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17: 화학 혁명과 프랑스 혁명

강형구 2016. 4. 27. 06:28

 

화학 혁명과 프랑스 혁명

 

  

라부아지에(Lavoisier),새로운 체계적 질서 속에서의 화학 원소

   총평: 라부아지에의 원문을 읽으면서 두 가지 측면에 눈에 띄었다. 첫째, 라부아지에는 과학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사실(fact), 개념(concept), 언어(langauge)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사실에 기반해서 이에 적합한 개념과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여전히 라부아지에는 열소(caloric) 개념에 의거해서 여러 종류의 열 현상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그의 화학 체계가 현대의 화학 체계와는 개념적으로 상당히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측면에 관해서는, 정확한 과학으로서의 화학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라부아지에의 야심 및 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측면에 관해서는, 현대적 화학 지식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열소 이론이 단순히 오류의 과학이 아니라 나름대로 상당한 체계를 갖추었던 이론이었고 당시 과학자들이 이 이론을 납득했던 이유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리과학의 세 구성요소는 사실, 개념, 언어라는 것(서문 14).

 

우리는 오직 사실 만을 믿어야 한다. 실험과 관측의 중요성(서문 18).

 

사실을 획득하기 전에 체계부터 세웠던 고대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서문 22).

 

자신이 제시하는 용어들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서문 26).

 

베이컨을 언급하는 경험주의적 관점(서문 36).

 

에테르와 칼로릭을 사용해서 화학적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10).

  

칼로릭은 탄성을 가진 유체라고 주장(18).

  

고체를 액체로, 액체를 기체로 바꾸는 데 필요한 칼로릭의 양을 계산할 수 있다(21).

  

칼로릭 입자들의 강한 접착력으로 인해 열 현상이 발생한다(24).

 

(Gough),라부아지에와 슈탈 혁명의 완성(fulfillment)

   이 논문에서 구는 라부아지에의 화학적 업적이 슈탈적인 화학적 전통과 완전히 분리되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슈탈적인 전통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당시에는 화학이란 물질을 구성하는 원리들의 분리와 결합에 관한 것이라는 일치된 견해가 있었다. 라부아지에의 체계에 대한 플로지스톤 이론가들의 반응은,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이전까지의 화학체계를 이루고 있던 질서가 흐뜨러트렸다는 것이었다. 라부아지에의 무게 측정 방법은 플로지스톤을 파기하도록 이끌었고, 라부아지에는 본질적인 원소들이 합성 이전과 합성 이후 질량이 같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화학과 관련되는 여러 문제들을 종결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라부아지에의 원소 분류는 물질의 물리적 특성이 아닌 화학적 특성을 기준으로 한 분류였다. 슈탈주의자들 또한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는 데 반대했고, 화학의 독자성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플로지스톤은 슈탈적 이론의 일부분에만 속하는 것이었다. 당시 화학자들은 물질의 고유 성질을 갖는 최소의 입자(물리적 입자가 아닌 화학적 입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물질은 화학적 친화성을 통한 조합과 응집으로 화학적 특성을 갖게 되며 응집적 친화성은 물리적 특성이므로 화학자의 관심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학자들은 물리적 특성과 화학적 특성의 구분을 강조하였고, 물리학은 물질의 피상적인 측면만을 다룬다고 주장하며 화학이 물리학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라부아지에 이전에 화학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은 슈탈적 이론의 영향이 컸다. 당시 금속은 물리적 특성을 갖는 것으로, 산은 화학적 특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탄산칼슘의 경우를 보더라도) 물질의 물리적 특성이 아닌 화학적 특성을 확인하는 데 있어 산이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화학자들은 금속의 물리적 특성을 규명하는 것은 화학자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라부아지에는 공기에서 물리적으로는 동일하지만 화학적으로는 서로 다른 요소들을 분리시키는 문제에 주목했으며(30), 이 과정을 통해서 결과적으로는 플로지스톤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라부아지에의 과학적 업적은 뉴턴/다윈 혁명에 비할 때 혁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페렝(Perrin),연구 전통, 라부아지에, 화학혁명

   총평 :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라부아지에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과학사가의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호감이 가는 논문이었다. 페렝은 라부아지에 업적을 혁명이다’, ‘혁명이 아니다라고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평가하기보다는, 그 업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여러 맥락을 참조해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새로운 종합, new synthesis)을 강조하고 있다.

  

화학혁명에 대한 새로운 종합을 시도하겠다(55).

  

반응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통해서 구성성분을 알 수 있다는 견해(58).

  

수증기가 질량 증가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72).

  

화학의 영역에 탐구 프로그램이라는 용어를 사용. 라카토슈의 용어법과 유사함(76).

  

라부아지에가 열을 불의 물질, 점화유체 등으로 부르다가 결국 칼로릭이라 부르면서 플로지스톤과 구분하는 과정(77).

  

화학혁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종합이 필요함을 다시 강조(79).

 

  

에시엣(Eshet),프리스틀리 다시 읽기 : 신학과 정치학의 교차로서의 과학

   총평 : 프리스틀리는 평등주의자였으며 국가가 개인의 신앙을 통제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물질과 정신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청년기에 그가 받은 급진적인 교육과도 관련된다. 그의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 때문에 보수파에 의해서 집이 불타버리는 경험을 한 후, 그는 자신의 사회적종교적 입장 때문에 영국을 떠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61). 프리스틀리의 철학이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논문이었다.

  

프리스틀리의 엄격한 유물론은 그의 사회-신학적 동기를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128).

  

물질과 사고가 완벽하게 구분되지는 않을 것이다(130).

  

프리스틀리가 물질-정신 이원론을 거부하고 엄격한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 데에는 사회-종교적 이유가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했다(132).

  

워링톤에서의 급진적 경험이 프리스틀리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135).

  

인간은 의식을 갖고 있으며 신의 뜻을 헤아리는 데 있어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 인간의 권리는 오직 진보(progress)를 위해서만 정부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는 생각(137).

  

물질과 힘이 분명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140).

  

힘은 물질의 자연적 속성이라는 것, 고체성/연장성/불가침투성 모두 일종의 힘의 결과라는 생각(143).

  

기독교 초기에는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지 않았으나 데카르트 이후 분리되었다는 프리스틀리의 생각(144).

 

리스킨(Riskine),과학과 혁명에서의 언어

   총평 : 화학혁명 및 사회혁명에 있어서 언어(용어법)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한 편에서는 규약적/중립적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사회를 자발적으로 개혁하려고 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언어보다는 경험이 중요하며, 언어는 진정한 경험을 하는 데 일종의 제약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체계에 대해서 반대했다.

  

베넬의 고전적 관점 : 용어들이 너무 인위적으로 명료해서는 안 된다. 화학을 위한 새로운 (심오한) 언어를 만들어 줄 파라셀수스가 필요하다(207).

  

물리학과 화학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져야 한다(208).

  

화학자의 언어는 문화적인 것이다(베넬) 사회적인 것이다(라부아지에)(209).

  

사실 혼자만 가지고는 적절한 용어를 만들 수 없다. 사회적인 규약이 필요하다(210).

  

언어적 규약이 의미에 앞선다(211).

  

로크는 언어를 통해서는 자연적 사물의 본질을 통찰할 수 없으며, 언어는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며 사회적인 일들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언어는 정확하다. 그런데 콩디약(Condillac)은 언어의 규약적인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사실을 파악하는 도구로서의 언어의 기능을 인정했다(212).

  

언어/사고/자연철학은 사회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 과학의 발전은 언어의 발전에 기인한다는 것(213).

  

라부아지에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문화적인 정체성을 반영하지 않는 중립적인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214).

  

화학명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구성되었다는 것, 임의적인 기호들의 규약적인 조합을 통해서 자연을 거울처럼 반영할 수 있다는 것(216).

  

용어들이 일종의 실험실 도구로 기능했다(217).

  

새로운 용어들이 기존의 언어와 다른 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견해(218).

  

언어에 대한 문화적 견해와 사회적 견해의 대립, 디드로는 언어가 인지의 원초적 질서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콩디약은 언어와 인지적 질서가 대비된다고 생각했다는 것(219).

  

용어법에 대한 반발(개혁은 천천히 이루어져야 한다), 프리스틀리는 언어가 일종의 전제군주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는 것(220).

  

과연 용어법이 공화국의 시민을 교육하는 데 이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대립된 의견(222).

  

단어들의 의미 및 질서가 시민들의 관념과 정치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언어적 행동주의자들(linguistic activists)의 견해(223).

  

경험중심론자들, 언어는 경험주의의 적이라는 견해(224).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교육에 있어 자연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됨(225).

  

과학의 성공은 제도의 독립성과 자유에 기인한다는 견해(226).

  

경제적인 단어들은 자연적 사실, 문화적 표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처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227).

  

독단적인 경험주의의 단점들을 지적한 콩도르세, 시에예스, 두하멜. 제도는 자연적 불평등을 줄이는 기능을 한다. 이후 콩도르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230~231).

 

알더(Alder),프랑스 기능공들의 전문가 되기 : 혹은 실적주의(Meritocracy)가 어떻게 객관적 지식을 만들었는지

   총평 : 프랑스 혁명 전까지 프랑스 사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실적주의와 객관적 지식의 개념이 형성되게 되었는지를 포병 군대를 모형으로 삼아서 서술하고 있는 논문이다. 섀핀, 셰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과학적 지식이 당시 등장하는 새로운 사회적 제도 및 집단을 위해서 어떤 방식을 통해 작동했는지를 정치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보여주는 논문이라고 볼 수 있다.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혹독하게 수학적 훈련을 실시했다는 것(1).

  

전문가/실적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각종 제도들이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2).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고 성과를 낼 수 있어야지만 성공한다(3).

  

프랑스의 군사기술자들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4).

  

프랑스 혁명 이후 수립된 사회적/인지적 위계질서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다(6).

  

이론적이 아닌 실제적인 인재가 필요, 포술전문가 양성학교 수립, 학교에서는 이론과 실제 둘 다를 가르쳤다(12).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에게 합의와 동의의 덕목을 심어주는 데 수학이 유용하게 작용했다(15).

  

수학이 사관생도를 평가하는 새로운 척도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16).

  

학교는 지식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할 또한 내면화시키는 기능을 한다(17).

  

수학의 내용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수학이 제시하는 태도 및 자세가 중요했다(18).

  

수학적 기법의 발달로 인해 포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되었지만(21) 사실상 그러한 기능적 공헌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합수학의 사회적/교육적 기능이 중요했다(23).

  

포병 군사전문가 집단의 새로운 위계질서가 혁명 이후 다른 영역의 새로운 질서 수립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29).

 

현대과학의 풍경 3,화학혁명

   총평 : 화학혁명에 대한 짧지만 균형잡힌 서술이다. 오늘날 화학적으로 통칭할 많은 실행과 개념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각기 다양한 맥락과 다양한 장소에서 생겨났다(79). 17세기의 시각에서 볼 때는 고대의 지식체계를 연구하는 일과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일 사이에 모순이 없어 보였다. 과학혁명을 정의하는 요소 중 하나가 당대의 지식을 개혁하고 재조직하려는 참여자들의 노력이라 한다면, 적어도 화학자들은 그러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었다(87). 화학자들은 뉴턴 종합의 외곽이 아니라 그 선두에 서 있었다(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