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18: 과학과 의학에서의 실험실과 현장

강형구 2016. 4. 28. 05:50

 

 

과학과 의학에서의 실험실과 현장(field)

 

  

(지난 주에 이어) 프랭크 터너(Turner), 1880-1919년 사이의 영국 대중과학 (1980)

   총평 :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논문. 시기에 따라 적합한 정치사회적 전략을 사용하면서 과학자들이 전문가라는 자신들의 입지를 굳혔음을 보여주려 하는 것 같다. 특히 영국 대중과학자들은 1880-1919년 사이에 과학이 근대적 시민 교육에 중요하다는 것, 과학이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 과학이 전쟁 수행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과학자 집단을 형성하고 사회적인 지위와 입지를 형성해나갔다.

  

   부분적 메모 : intellectual content, methodological orientation, and professional organization of science cannot be separated from its social and cultural environment. (589)

    The body of rhetoric, argument, and polemic produced in this process may be termed public science, and those who sustain the enterprise may be regarded as public scientists. (589)

    They consciously attempt to persuade the public or influential sectors... (590)

    The present essay consistitutes a limited, speculative probe into the character of British public science from approximately 1880 to the conclusion of the First World War. (speculative, tentative) (590)

  

   첫째, 과학이 여가/흥미에서 산업/기업(enterprise)으로 발전했다는 것. (591)

   둘째, 과학을 통해서 종교와 형이상학을 공격하고, 과학자들이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 (591)

   셋째,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지만, 이러한 등장에는 많은 곤경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사회적 유용성을 강조해야 했다. (592)

   대중과학 발전에 있어 과학박람회가 중요했다. (592)

   대중과학자들은 독일에 뒤처지는 영국의 처지를 다소 과장되게 주장했지만, 생체해부 반대자들의 반대가 성공함으로써 과학적 연구에 제한이 가해졌고, 국가와 주에 의한 과학에의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593~594)

   대중과학자들은 좋은 정부, 건전한 정치 등이 과학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94)

   과학이 정치적 시민을 양성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된다는 주장. (595)

   과학을 지원하지 못하는 정치적 구조에 대한 비판. (596)

   Karl Pearson, 과학적 마인드가 훌륭한 시민이 되는 데 필수적이다. 과학은 국가의 정치 및 군사적으로 이익이 되는 사회적/도덕적 습관을 길러준다. 국가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과학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596~597)

   우생학 운동에 대한 지지. 우생학 운동은 전문적 중간 계급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합법화라고 볼 수 있다. Galton, 우생학을 통해 개별 시민들의 시민적 가치 정도를 평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우생학 이외에 종사하는 과학자들 또한 과학이 사회에 중요하게 작용될 수 있음을 주장, 대중과학자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 (597~599)

   영국 과학 길드. 과학이 제국의 부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 길드는 1912년 경에는 900명에 달하는 보수 단체로 성장한다. 세계 1차대전 당시의 대중과학. 전쟁 이후 전쟁에서 갖은 실수가 벌어지자 과학자들이 정부를 비판한다. 또한 정치가들에 대해서 비판한다.

 

  

윌리엄 콜만(Coleman),클로드 베르나르의 생리학에 있어 학문의 인지적 기초(1985)

   총평 : 콜만은 생리학이라는 분과 학문이 등장함에 있어서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리학의 출현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학문의 창시자가 강조한 생리학 특유의 인지적 기초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이려 하고 있다. 콜만은 인지적 기초와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 둘을 모두 고려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종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부분적 메모 : 과학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지성사적 관점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knowledge itself as a central element in shaping the structure of disciplinary cultures and subcultures(Charles Rosenberg). ...the phenomenon of the scientific discipline too significant to be left to sociologists who ignore the intellectual content of this basic operative unit in the scientific endeavor.

  

   experimental physiology, and Bernard's purpose was to establish this science as an autonomous discipline... W. R. Albury, namely, that the primary focus of Bernard's later yearswas disciplinary justification, eventuating in a campaign that placed its greatest stress upon the distinctiveness of physiological inquiry. 생리학만이 생명의 특성을 보존하면서 생명을 객관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생리학의 자율성을 확보하려 했던 베르나르. 베르나르는 생리학이 의학과 화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52)

  

   의학자들은 질병에 관한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알고 있어야 질병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 베르나르는 생리학의 경쟁자였던 화학과 생리학을 차별화시켜야 했다. 생리학은 화학적 과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유기화학의 리비히와 대립). 화학자는 생명 현상을 다루는 데 실패한다.

  

   베르나르의 방법론적 절차 세 가지. 생체해부, 화학, 조직학(histology). 생명 현상을 조절하고 수정하는 것이 실험 의학의 목표이며, 생리학자의 세계는 병원이 아니라 실험실이다. 실험실에서 제대로 생명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 생명은 일종의 work-shop이고, work-shop에 조심스럽게 개입할 수 있는 또다른 work-shop이 바로 실험실이다. 클로드 베르나르는 독일 과학 발전의 예를 들면서, 실험 의학의 분야에서도 실험실이 세워져야 한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당시 Carl Ludwig가 지휘한 독일 생리학 실험실이 유명했는데, 베르나르는 Ludwig의 실험실에서 이론적/물질적으로 독립된 생리학의 모습을 보았다.

  

   독일에는 실험 의학을 위한 실험실 및 전공자들이 이후 진출할 수 있는 경로가 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러한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고 베르나르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다. 훗날 실험실을 얻게 된 베르나르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실험 생리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60). 베르나르와 파스퇴르 모두 실험(연구)과 교육을 병행하는 실험실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인재들이 육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프랑스에서도 제3공화국 시기에 이르러 재정지원이 증대하고 교직원 수도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The laboratory thus the central institution for the development of both science and scientists. It was also, as has been described above, the physical manifestation of the investigatory methods demanded by the cognitive content of Bernard's programmatic endeavor... 파스퇴르와 베르나르는 학생 교육의 표준화,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분리, 교육에 있어서 실제로 참여하고 실험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용적인 방식으로 프랑스 고등교육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전문과학자를 육성하기 위해서 대학과 실험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며, 과학 연구 기관이 국가의 힘과 권위를 보여주는 새로운 척도가 되었고, 프랑스는 독일에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베르나르는 프랑스 생리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천재와 도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생각에 프랑스에 천재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베르나르 또한 당대의 다른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학문의 물질적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그에 따르면 이 독립은 강력한 인지적 이유들에 근거했다. 물론 학문의 형성에 사회적/물질적 조건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과학적 현상을 오직 사회적 매개변수들을 통해서만 해명할 수는 없다. 콜만은 인지적 내용을 과학사 분석에 있어 1차적 역할로 내세웠으며, 이는 스트롱 프로그램이나 사회 구성주의와는 상반되는 입장이다.

 

커닝햄/윌리엄스,의학에서의 실험실 혁명 중 들어가는 말(1992)

   총평 : 의학에서의 실험실 혁명을 다룬 논문집의 서론인 이 글에서 커닝햄과 윌리엄스는 최근의 과학사가들이 실험실 혁명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려 하는지에 대한 간결한 개관을 제공하고 있다. 커닝햄과 윌리엄스에 따르면 이 논문집의 저자들은, 실험실 혁명이 몇몇 영웅적인 과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관점을 거부하고, 혁명이 이전까지의 전통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이후 혁명이 과학 제도와 과학적 탐구에 어떤 종류의 영향을 미쳤는지 등과 같은 다양한 관점들을 통해 실험실 혁명을 다루고자 한다.

  

   부분적 메모 : 병원 의학의 등장은 의학의 장소와 내용 모두 극적으로 변경시켰다. 의학이 실험실에 기반해야 한다는 주장은 병원의 입지를 낮게 만들었다. 실험실 의학으로의 이행은 그야말로 하나의 혁명이었으며, 이 혁명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클로드 베르나르이다. 사적인 화학 실험실로부터 대학에 기반한 연구실로, 또한 이로부터 대량으로 재정 지원을 받는 기관이 발전한다. 연구실이 담당했던 산업적 역할.

  

   저자들은 의학에서의 실험실 혁명을 몇몇 특출한 개인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겠다고 한다. 실험 의학에 대한 저항의 사례도 있는데, 예를 들면 동물 생체 해부에 대한 찬반 논쟁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Bruno Latour, the perspective of the anthropology of science. 실험 의학에 대한 인지적 주장과 실천적 주장에 대한 주목. 실험 의학의 주창자들이 실험 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이 왜 강조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

  

   실험 의학을 분석할 때 주목해야 하는 세 가지 측면들. 연구 대상의 선정, 개별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와 기법의 발전. 실험실 연구자와 사회 내 다른 집단 사이의 관계. 변화가 일어난 사회의 본성. 실험실 의학은 서구에서 탄생해서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 나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의학이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의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콜러(Kohler),실험실의 역사에 대한 회고(2008)

   총평 : 콜러는 1960년대 이후 과학사에서 실험실에 대해 다루었던 것에 대한 전반적인 조망을 하면서, 최근의 과학사에서 실험실이 거의 주목받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짧은 글이었고 나의 흥미를 크게 끌지도 못했으며 그다지 재미도 없었다.

  

   부분적 메모 : 연구실/실험실에 대한 연구가 70~80년대에 활발했다가 지금은 사그라들었다. 왜 그럴까? Historians seem no longer curious about how the conventions of laboratory life embody those of other important social institutions (court, state, market, media) and how they in turn shape public meanings of knowledge in general. ...because laboratories are so integrally a part of their times and places, lab history is of necessity also social history... 사회적 기관으로서의 현대적 실험실에 대한 체계적인 역사 서술이 필요하다. 실험실의 인식적이고 사회적인 권위(authority)가 중요한 주제가 된다.

  

   현대적 실험실의 특징인 무장소성(placeless)은 실험실 지식의 전파 가능성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현대적 실험실의 힘은 실험실이 세계 속에 전파하는 지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Bruno Latour의 견해. 실험실 과학의 힘은 강력한 사회적 엘리트에 대한 믿음의 논리로부터 비롯된다는 Steven Shapin의 생각. As the middle class became a dominant class, so did labs and lab sciences become dominant institutions... (768) ...the analytic categories and practices of lab science were congruent with the new managerial hierarchies and procedures of large-scale industrial capitalism, whereas those of the older shop culture were not... (768)

 

홍성욱,과학적 전기공학의 형성 : 존 암브로스 플래밍과 페란티 효과(1995)

   총평 : 19세기 말에 영국에서는 도시에 대규모로 전력을 공급하는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전기공학의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저자에 의하면 당시 영국의 전기공학을 담당하고 있던 공학자들은 전신공학자(telegraphic engineers), 전력공학자(power engineers), 과학적 전기공학자(scientist-electricity engineers)의 세 부류로 나뉘었다. 초기에는 전기공학자들 사이에서 전신공학자들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전력공학자들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런데 대학에서 과학적 전기공학자들이 전기공학자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고, 이른바 페란티 효과라고 알려진 현상에 대한 논쟁을 과학적 전기공학자 중 하나였던 플래밍이 마무리짓게 되면서, 이후 전기공학적 실천은 과학적 전기공학자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간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에 의하면 플래밍(Fleming)과 스윈번(Swinburne) 사이의 논쟁은 이론 대 실천사이의 논쟁이 아니라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이론들, 실천적 이론 대 수리물리학적 이론사이의 논쟁이었다. 논쟁 이후 수리물리학적 이론이 논의의 주도권을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실천적 이론의 전통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음을 주목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부분적 메모 : Ferranti 효과에 대한 두 종류의 설명, Fleming의 설명과 Swinburne의 설명. Practicing Engineers versus Scientific Engineers. 과학자-엔지니어의 승리. telegraphic engineers power engineers vs scientist engineers. 과연 전력을 다루는 데 있어 이론이 중요한가 경험이 중요한가? 1880년대의 상황 변화 (1) 전기 기계의 규모 확대 : 이론과 경험적 자료에 기반한 합리적 설계가 필요해졌다. (2) 교류 사용의 증가 : 관련 이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전류와 전압 사이의 위상차 문제. 전력 기술자들은 이 문제를 자신들만의 경험으로 해결하려 했다. 두 이론 사이의 대립 : 과학적 이론 대 실천적 이론

  

   Deptford에서의 발전소 건립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거리가 증가할수록 전구 밝기가 밝아지는(전압이 커지는) 현상이 발생(Ferranti Effect) 플래밍의 분석 성공적으로 해결됨. 그런데 이 현상에 대해 Swinburne이 다른 종류의 설명을 제시하고 이는 이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battle between a practical theory of armature reactions based on workshop experience with AC phenomena and a scientific theory of resonance derived from Maxwellian mathematics... (40) 플래밍과 스윈번은 페란티 효과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분석했다. 플래밍은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접근했고, 전압 상승을 제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스윈번은 잘 정의되지 않은 개념들을 수식에 적용하는 것을 비판했고, 플래밍 본인 또한 공명 이론으로 페란티 효과를 설명하는 데 남모르게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이후 페란트 효과에 대한 이론적 공방이 계속 진행되었다.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플래밍은 이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헤비사이드의 공식이 아니라 실험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는 실제적인 실험을 통해 공명에 의한 전압 상승의 효과가 스윈번의 주장보다 더 작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실험실과 현장 사이의 사이를 통제된 현장 실험을 통해 현저하게 줄일 수 있었다. 플래밍의 통제된 현장 실험 : ‘실험실을 현장으로’. 현장 실험의 결과는 armature 반응 이론을 반박하는 것도, 공명 이론을 특별히 지지하는 것도 아닌 것이었지만, 플래밍은 이 실험을 통해 학계에서의 신뢰를 얻게 된다. (48) +실험 자료와 수학 공식을 연결짓는 작업. 스윈번은 동의하지 않았으나 다른 전기기술자들은 플래밍의 실험을 통해 논란이 종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실험실 실험 + 통제된 현장 실험 + 실험 결과와 수식의 조합 수학 + 실험으로 대규모 전기 현상을 통제 가능하게 된다. 이후 scientist-engineer가 전력 생산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Fleming이 그 prototype이 된다. 플래밍과 스윈번의 논쟁은 두 종류의 이론 사이의 대결이었다. 이후에도 두 가지 전통이 공존했고 때로는 서로 합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에 기반한 이론이 주도적인 영역을 차지했고, 이는 19세기 말 scientist-engineer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갤리슨(Galison)/애스무스(Assmus),인공 구름과 실제 입자들(1989)

   총평 : 윌슨의 구름상자는 현대 입자물리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만 윌슨 본인이 입자물리학에 그다지 중요한 공헌을 하지는 않았다. 저자들은 윌슨의 그러한 측면을 주목하면서, 윌슨의 구름상자는 서로 상이한 두 가지 전통(형태학적 전통과 분석적 전통)이 결합한 산물로 태어났으며, 이후 응집물리학은 또다시 세 가지 전통의 학문(물리적 기상학, 기후학climatology, 입자에 대한 물질 이론)으로 나뉘어서 발전하게 됨을 주장한다. 이러한 서술은 과학의 형성을 바라보는 갤리슨의 입장을 반영한다. 갤리슨에 의하면, 서로 이질적인 과학적 전통들이 우발적으로 결합해서 하나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고, 이후 이 전통은 또다시 서로 이질적인 전통들로 나뉘어서 발전해 나간다. 갤리슨은 과학사에 있어 하나의 전통이 우위를 점한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전통들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독자적으로 생존해 나간다고 생각한다.

  

   부분적 메모 : 현대물리학, 특히 입자물리학에 있어서 구름상자의 중요성. 윌슨이 구름상자를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자물리학자가 아니었다. 구름상자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 모사실험(mimetic experimentation)은 기상학과 관련되기도 하고 입자물리학에 관련되기도 한다. 분석적 전통 + 모사적 전통. 역학/환원적 전통 + 자연사적/형태학적 전통.

  

   수학, 수학적 화학에 대한 반감(Luke Howard, Goethe, 형태학적 전통). 자연에 역학적/동역학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역학적/환원적 전통). 자연철학자들은 모형의 성공으로부터 가설적인 존재들에 대한 공준을 세우는 우를 범한다는 경고(형태학적 입장에서). 두 종류의 탐구를 병행해야 한다. 흄볼트주의자들은 자연을 실험실 또는 미분방정식을 통해 탐구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형태과학자들이 자연 발생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실험실을 사용하면서부터 새로운 물리적 기상학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기상학 또한 자연 현상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실험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본뜨기, 따라하기, 모사 실험에는 방정식이 필요 없었다.

  

   윌슨, 지도제작자, 흄볼트적 전통의 작업.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 사진촬영에 대한 관심. 윌슨은 미시세계에 카메라를 돌리기 전부터 자연현상을 촬영하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빅토리아 시기의 영국에서 자연을 촬영하는 것은 상당한 유행이었다. 자연에서 발생한 극적인 사건, 화산 분출(violent eruption of Krakatoa). 화산 분출에 대한 다양한 논란들이 있었고, 이 현상을 모사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빅토리아 시기의 영국은 자연의 극적인 모습을 재생하는 데 매료되어 있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따라하고자 하는 윌슨. Ben Nevis에서의 경험이(기상광학, 대기전기학) 윌슨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윌슨은 기상학에 관련된 질문들을 공책에 정리하기 시작한다.

  

   과포화된 공기에서 먼지 입자가 응결핵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애이트켄(Aitken)의 생각. 그는 기상학적 관심으로부터 먼지에 대한 연구를 실시했다. 윌슨은 분명 벤 네비스에서 애이트켄의 실험 도구들을 보았을 것이다. 윌슨은 애이트켄과 달리 걸러진 공기로 실험을 했다. 당시에는 전기적 속성을 띤 공기가 물방울을 응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어떤 조건 아래에서 자연의 극적인 현상을 가장 잘 재현할 수 있을까? 윌슨의 인공적인 실험실 조건은 애이트켄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윌슨이 캐번디시 스타일의 분석적 물리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온물리학의 영향. cathode 광선을 통해 물질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전통. 전기는 미소 단위의 입자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에테르 이론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톰슨은 전기입자이론의 옹호자였다. 윌슨이 자신의 논문을 출판하기 2년 전에, 톰슨이 전기화를 통해 물방울을 응집시키는 것에 대한 이론적 작업을 수행했다. 평소에는 강한 증기압 때문에 물방울이 형성되지 않지만, 비균질적인 전기장이 증기압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일으켜 물방울이 형성된다는 내용이었다. 윌슨은 자신의 실험도구를 가지고 매일 거듭해서 실험했다. 응축을 위한 확장 비율을 탐색한 것이다. 그는 분석적 물리학의 이론을 참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상학적 문제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러더퍼드와 톰슨은 뢴트겐 선이 가스를 전기화시키는 현상을 이온 이론으로 설명했다. 양이온과 음이온에 따른 필요 확장 비율이 다르다는 윌슨의 추측. 윌슨은 톰슨 이론의 기상학적 의의를 추론한 것이다. 윌슨은 캐번디시 연구소의 입자물리학 전통에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기상학에 있었기 때문이다. 윌슨의 추측 : 먼지 없는 순수한 공기가 이미 이온을 갖고 있고, 이 공기의 단열압축 과정을 통해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이온에 의해서 응결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톰슨은 구름상자를 환원적인 자연철학을 위해 사용했지만, 윌슨은 여전히 기상학적 문제와 씨름했다. 그런데 윌슨이 구름에서의 현상을 재현하는 데 있어 사진을 사용하면서부터 비 형성을 사진으로 찍는 것에 성공하고, 윌슨의 관심은 일시적으로 기상학에서 이론물리학으로 옮겨갔다. 구름상자(사진)는 물질의 내부 구조에 대한 탐구로 이끌었지만 정작 윌슨 본인은 기상학 문제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고, 천둥에 관한 역학적 설명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구름상자는 분석적 전통과 형태학적 전통이 접목해서 탄생한 잡종(hybride)이었다. 윌슨은 이온물리학을 이용해서 대기 현상을 설명하려 했지만 완전히 이온물리학 프로그램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구름상자가 입자 궤적을 탐지하는 도구로 사용되면서부터 이것이 이전까지 갖고 있던 기능이 변경되었다.

 

미트먼(Mitman),동물원이 자연이 되었을 때(When Nature is the Zoo)(1996)

   총평 : 동물원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들. 오스본의 경우, 기계화된 시대의 제약을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하면서 인간의 노력을 통해 자연을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스본은 사람들에게 자연이 줄 수 있는 숭고함과 미학적 느낌을 되살리려고 했다. 반면 머리는 자연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것, 자연을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생태 공원과 동물원이 생물학 실험실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면서, 점점 자연에 대한 공감적 접근보다는 객관적 접근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생태 공원, 동물원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갖는 감성의 변모를 잘 그리고 있는 좋은 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분적 메모 : 동물원에서 세계 곳곳의 동물들과 자연환경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에서는 차단되어 있던 자연과 만나는 장소가 된다. 역학화, 기계화된 시대에 자연은 오직 인간의 손을 거쳐서만 재생될 수 있다. Osborn, 자연에 대한 극단적인 두 관점을 종합하려 했다. 원초성에 대한 미학적 경험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동물원 이면의 인공성과 권력()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 개인이 숭고함이라는 미학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오스본의 목표였다.

  

   대규모의 동물원을 새로 건립할 계획, Wyoming. 원초적인 자연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D. J. Murie는 동물원 조성에 반대했다. 동물원 조성은 공원을 최대한 자연적인 상태로 유지하려는 현재의 정책에 어긋나는 것이다. 자연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은 Murie. 디즈니의 영화가 성공한 것은 감정의 차원에서 미적인 감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디즈니와 유사하게 릭(Leek) 또한 자연에 대한 독특한 경험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했고 대중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Murie는 상업주의와 거대 사회의 위험성을 경고.

  

   그러나 오스본은 생물학 연구실로서의 공원을 홍보했고, 끝내 자신의 주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점차적으로 감정적/미적 교감과 경험이 아니라, 마치 실험실의 탐구자와 같이, 어떻게 하면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가가 문제시되기 시작했다. Jackson Hole은 분석적인 실험실 탐구와 현장 탐구 둘 다를 제공해주게 되었다. Jackson Hole 야생공원에서 분석적 탐구와 종합적 탐구가 병행해서 시행된다. 교육 + 엔터테인먼트 + 레크레이션 + 연구 + 자연. Murie는 미학적 비전을 갖고 있었으나, Jackson Hole Park는 전후 세대의 생물학자들에게는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인공적인 요소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오스본의 입장. 그러나 미적 태도는 점차적으로 객관적인 태도로 바뀐다. 야생 생물학자에게 있어 개인적 태도(미학적, 공감적)와 전문가적 태도(객관적, 분석적)가 구분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Craigheads 형제의 경우. 미학적 관점이 대학과 대학원 교육과정을 통해서 초월적(transcendent) 관점으로 변한다. 현상, 관련 대상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는 관측자의 중요성. 양적 접근 > 질적 접근. 야생 생태를 더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현장 기술(field technology)에 대한 추구.

  

   색깔띠의 사용 : 동물의 여러 습성들에 대한 정량적인 분석이 가능해 짐. 먼 거리에서도 식별 가능. 그러나 동물들의 세세한 습성들을 파악할 수 있는 기법이 여전히 부재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사용되었던 감시에 관한 조작들이 자연사와 접목된다. 물리학적/공학적 기술의 도입으로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해지고, 연구자와 연구 대상 사이의 거리두기가 중요해진다. 동물 행동을 감시하기 위한 음성/전파추적 시스템을 개발 개별 동물들의 행위를 실시간으로 감지. 관측자료들에 대한 컴퓨터 분석이 요구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있어 인간의 자리가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자연을 감시하는 데 인간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획득된 이후 자연에 대한 적절한 통제가 요구되었다. 결론적으로, 동물원이 실험실이 되면서 야생 생물학자들에게는 초월적 관점, 미학적 관점이 서로 다른 측면에서 공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