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16: 뉴턴과 뉴턴주의

강형구 2016. 4. 26. 06:57

 

뉴턴과 뉴턴주의

 

알렉상드르 코이레,뉴턴적 종합의 의의(전형적인 지성사적 분석)

   뉴턴은 질적, 감각적 지각의 세계, 일상 생활의 세계를 정확성, 엄격하게 결정되는 아르키메데스적 세계로 전환시켰다. 그는 기하학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천문학과 물리학을 통합시켰다. 물질, 운동 등과 같은 근본적인 개념들에 변화가 일어났고, 운동은 더 이상 과정(process)이 아닌 상태(status)가 되었다. 움직임과 정지함은 (둘 다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서로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뉴턴은 지상계에 수학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수학적 존재들을 물리적 존재들로 변경시켜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 그는 유율(흐르는 비율, flux)’을 수학에 도입했다. 결과적으로 뉴턴은 갈릴레오가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자연의 수학화를 이루어 낸 것이다.

  

   뉴턴은 수학적 세계상(갈릴레오, 데카르트로 대표되는)과 경험적 세계상(보일로 대표되는)을 종합했다. 뉴턴의 세계에서는 운동’, ‘물질’, 운동과 물질의 토대가 되는 공간이 등장하며, 이 세 개체들을 인력이 관계 맺고 있다. 뉴턴의 세계에는 대부분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속에 정지 혹은 등속운동하는 소량의 물질이 있으며, 그 물질들에는 만유인력이 작용하여 물질들 사이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런데 뉴턴적 세계관에 있어 물질은 불활성이고 수동적인 것이므로, 인력을 작용하는 것은 다름아닌 이다. 뉴턴 본인은 만유인력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본성을 불가사의한 것으로 보았다. 후대에 이르러 이 힘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후 뉴턴주의는 보편화되었으며, 뉴턴적 세계관은 정교해졌고,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에 이르러 뉴턴 역학은 그 정점에 달한다. 그리고 이렇듯 뉴턴주의가 광범위하게 전파되면서 뉴턴은 사람들 사이에서 초인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또한 뉴턴은, 자연의 신비를 파악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운아였다고 생각되었다. 실제로 그는 자연을 순수히 역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한계에 대한 깊은 직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힘과 인력을 도입했지만 이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선택의 자율성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힘과 인력은 신에 대한 합리적 믿음을 포함하고 있었다. 뉴턴 세대에서는 신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이후 역학이 발전함에 따라 세계에서 신 개념이 불필요하게 된다(라플라스).

  

   뉴턴주의의 부흥 이후 이는 인간과 사회의 영역에로 확장되었다. 뉴턴 물리학에 기반한 인식 이론과 사회과학이 발전했던 것이다. 비록 뉴턴이 천상계와 지상계의 물리학을 통합시켰지만, 그의 물리학으로 인해서 세계에는 인간이 차지할 자리가 없었다. , 그의 물리학에서는 생명과 비생명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

  

평가 : 뉴턴 역학의 세계상이 갖는 철학적 의의를 개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글이다. 갈릴레오에 대해 그가 쓴 논문과 유사하게, 뉴턴 또한 혁명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갈릴레오가 자연을 기하학화했다면, 뉴턴은 자연에 힘을 부여하고 자연에 맞게 수학을 물리학화함으로써 수학적 세계관과 물리학적 세계관을 통합했다. 갈릴레오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그러한 한계를 뉴턴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분석이 제시되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이후 뉴턴주의가 어떤 양상으로 발전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을 뿐인 것이 아쉽다.

  

스티븐 섀핀,라이프니츠-클라크 논쟁에서의 자연철학과 정치학

   라이프니츠-클라크 논쟁을 단순히 자연철학의 관점에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며, 이 논쟁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섀핀은 뉴턴적 개념이 사회집단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써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뉴턴-라이프니츠 논쟁을 형이상학적/신학적/정치적 관점에서 재구성해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한 시대의 지식이 표상하는 것들을 그 시대의 기술/정치/경제/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 더 나아가 지식적 표상이 그 시대의 기술/정치/경제/문화적 요소들과 중요한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게오르크 루트비히를 모시고 있던 라이프니츠는 게오르크가 이후 영국의 조지 1세가 될 때 영국으로 따라가려 하였으나 결국은 그러지 못하고 독일 하노버에 머물러야 했다.

  

   뉴턴의 도식에서는 신의 자발적 능력을 강조했고, 라이프니츠의 도식에서는 신의 지성적 속성을 강조했다. 뉴턴의 신은 능동적 힘을 갖고 있었으며 영혼과 신체의 관계 문제도 신의 의지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물질적 세계가 비규칙성으로 인해 붕괴하지 않기 위해서는 능동적 신의 개입이 필요했다. 뉴턴은 절대 공간이 신의 지각과 같다고 생각했고(신의 편재성), 물질은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산물이었다. 뉴턴의 물질이 수동적이고 신의 법칙에 따라서만 작용하는 것이었다면, 라이프니츠의 물질은 능동적이었고 자기충족적이었으며 예정조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행해진 보일 강연은 뉴턴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증명하려는 활동이었으며, 이는 홉스, 스피노자주의, 라이프니츠의 단자론과 대비되었다. 영국의 반-뉴턴주의자들, 자율적 사상가들이 라이프니츠 주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둘 사이에 일종의 정치적인 관련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정치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 사이에는 중요한 관련이 있었다. 토리당은 군주의 신성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인정했고, 그런 의미에서 군주의 자율적 의지를 수용했다. 휘그당은 군주의 권력이라 하더라도 법률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토리당과 휘그당 둘 다 군주가 자신의 권력을 토대로 군중과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기를 바랐다.

  

   휘그당이 영국의 정치적 권력을 차지한 이후, 휘그당 내에서도 급진파와 보수파 두 진영으로 갈리게 된다. 휘그당 보수파는 집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급진적 휘그당은 전제 군주의 임의적 권력에 반대했고 이는 휘그당 보수파가 수용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따라서 휘그당 보수파는 보수, 급진적 진영 모두로부터 차별화시키는 방안을 그려내야 했다. 물질의 능동성 이론은 도덕과 결부되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고, 휘그당 보수파는 우주적 토리즘과 세속적 휘기즘을 화해시키는 방식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상했던 것이다.

  

   평가 : 섀핀은 당시의 뉴턴-라이프니츠 논쟁을 당시의 정치적, 신학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고려하고 있다. 섀핀의 이 글은 뉴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뉴턴주의에 대한 것이고, 물리학에서의 뉴턴주의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아니라 뉴턴주의 일반의 사회적 의의와 효과에 대한 분석이다. 물리학적, 자연철학적 논쟁을 정치 사회적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가 우리에게 이 논쟁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일반적인 자연철학적 논쟁들 또한 당대의 정치 사회적 배경과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섀핀의 이 논문은 물리학에서의 뉴턴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이후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뉴턴주의가 어떻게 승계되고 변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아마 그러한 내용은 물리학사를 전공한 이가 말해주게 될 것이다. 뉴턴을 이해함에 있어 그 물리학의 의의를 이해하는 게 중요한가 아니면 그것의 다른 사용과 효과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가?

  

사이먼 섀퍼,뉴턴주의(뉴턴주의에 대한 간략한 소개, 현대적 관점을 반영)

   하인리히 헤르츠와 에른스트 마흐는 뉴턴주의에 반대했다는 것, 특히 마흐의역학의 과학. 라그랑주는 뉴턴의 역학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역학적 원리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동역학을 정역학으로부터 수학적 원리들을 토대로 연역해서 미시적 힘이 개입할 여지를 없게 만들었다. 라그랑주의 역학은 고전적인 뉴턴역학과 상당히 달랐다. 고전역학은 또한 열역학, 전자기학과도 달랐다.

  

뉴턴주의 이해하기 : 해석자들의 이해관계

  

뉴턴주의적 힘 : 18세기 실험철학

   보일의 실험철학이 뉴턴주의로 흡수되게 된 과정, 뉴턴의 권위가 대학 내에서 용인된 과정. 뉴턴의 과학 프로그램은 반론에 직면했고(대표적으로 버클리Berkeley 주교), 뉴턴주의는 갈등 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갖고 탄생한 체계라고 할 수 있었다.

  

   중력이란 질량의 본질적인(필연적인) 속성이 아니다. 후기에 이르러 뉴턴은 중력을 전파시키는 미소 유체(에테르)를 인정했지만, 중력 그 자체의 원인은 물질에 귀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질의 본질적인 힘이 반드시 수학의 언어로 표현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다른 학문의 영역으로 뉴턴주의가 확장되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뉴턴주의로 인해 물리학의 영역이 좁아지게 되었다.

  

   뉴턴주의 물리학 연구 : 이후 물리학자들은 뉴턴이 구성한 것과는 다른 보존법칙을 통해서 역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천체역학에서도 뉴턴에 반론을 제기한 학자들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뉴턴주의가 성행하면서 천문학적 현상의 성공적인 예측을 뉴턴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경향이 보인다. 쿨롱이 역제곱법칙을 정전기학에 성공적으로 적용시킨다. 역학은 도덕과 무관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라플라스의 결정론이 등장하자, 영국에서는 이러한 무신론에 대한 반대로서의 뉴턴주의가 등장했다. 이러한 뉴턴주의를 옹호한 대표적인 예로 브루스터(Brewster)와 휴얼(Whewell)을 들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면 에너지 보존이 주된 원리인가 동역학적 법칙이 주된 원리인가에 대한 물리학자들 사이의 상반된 입장이 등장한다. 에너지 보존이 궁극적으로는 뉴턴 역학의 귀결인가 그렇지 않은가? 뉴턴주의의 개념은 광범위하고 편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20세기에 이르면 현대물리학(상대론과 양자론)의 대립항으로서의 뉴턴주의가 등장한다.

  

   평가 : ‘과학적 지식의 사회구성적 성격의 측면이 잘 녹아들어 있는 짧은 소개글이다. 각 집단의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뉴턴주의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뉴턴주의가 이후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초기의 것과는 다른 원리를 통해 발전하고 있는 것 등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뉴턴주의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

 

루퍼트 홀/매리 홀,뉴턴과 물질 이론

   뉴턴의 물질 이론은 난해하다. 하지만 뉴턴 자신 또한 인력의 본성이 무엇이든 간에 역제곱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뉴턴은 원리와 가설을 구분하고, 전자가 실험적이고 수학적이라면 후자는 기계적이라고 생각했다. 물질의 구조와 현상의 기계적 원인에 대한 뉴턴의 생각들은 가설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견해이다. 뉴턴 본인은 개념 사용에 있어 비일관성(inconsistency)을 보인다.

  

   뉴턴은 수학을 물리학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인정한다. 그는 첫 번째 차원의 메커니즘(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 메커니즘)을 거부하고, 실험적이고 수학적인 두 번째 차원의 메커니즘을 옹호한다. 뉴턴은 복수의 메커니즘이 제시되더라도 현상을 동일한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뉴턴이 수록한 모든 주장들을 두 번째 차원의 메커니즘으로 오독할 때 뉴턴을 데카르트와 유사한 에테르주의자라고 착각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갈릴레오에 대한 데카르트의 반대와 데카르트에 대한 뉴턴의 반대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뉴턴 또한 갈릴레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힘의 진정한 메커니즘을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힘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기술하는 수학적 법칙을 제시했다. 뉴턴은 중력에 대한 수학적 기술을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힘에 대한 복수의 1차적 가설들(비수학적)로부터, 힘에 대한 유일한 2차적 가설(수학적)을 제시할 수 있게 됨으로써 과학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뉴턴이 데카르트와 상반되는 세계관을 정립한 것은 아니다. 뉴턴은 학창시절부터 데카르트의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의 철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영향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게 된 것이다.

  

   후반기에 이르러 에테르 이론을 주장한 종국에는 뉴턴이 원격힘의 개념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고 해석하는 역사가들이 있는데, 저자들은 이들의 해석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뉴턴은 2차적 메커니즘 만으로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어리석음 혹은 모순에 이른다)는 반박을 대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1차적 메커니즘을 제시했을 것이다. 말년까지도 진공의 존재에 대한 뉴턴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가 : 후기에 이르러 뉴턴이 에테르 이론으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1차적 메커니즘과 2차적 메커니즘을 구분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음에 드는 논문이며, 전형적인 지성사적 분석을 하고 있다.

 

태크리,호두껍질 속의 물질 : 뉴턴의 광학과 18세기 화학

   뉴턴은 물질 입자의 종류에 따라 반사의 방식이 다르며, 물질의 빛을 보고 그 구성 성분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질에는 구멍이 많이 나 있고, 내부에 공백이 많으며, 물질은 드문드문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물질의 정확한 내적 구조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물질에 대한 호두껍질 이론은 라이프니츠의 물질 이론(물질은 꽉 차있는 상태이다)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화학자들은 이러한 뉴턴의 물질 이론을 받아들여, 화학자들은 자신들이 궁극적인 물리적 원자들을 탐구하려고 의도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원자들보다 더 큰 원소들을 탐구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토마스 영이 빛의 물질 이론을 비판했고, 돌턴은 화학적 원소가 곧 물리적 원자일 수 있다며 기존의 뉴턴 물질이론과는 상반되는 이론을 제시했다.

 

  

맥과이어/라탄시,뉴턴과 판의 파이프

   뉴턴에게 있어서는 연금술, 성서에 대한 연대기적 탐구, 수리-실험적 과학 탐구가 서로 연계되어 있다. 뉴턴은 고대인인 루크레티우스가 중력에 대해서 자신과 유사한 생각을 했다고 믿었다. 그는 피타고라스 시대에 알려져 있던 수학적 힘이 후대에 들어 잊혀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대의 철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자신들이 발견한 진리를 감췄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물질 사이에 작용하는 신성한 힘은 고대인의 생각이었다. 뉴턴과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완전하고 진정한 철학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저자들에 의하면 영국에서 발흥된 때늦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때문에 뉴턴이 보편과학의 수립에 성공할 수 있었다.

 

보울러/모러스,현대과학의 풍경2

   버터필드는 과학혁명은 기독교의 등장 이후 가장 빛을 발한 사건이었으며, 그에 비하면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은 일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상당히 수정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중세와 후대의 관념 및 실행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연속성을 논하며, 유일무이한 과학적 방법론이 있다는 견해를 갈수록 불편해한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천문학 종사자들의 지적/사회적 지위가 자연철학 교수보다 낮았다. 당시 톨레미 천문학에 사용되던 주전원과 등각속도점이 실재를 기술하는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러한 것들은 현상을 구제하기위해 사용되는 기하학적 기법으로만 여겨졌다. 코페르니쿠스는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서문에서 그의 모델이 물리적 실재의 반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놀라운 제안을 한다. 유사하게 갈릴레오는 새로 획득한 철학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천문학적 발견에는 심오한 철학적 결론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해야만 했다. 갈릴레오의 죄는 그가 말한 내용보다는 말하는 방식에 있었다. 그는 교회의 권위와 지적 중재자로서의 교회의 정당성에 도전했던 것이다.

  

   티코의 우주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의 통합성과 그럴듯함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에 코페르니쿠스 모델의 정확성과 간결함을 더할 수 있는, 즉 두 모델의 장점을 모두 갖춘 우주체계로 여겨졌다. 티코는 천문학 연구를 지속하는 데에 왕족과 귀족의 후원, 특히 재원에 대한 접근이 결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케플러에 의하면 각각의 행성들이 지나는 궤도는 타원이었다. 일개 천문학자/수학자에 불과한 케플러가 자연철학 논의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달 밑 세계와 달 위 세계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불완전한 지상계의 속성을 별의 운동에까지 확장하는 것이 중요했다. 모더니티의 특징은 스스로를 새롭다고 생각한 데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이 무엇이 되어야 하고, 이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이며, 연구의 결과로 무엇이 산출될 것인가에 관해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근대 초 자연철학자들은 세계에 관해 우리와는 전혀 다른 관념을 갖고 있었으며, 과학이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도 아주 다르게 생각했다.

  

   신비한 속성을 긍정하는 자연마술, 오컬트적 성질. 이에 반하는 기계적 철학. 자연이라는 기계가 작동하는 원리, 마술이 탐구하고자 한 신비한 속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불가사의한 힘조차 간단한 기계적 원리의 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소용돌이 이론 및 모든 생명체가 기계라고 보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