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19: 과학, 기술, 산업

강형구 2016. 4. 29. 05:29

 

과학, 기술, 산업

 

  

홍성욱, “과학과 기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서술적(historiographical) 층위들

   과학과 기술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입장과, 과학과 기술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입장이 있다. 기술은 과학의 응용에 지나지 않는다, 즉 기술은 응용과학(applied science)이다라는 견해에 대해 반대한 집단은 기술사학회(Society for the History of Technology)의 회원들이었다. 이들에 의하면, 기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독자적인 집단이 있어고, 그 집단에는 독특한 규율과 규범이 있었다. 기술은 응용과학, 과학에 종속되는 부차적인 과학이 아니라, 과학과 대등하게 상호작용하는 독자적인 영역이라는 것이다.

  

   코이레, , 웨스트팔, 길리스피 등도 과학과 기술이 분리되어 있음을 주장했지만, 이들의 견해는 SHOT 회원들의 입장과는 다소 달랐다. 이들은 과학이 기술에 대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며 기술에 대한 과학의 우위를 암시한 것이다. SHOT 회원들로서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후 과학과 기술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입장, 과학과 기술이 각각 독자적인 행보를 걷는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과학사의 개별 사례들을 해석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해왔다. 홍성욱은 이러한 두 입장 차이가 왜 벌어지는지, 그리고 이러한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논쟁을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려 한다.

  

   역사적인 사례 연구들, 그것들의 함의들이 갖는 한계

  

   같은 역사적인 사례들에 대해서도 서로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특별한 사례가 과학과 기술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입증하기도 하고, 과학과 기술 사이의 중대한 차별과 분리를 입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한 홍성욱의 진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학사와 기술사라는 분과 학문 간의 격차로부터 비롯된다. 둘째, ‘과학’, ‘기술’, ‘과학적 공학등과 같이 논쟁에 등장하는 중요 용어들의 의미가 너무 광범위하다. 셋째, 서로 다른 관심사와 관점 때문에 권위를 부여하는 사료의 종류가 서로 다르다. 홍성욱에 의하면 이는 세부적이고 미시적인 과학사적 사례분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과학과 기술에 대한 거시사적 관점의 분석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거시사적(macrohistorical) 분석에 있어서 그는 이른바 경계물들(boundary objects), 잡종들(hybrids)을 중요한 분석 도구들로 도입한다.

  

   경계물들과 과학과 기술 사이의 거시사적 관계

  

   그리스 시대 이후 중세를 거쳐 근대 초에 이르기까지도 과학과 기술 사이의 분리는 뚜렷했으며, 이는 그리스 철학에서의 철학개념과 기술개념을 살펴보아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분리와 경계는 근대에 이르러 희미해지는데, 이러한 경계허물기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경계물들이다. 물질적인 차원에서의 경계물들은 도구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혁명기 이후 과학적 탐구에 도구가 적극적으로 기능하게 되면서 과학과 기술 사이의 간극을 좁히게 되었다. 또한 공간적인 경계물들, 혹은 경계적 공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17세기 말의 커피하우스, 살롱, 대중 술집 등을 들 수 있으며, 산업시대의 연구 실험실 등도 이 범주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 이른바 잡종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은 과학 혹은 기술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영역에 모두 속해 있으면서 두 영역 모두로부터 과학기술 발전에 유용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제임스 줄, 윌리엄 톰슨 등을 들 수 있다.

  

   홍성욱은 19세기 중엽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의 전기공학의 발달사를 분석함으로써, 20세기 이전까지 전기공학이라는 학문의 분야가 다양한 종류의 담론들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이후 이 학문은 안정화된 기초 위에서 발전했음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분석 속에서 등장하는 과학-기술인들이 경계를 넘나드는 잡종에 대한 대표적인 본보기를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논문 전체를 통해 홍성욱은 과학사에 대한 미시사적 관점이 아닌 거시사적 관점을 통해야만 비로소 과학과 기술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물질적’, ‘공간적’, ‘인적’ ‘경계물들을 과학-기술 관계의 거시사적 분석에 필요한 중요한 개념들로 내세우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과학사의 미시사적 분석이 분열과 긴장을 일으키는 것은 경계물들의 본질적인 속성 때문이다. 경계물들의 역동적인 불안정성으로 인해서 미시사적 불규칙성과 우발성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울리히 웽겐로스(Wengenroth), “과학, 기술, 산업

   과학과 기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과 입장이 있다. 웽겐로스는 이 논문에서 19세기에 있어 과학-기술-산업 사이의 관계를 조망하고자 한다. 19세기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는 과학과 기술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없었다. 기술이 과학과의 밀접한 결합 속에서 발전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기술은 19세기 중반까지 그 자체의 지식적이고 물질적인 추동력을 통해서 과학과는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던 것이다. 또한 로버트 포겔(Fogel)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것처럼, 19세기까지의 서양 사회의 발전에 있어 기술이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과학과 기술이라는 두 요소는, 정치, 경제, 문화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19세기까지의 서양사를 구성해왔던 것이며, 이 두 요소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들을 통해 밝혀졌다.

  

   과학과 산업혁명의 관계는 어떨까? 과학은 산업혁명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기술 혁신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주었을까? 이 문제에 관해 일부 학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산업시대의 발명가들이 과학 지식으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비록 과학적 내용이 아닌 과학적 방법론이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에서의 기술 발전은 독자적인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공학과 19세기 산업과의 관계는 어떤가? 비록 공학이 실제 현실에 적용되는 문제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업 현장에서는 공학 이론보다는 실질적인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실천적 지식이 더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공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러 상황은 조금씩 달라진다. 영국의 비약적인 산업 발전을 본 다른 유럽의 국가들은, 과학과 공학을 결합시키고 이를 적용하여 자국의 미약한 산업을 부흥하려는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군사전문학교, 공업전문학교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각국의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상품을 표준화하고 생산하는 데 국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영국의 경우 전문적 지식이 체화되어(embedded) 있는 산업 기계가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제한을 가하기도 한다. 각국에서는 전문적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인재들을 배출하지만, 이 교육 기관들이 산업 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다만 이 기관들은 산업 인력들이 갖는 자세, 태도, 도덕심 등의 형성에 일정 부분 이바지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187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달라진다.

  

   산업이 발전하고 이에 따른 각종 기계들, 생산품들이 정교해지고 그 양이 대량화되면서, 산업과 관련된 각종 용어들을 통일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 산업과 관련된 보편 언어를 개발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며, 이러한 언어를 개발하는 데 있어 과학이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새로운 과학 기술을 위한 표준화된 과학 언어를 발명하고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새롭게 등장하는 지식은 이러한 수학과 과학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신빙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기술과 공학 또한 점차적으로 과학화되기 시작한다. 지식을 암호화하는 능력과 기술을 수학적 용어로 표현하는 능력은 산업 과정의 정확도와 생산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켰던 것이다.

  

   19세기 말과 1차 세계대전 전까지의 시기에 이르면 산업이 과학 및 기술과 밀접하게 관련맺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독일의 유기화학 실험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전기 산업의 발전에 있어서도, 비록 그 초기에는 실천적이고 암묵적인 지식이 이론적 지식보다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지만, 점차적으로 이론적 지식이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됨을 살펴볼 수 있다. 독일의 대학의 경우 산업 현장에서의 인력을 교수 직위로 채용하기도 하는 등, 산업에서의 인력을 교육 제도 안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공학이 과학의 이론적 요소를 중요시하긴 했지만, 공학의 전반적인 발전에 있어 과학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했다. 결론적으로, 과학은 기술 및 산업 발전에 있어 보편적인 언어를 제공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는 했지만, 과학만이 산업 발달에 있어 유달리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다.

 

브루스 헌트(Hunt), “실천 대 이론 : 영국에서의 전기 논쟁, 1888-1891”

   홍성욱은 헌트의 논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헌트는 1983년에 쓰여진 이 논문에서, 맥스웰의 전자기장 이론을 옹호하던 과학자 엔지니어들이 실천적 엔지니어들과 겨루면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전기학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1870년에서 80년대에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맥스웰 이후의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서 정교화된다. 맥스웰 이론을 지지하던 일군의 학자들 중에는 포인팅(Poynting), 피츠제럴드(FitzGerald), 롯지(Lodge) 등이 있었다. 또한 중요한 맥스웰 주의자로 올리버 해비사이드(Heaviside)를 빼놓을 수 없는데, 해비사이드는 다소 괴짜인 사람이었으며 정식적인 의미에서의 물리학자가 아닌 재야적 성격이 강한 인물이었다. 헤르츠가 전자기파를 실험적으로 검증한 것에 고무되어 맥스웰주의자가 된 해비사이드는 맥스웰의 이론을 근거로 자체 유도(self-induction) 효과가 발생할 것을 예측했는데, 맥스웰 이론을 반대하던 프리스(Preece)는 전기공학계 내에서의 자신의 권위와 힘을 이용해서 해비사이드의 논문이 출판되는 것을 저지하기까지 했다.

  

   맥스웰주의자들과 이전까지 전기공학을 주도했던 전기공학자들 사이의 대결은 팽팽했다. 특히 두 집단 사이에서 쟁점이 되었던 개념들은 자체 유도의 개념이었다. 롯지로 대표되는 맥스웰주의자들은 전자기장의 존재를 믿은 반면, 프리스로 대표되는 공학자 혹은 실천가(practitioner)들은 전기에 관한 유체 이론을 믿었다. 프리스는 전도체의 저항을 줄임으로써 유도 현상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롯지는 맥스웰 이론에 근거해 전도체의 저항을 줄이는 것이 자체 유도를 억제하는 데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프리스는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내세우며, 자신이 갖고 있던 지위와 명예를 근거로 전자기 이론을 논박하려 했다. 그는 맥스웰주의자들을 수학의 노예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전기 현상과 맥스웰 이론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유선 전화가 개발되고 장거리 통화에서의 자체 유도 효과가 점차적으로 중요해지면서, 점점 프리스의 입지는 약화되기 시작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전류(교류)에서는 전류의 매개가 전선 외부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가들의 입장에서는 이전까지 자신들이 차지해오던 입지를 과학자-엔지니어들에게 쉽사리 넘겨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론 대 실천의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 논쟁에서의 중심적인 쟁점은 전기 현상에 관해서 누가 권위를 가지느냐하는 문제였다. 시일이 지날수록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가 확실시되기 시작하면서 이 권위는 실천가들에게서 이론가들에게로 이양이 되었고, 이러한 이양에는 헤르츠의 실험이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이에 따라, 이전까지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해비사이드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요약하자면, 헤르츠의 전자기파 검출은 맥스웰 장이론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이에 따라 전기공학에 있어 맥스웰주의자들이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전기적 세계에 관한 귄위가 과학자들에게로 이양되었다.

 

홍성욱, “헤르츠의 광학과 무선전신(telegraphy)”

   홍성욱은 장거리 무선전신의 발명에 있어서 마르코니의 독창성을 인정한다. 마르코니의 업적이 학계에 알려졌을 때, 몇몇 학자들은 무선전신이 마르코니 이전에 이미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며, 마르코니를 무선전신을 최초로 구현한 인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홍성욱이 생각하기에 마르코니 이외의 학자들(특히 영국의 공학자들)은 전자기파에 대한 광학적 유비(optical analogy)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 마르코니의 경우 광학적 유비에서 벗어나 전신학(telegraphy)에서의 개념들을 전자기파 이론과 결합하여 장거리 무선전신을 성공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으며, 바로 그 점이 마르코니가 보여주는 독창적인 모습이다.

  

   헤르츠가 전자기파를 검출한 이후, 그가 고안한 장치들은 이후의 전자기파 연구에 있어 표준적인 도구가 된다. 맥스웰주의자들은 의사소통을 위해서 전자기파를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문제는 이러한 헤르츠파를 멀리까지 전달하는 데 있었다. 전자기파를 광학적 유비를 통해 이해하던 학자들은(대표적으로 피츠제럴드) 전자기파의 길이를 짧게함으로써 파를 멀리까지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지만 이는 잘못된 믿음이었다. 비록 몇몇 학자들이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전자기파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커뮤니케이션 기술보다는 광학과 광학적 유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윌리엄 크룩스 역시 무선전신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고 이에 관련된 논문을 제출했지만, 크룩스는 장거리 무선전신을 구현하지는 못했으며 그의 논문은 다분히 상상적인 것이었다. 크룩스의 논문은 마르코니의 업적이 알려진 이후에야 재평가되고 영향력을 발휘한다. 러더퍼드와 잭슨의 경우에는 크룩스에 비해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전자기파를 통한 무선전신을 구현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광학적 유비에서 결정적인 방식으로 벗어나지 못했고, 무선전신의 이론적 한계인 1/2마일을 극복하지 못했다. 광학적 유비는 과학자들에게 일종의 제약으로 작용했으며, 과학자들로 하여금 파동의 파장을 줄이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마르코니는 전송기와 수신기의 양 끝을 땅과 연결시켰고, 이것이 장거리 무선전신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요소였다. 마르코니의 이러한 착상은 전신학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홍성욱에 의하면, 마르코니는 광학적 유비를 참조한 것이 아니라, 유선전신과 무선전신 사이의 유비를 참조로 해서 혁신적인 안테나를(끝을 땅과 연결시킨 안테나)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홍성욱, “과학과 도제 사이에서 : 19세기 영국의 공학교육

   이 논문에서 홍성욱은 19세기 영국의 공학교육에 있어서 기술학교나 과학적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공학교육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 대학의 과학적 엔지니어링 교육은 도제 제도를 대체하지 못했으며 단지 도제 제도를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세기 당시 토마스 헉슬리, 리온 플레이페어, 존 스콧-러셀 등은 기술교육 과정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미개한 장인과학적인 장인으로 변모시키는 것을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엔지니어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환영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의 과학교육은 작업장에서의 교육에 대한 유용한 보충수단으로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엔지니어링 교육은 순수한 과학적 지식도, 순수한 실제적 지식도 아닌 그 중간 어디엔가 속하는 지식이라고 생각되었고, 1840년대에서 1850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이론과 체계적인 실험이 점차 현장 엔지니어링 속으로 침투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새로 건립된 엔지니어링 실험실들은 전통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전통의 극복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엔지니어의 교육은 편협한 전통적 교육에 머무르지 말고 과학적인 엔지니어링을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리지의 학생들은 실험실에서 공장이나 작업장에서는 할 수 없는 체계적인 실험과 측정을 하면서 실제 엔지니어링에서 사용되는 물질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엔지니어링 학생들은 훌륭한 엔지니어링 실험실을 갖춘 칼리지에서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괜찮은 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엔지니어들에게 엔지니어링 실험실은 단지 개인 연구의 수단이 아니라 교육의 도구로서 기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와 1890년대를 거치면서 엔지니어링 실험실이 작업장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플리밍 젠킨의 경우, “엔지니어들은 여러 기술들을 실제 생산자와 완전히 접촉한 후에만 제 것으로 습득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을 칼리지에서 흉내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젠킨과 같은 엔지니어들에게 과학은 우수한 학생을 위한 실제적 교육이 아니라 조금 떨어지는 학생들의 정신에 규율을 심어주는 의미로서 더 중요했던 것이다. 물리학 실험실들은 실제 세계의 전신의 상황을 재현하는 데에 한계를 지니고 있었고, 여전히 작업장 교육은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겨졌다. 캠브리지의 제임스 유윙은 대학 엔지니어링의 목적이 도제제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충하고 단축하기 위해순수 및 응용과학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말에 들어서면 칼리지 교육과 작업장 전통의 결합이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홍성욱은 칼리지의 엔지니어링 교육이 영국에서 도제식 작업장과 공장에서의 실제적인 교육을 대체하는 데 실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든다. 첫째, 영국의 도제 제도가 잘 확립된 전통이었다. 둘째, 작업장에서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이 변화하는 환경에 잘 대응했다. 셋째, 과학자-엔지니어들은 엔지니어링 학생들이 칼리지에서 모든 것을 교육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집착하지 않았다. 저자는 영국의 엔지니어링이 작업장도제 제도라는 과거의 전통 때문에 쇠퇴했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테오도르 포터(Porter), “과학은 어떻게 전문화되었는가

   20세기에 이르러 과학이란 지극히 전문적인 것이 되었다. 일반 대중들은 과학적 지식의 신빙성과 객관성은 믿지만, 세부적인 과학적 개념들이나 복잡한 과학적 용어들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느낀다. 과학이란 대중과는 구분되는 전문가 집단인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전문적인 활동이다. 과학적 지식은 과학자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에게는 배타적이다. 포터는 이러한 현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우리시대에 이르러 과학은 이렇게 전문화되었는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면, 어떤 과정과 어떤 이유들을 통해서 과학의 전문화가 수립되었는가? 포터는 현대 과학의 구성 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이 의문들에 답하려 한다.

  

   역설적으로, 미국에서 과학사라는 학문은 과학 전문가들 사이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과학과 문화 및 과학과 대중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목적 때문에 등장하게 되었다. 코넌트를 비롯한 교육 개혁가들은, 과학을 전문가 집단에만 소속되는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엘리트 교육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게끔 만드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포퍼 등과 같은 학자들은 과학적 방법을 국가사회주의의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의사수립절차와 대비시키며 과학을 공산주의와는 상반되는 자유민주주의와 결부시키려 했다.

  

   1700년대의 계몽철학자들은 과학의 전문화를 반대하며 과학을 대중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예를 들어 콩도르세는 일반 시민을 육성하는데 있어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과학이 덕(virtue)을 기르는 적절한 기초일 뿐만 아니라, 과학은 지적이면서도 도덕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과학이 점차적으로 전문화되면서 과학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데 문제가 생기고, 이에 따라 과학을 진보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데에도 무리가 따르게 되었다. 이에 대해 생시몽, 꽁트 같은 학자들은 실증주의와 과학주의를 주창하며, 과학의 통합된 상을 형성하려고 했다. 꽁트는 점점 더 전문화되어가는 수학자들을 비판하고, 과학자는 단순한 기술자가 되어서는 안 되몀 철학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세기 말까지 이어진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과학과 종교는 상호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진화론 및 에너지 보존 이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성서의 가르침과 과학적 지식은 점차적으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해켈, 헬름홀츠, 베르나르, 다윈, 스펜서, 헉슬리 등과 같은 학자들은 과학을 대중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다윈주의에 대한 논쟁은 학계의 차원이 아니라 대중의 차원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19세기 말은 과학의 시대라기보다는 대중과학의 시대였던 것이다. 헉슬리의 경우, 과학은 근대적 시민을 형성하는 데 있어 적절한 기초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하였으며, 과학이 상식과 유리되거나 격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세계대전 이후 과학은 광범위한 대중과 점차적으로 격리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포퍼, 머튼, 코넌트 등이 과학적 태도를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학의 전문적인 측면을 인정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더 나아가 쿤은 자신의 유명한 책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전문화된 공동체의 활동이 정상과학의 핵심적인 특질임을 강조했다. 이에 영향받은 사회과학들은 정상과학의 위치를 부여받기 위해 점차적으로 전문화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전문화된 사회과학이 과학의 전문화된 성격을 더 부각시키는 그능 또한 수행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 시대에 이르러 과학적 지식이란 일종의 정보로서, 그 어떤 집단도 아닌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서만 생산되는 객관적인 지식으로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주목할 만한 측면은, 과학이 사회에 관한 정책 혹은 의사결정 과정에 중요한 참고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과학적 결과물의 몇몇 측면들에 대해서만 지적할 수 있을 뿐 과학의 사회적 이용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의 개발에 기여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과학적 지식은 대중과 격리된 상태에서 제작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과 신뢰성에 대한 특정한 기대를 가지며, 과학적 지식은 우리 사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포터는 위와 같은 분석을 통해, 과학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어떤 근거들을 통해서 전문화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과학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연구가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좋은 예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