가진다고 해도, 해당되는 상황에 일반적인 된 가능성(확률)을 부여한다면 분명 그 가능성들에는 특정한 규칙성이 나타날 것이다.

  

   맥락변경논증은 자연언어의 맥락 민감적인 특성에 대한 최소한의 것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논증 만으로 모든 자연언어적 표현의 진리조건은 맥락에 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해도 이는 사소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두 가지 방향의 이론적 추구를 예상할 수 있다. 첫째는 르카나티가 말하는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에 대한 더 상세한 분석이다. 단순히 이 과정 속에서 포화 및 기타의 선택적 과정들이 상호간에 경쟁하고, 결국 말해진 것은 맥락과 관련된 화용적 과정이 결정한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이러한 주장 또한 화용적 과정이 어떻게 말해진 것을 결정하는지를 자세하게 규명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거의 알려주는 바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서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AB가 만나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나누었다고 하자. A가 말한다. “왜 너는 어제 너의 파티에 나를 초대하지 않았지?” 이에 B가 대답한다. “나는 좋은 사람만 파티에 초대했었으니까.” 우리는 B의 발화가 문자 그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단순히 우리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의 설명을 제공한다면 과연 그러한 설명을 철학적 설명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둘째로 특정한 자연언어의 발화를 통한 표현의 진리조건이 허용될 수 있는 범위에 제한을 가하는 이론적 작업을 생각할 수 있다. 맥락

에서

라는 발화가 행해졌다고 생각해보자. 이 때 맥락

가 속하는 세계

와 물리적인 유사성을 가진 가능세계들(

)을 선정한다. 그리고 맥락

과 물리적인 유사성을 가진 맥락들(

)을 선정한다. 이와 같은 가능세계들과 가능 맥락들에서 발화

가 수행되었을 경우에 해당 발화가 참이 될 확률을 따진다면, 비록 발화

에 대한 맥락변경논증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의 맥락 민감성 정도를 객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연언어의 모든 표현들에 대한 위와 같은 분석 결과를 목록화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물리적 지식을 토대로 위와 같은 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체계를 수립할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이 무차별적이고 상상적으로 제시되는 맥락변경논증의 효과를 상당 부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두 가지의 이론적 작업 방식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만약 맥락주의적 입장에서 1차적인 화용론적 과정에 대한 의식적이고 직관적인 차원에서의 분석에 머무르지 않으려 한다면, 이러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언어 능력 및 인지 능력을 탐구하고 있는 언어학, 인지과학, 심리학에서의 작업과 연계될 것이다. 또한 만약 우리가 자연언어적 표현들의 진리조건에 객관적인 제한을 가하려고 시도한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이론을 수립하기 위해서라도 물리학을 위시한 자연과학 분과 학문들의 작업과 연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순수히 언어철학 내부에서의 새로운 개념과 논증을 통해서 당면해 있는 의미론-화용론 사이의 대립을 해결할 가능성도 있을 수 있으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개념과 논증이 의미론, 화용론 양편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의미론과 화용론의 전쟁터 가운데에서 우리의 형이상학은 어디를 방황하고 있는가? 형이상학은 오직 형이상학자라는 이름을 가진 철학자들만의 몫인가 아니면 언어철학자들 또한 여전히 철학자로서 형이상학을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언어철학자들이 여전히 형이상학을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형이상학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최소주의자들의 해결책 속에서 의미론, 화용론, 형이상학은 서로 뿔뿔이 흩어진다. 화용론에게 무차별적인 자율을 허용하고, 의미론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을 최소화하려는 최소주의자들의 구도 속에서 형이상학은 언어철학이라는 철학적 영역 속에서 추방된다. 하지만 그러한 최소주의자들의 구도를 우리가 용납하지 않는다면, 의미론과 화용론이 종전을 선언하지 않고 여전히 치열하게 전투하며 역동적인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면, 여전히 형이상학은 언어철학이라는 범주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그것에 철학적 탐구 본래의 기능을 부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맥락주의가 우리의 평범한 직관에 호소하는 맥락변경논증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또한 지표주의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직관적 진리조건을 객관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지구전은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의미론적 진영과 화용론적 진영 모두 현재의 전투를 치열하게 유지하되, 지금의 전투 양상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인지과학에? 심리학에? 언어학에? 물리학에? 혹은 수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