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20: 현대물리학과 원자폭탄

강형구 2016. 4. 30. 04:01

 

현대물리학과 원자폭탄

 

  

홍성욱, 이상욱 외뉴턴과 아인슈타인중 아인슈타인에 대한 장들

  

5: 아인슈타인, 영재였나 둔재였나(장회익)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314일 독일 울름에서 태어났고, 곧 뮌헨으로 이사가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우량아로 태어났고, 말 배우는 속도가 느려서 주위 사람들이 걱정했으나 2살 무렵이 되면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곧잘 했으나 유달리 눈에 띄는 천재는 아니었다. 무작정 외우는 것을 싫어했고, 군인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몸서리쳤으며, 단순한 계산보다는 논리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푸는 데 소질이 있었다. 또한 놀라운 집중력을 갖고 있었는데, 일례로 그는 카드로 14층의 건물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이는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9년제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김나지움에서 그는 수학, 과학, 라틴어 등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보였지만 암기과목들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의 성적은 상위권에 속했다. 사업상의 문제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이탈리아로 간 이후, 가뜩이나 김나지움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을 못마땅해하던 아인슈타인은 가족들과의 상의 없이 김나지움을 그만두고 이탈리아로 떠난다. 떠나기 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수학 실력을 인정해주던 수학 교사에게 찾아가서 수학 능력을 증명해주는 추천서를 한 장 얻는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지만 수학과 물리학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얻은 반면 암기과목 시험에서는 낙방했다. 아라우 칸톤 고등학교를 1년 동안 다닌 아인슈타인은 별도의 입학 시험 없이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아라우 학교에서의 아인슈타인의 성적은 최상위에 속했다.

  

   연방 공과대학에서의 아인슈타인의 성적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 양성과정에 속한 아인슈타인은, 중간 시험에서 다른 학생들을 제치고 1등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정규 교과과정에 대한 회의와 반감을 품고 주로 집에서 독학을 하고 베버의 실험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졸업 시험에서는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여동생 마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 : “때때로 나를 지탱해주고 나를 절망에서 이끌어내주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은, 나는 내 작은 능력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왔다는 것과, 그 어느 때나 내 공부를 위해 필요한 것 이외에 어떤 위락이나 탈선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44)

  

6: 빛과 시계 맞추기(이관수),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장

   밑줄 친 부분 정리. 매우 독립적인 성향을 지닌 아인슈타인은 당시 전자기학의 문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파악했다. 여기에는 발전설비업자 집안이라는 그의 출신 배경도 중요하게 작용했고, 특허국 심사관의 경험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150).

  

   19세기 초에는 빛 에테르, 전기 에테르, 자기 에테르, 열 에테르 등이 있어서 그것들의 운동이 각각 빛, 전기, 자기, 열 현상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152). 1860년대 무렵에는 보통 물질, 빛 에테르 그리고 전자기 에테르라는 세 종류의 물질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53). 전자기파를 예언한 전자기이론은 맥스웰의 이론 뿐이었기 때문에 헤르츠의 전파 발견은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이 옳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헤르츠의 발견으로 인해 세상에는 보통 물질과 전자기 에테르, 두 종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54).

  

   로렌츠의 수축 가설, 전자기 에테르 속을 빠르게 운동하는 전하를 띤 입자는 그 질량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인다(톰슨). 물질의 질량이라는 것 자체도 원래 질량이 없는 전자가 전자기 에테르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겉보기 현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추정... 질량과 중력도 맥스웰 전자기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155) ...전자기이론을 모든 물리학의 근본으로 삼으려는 전자이론은 대세가 되었다(로렌츠와 아브라함).

  

   결국 운동의 상대성이란 등속직선운동하는 관찰자들이 측정한 관찰값들은 다를지라도 그 숫자들 사이에 성립하는 상관관계(즉 물리법칙)는 동일하다는 뜻이 된다(159)...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회고 중 일부. “...빛의 속도로 운동하는 관찰자의 시점에서도 모든 현상이 지상에 정지해 있는 관찰자가 보는 것과 같은 법칙에 따라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직관적으로 분명해 보였다. 왜냐하면 (갈릴레오의 상대운동의 원리에 따르면) 빛의 속도로 운동하는 관찰자는 자신이 아주 빠른 등속운동을 한다는 것을 알거나 판단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뉴턴의 절대시공간 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비판하는 마흐의 태도가 아인슈타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163) 아인슈타인의 관심을 사로잡은 자석과 전기회로의 상대운동 문제는 헤르츠나 로렌츠의 책 같은 고급 교과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푀플의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었다(165). ...마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테르라는 용어의 도입은 대상의 물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그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빛을 포함한 전자기파의 속도가 변하는 현상이 관찰되지 않는다... 갖가지 광원에서 오는 빛의 속도가 제각기 달리 관찰된다면 일관성 있는 물리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진공 중에서 빛의 속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방향으로도 항상 일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170).

  

   일정한 빛의 속도19세기 후반부터 거듭된 실험을 통해 새롭게 확립된 엄연한 사실이었고, 갈릴레오 상대성은 무수한 경험을 통해 물리학의 원리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정지한 사람이 관측한 시간과 움직이는 사람이 관측한 시간이 똑같다는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 “결국 시간은 시계로 측정되는 것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173)... 상대운동의 원리를 지키기 위해 사용할 변환식은 갈릴레오 변환식이 아닌 다른 변환식이어야 한다는 생각(176). 막대기에 매달려 움직이는 사람이 보기에 막대기 양 끝에 달린 시계들이 같은 시각을 가리키게 조정하는 일은, 정지해 있는 관찰자가 보기에는 두 시계가 다른 시각을 가리키게 만드는 일이 된다(177). 플랑크와 그의 제자들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여러 가지 물리 현상에 적용하는 후속 연구들을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전자이론과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이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창조성. ‘유연하고 다양한 사고’. 쿤에 따르면 과학자의 창조성은 유연하고 다양한 사고와 교과서를 통해 숙달된 수렴적인 사고사이의 긴장에서 나온다(181)... 상대성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회고 중에서, “...몇 년 동안 해결책을 더듬더듬 찾아나간 뒤에야 비로소 근본적인 운동학적 개념들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어려움이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원리를 익힐 때마다 무수히 많은 사고실험을 반복했을 것이다... 첫째, 구체물을 이용한 시각화(운동학적 문제를 탐구하는 데 효과적). 둘째, 우아한 단순성을 추구. 셋째, 문제의 상황을 기본 개념 차원으로 환원하고 극한 상황에서 정합성을 점검. 넷째, 개념을 추상화하지 않고 경험으로 환원. 개념을 해당 물리량을 측정하는 절차로 바꾸어 생각하는 방식.

  

7: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가장 행복한 생각(김재영),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장

   일반상대성이론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착상에서 출발했으면서도 그 최종형태(수식)는 아주 난해하다. 그것도 처음부터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원리를 이용해 해결책을 만들 것인지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악전고투를 거쳤다.

   ...결국 갈릴레오 이래 물리학자들이 거론한 운동의 상대성은 운동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규칙이 있다는, 즉 운동법칙이 언제 어디서나 똑같다는 것을 뜻한다. ‘형식불변(form-invariant)’.

  

특수상대성원리 : 물리법칙은 모든 관성계에서 똑같은 꼴로 표현된다.

일반상대성원리 : 물리법칙은 (관성계만이 아닌) 모든 좌표계에서 똑같은 꼴로 표현된다.

동등성원리 : 가속되는 좌표계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중력이 만들어내는 효과와 구별되지 않는다.

  

   ...중력장 안에서 다른 모든 물체와 다르게 떨어지는 단 하나의 물체만 있더라도 그 덕분에 관찰자는 자신이 중력장 안에 있고 그 속에서 낙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험에서 매우 정밀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그런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찰자는 자신이 중력장 안에서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수단이 없다.

  

   ...원판 사고실험과 관련된 부분 : ...동등성원리에 따라 가속운동의 효과와 중력의 효과는 같으므로 중력의 영향을 받으면 원주율값이 달라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리저리 굽어 있는 곡선이라 하더라도 아주 작은 부분만 보면 직선처럼 볼 수 있기 때문에 곡선의 작은 부분의 길이를 나타내는 공식을 찾아낼 수 있다. 이를 수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이 좀머펠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제와 비교해볼 때 원래의 상대성이론(특수상대성이론)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리함수텐서를 결정하기 위한 방정식을 찾는 것이 문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들. 첫째, 중력의 효과와 좌표계의 가속이 나타내는 효과는 같아야 한다(동등성원리). 둘째, 물리법칙을 나타내는 방정식은 어떤 좌표계를 쓰는지와 무관하게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물리학적으로는 일반상대성원리, 수학적으로는 일반공변성). 셋째, 새로운 이론은 고전적으로 잘 알려진 과거의 이론을 특별한 사례로 포함해야 한다(즉 중력의 크기가 작다는 조건을 적용하면 중력법칙을 나타내는 새로운 방정식이 뉴턴의 중력방정식으로 변환되어야 한다). 넷째, 에너지보존법칙과 운동량보존법칙을 위배하면 안된다.

  

   ...드디어 19151125일 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물리학-수학 분과에서 쮜리히 노트에서 설정한 네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중력장방정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성공적으로 발표했다(215).

  

   일반상대성이론과 창조성. 첫째, 1916년 논문은 오랜기간 악전고투를 통해 조금씩 전진해서 완성한 것이다. 둘째, 중력과 관련된 새로운 관찰 사실이 전혀 없었다. 셋째, 본격적인 협동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넷째, 작업방식이 변화했다(고도의 전문적인 수학을 사용). 창조적 업적을 위한 지침들. 첫째, 성공과 성공의 목적을 구별한다. 둘째, 단계적으로 집중한다. 셋째, 뚜렷한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학습한다. 넷째,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협동작업을 한다. 다섯째, 오류를 인정하고 과감히 변신한다.

  

   아주 짧은 평 : 장회익, 이관수, 김재영의 글들은 매우 잘 쓰여졌고 잘 다듬어진 글들이다. 상대성이론에 관해 이 정도 수준으로 논의한 글들을 국내 저서들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특허국 심사원으로서의 아인슈타인 : 시계 조율과 특수상대성이론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 아인슈타인의 시계들 : 시간의 장소)

  

   쉴릅(Schilpp) 박사가 편집했던 살아있는 철학자 총서 씨리즈에는 화이트헤드, 버트런드 러셀, 싸르트르 등과 더불어 물리학자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책의 제목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철학자이자 과학자(philosopher-scientist)’였다. 아인슈타인은 평생 동안 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4살 때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던 막스 탈마이로부터 칸트의 책을 소개받은 후, 칸트의순수이성비판은 그가 평생동안 거듭해서 읽은 책이 되었다. 그가 흄의 회의론적 경험주의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올림피아 아카데미시절 독서 목록에는 존 스튜어트 밀과 에른스트 마흐, 앙리 뿌엥까레의 저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러셀의 인식론에 관한 자신의 평을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고, 그가 이론물리학의 본성에 대해 쓴 글들을 보면 이들은 순수하게 물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전반기를 풍미한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철학이 아인슈타인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결정적이다. 비엔나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모리츠 슐릭은 상대성이론의 물리학이 갖는 규약적 성격에 대한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으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논리경험주의를 대표하는 루돌프 카르납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는 다름아닌 공간이었다. 카르납과 버금갈 정도로 논리경험주의 운동을 앞서서 이끌었던 한스 라이헨바흐의 초창기 철학적 작업들은 모두 상대성이론의 인식론적 의미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철학자들에게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이라기 보다는 물리학을 하는 철학자였다. “20세기의 진정한 철학자들은 다름아닌 수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이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수학자인 러셀이나 화이트헤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을 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로도 생각했다.

  

   갤리슨은 이와 같은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의 상()특허국 심사원으로서의 아인슈타인으로 바꾸어 보고자 한다. 갤리슨에 의하면, 특수상대성이론에 등장하는 시간 조율의 개념이 오로지 이전까지의 절대적 시간 개념에 대한 철학적 비판에서부터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당시에는 서로 다른 철도역 사이의 시각을 맞추는 것,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들 사이의 시각을 조율하는 것 등과 같은 시간 조율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정치경제적 의미를 갖고 있었고, 이와 관련된 특허를 출원하고 승인을 받는 곳이 다름아닌 스위스 특허국이었다. 출원된 여러 종류의 특허 신청서들을 검토하고 그 합당성 여부를 평가하는 것이 특허국 심사관이었던 아인슈타인이 맡아야 할 주요 업무였으며, 그러한 업무를 통해 아인슈타인은 빛 신호를 이용해 시각을 맞추는 시간 조율의 여러 방식들에 익숙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갤리슨은 당시에 시간 조율의 문제가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었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휘트스톤 등을 비롯한 발명가들은 떨어져 있는 시계들을 하나의 중앙시계에 묶는 전기식 분배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1890년대에 이르러 스위스에서는 100개의 시계가 함께 줄지어 동작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참모총장이었던 폰 몰트케는 철도 운영, 군대 운영 등에 있어서 시간 통합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당시 유럽에서는 좀 더 정교한 시간 통합, 시간 조율의 기술적 방식을 고안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전기정밀시계를 고안한 것으로 데이빗 페렛(David Perret)과 파바르게르(Favarger)가 유명했으며, 이 밖에도 스위스 특허국에는 원격 알람, 원격 진자 조절, 전화 방식의 시간 전송, 다른 시간대의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 등등 시간 조율과 관련된 각종 특허 출원들이 제출되고 있었다.

  

   20세기에 이르면 경제, 정치, 군사활동에 있어서 같은 척도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사회적 삶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대규모의 상품 거래를 하거나, 정해진 시각과 장소에서 정상급 회의를 진행하거나,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군대들이 결집하는 데에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의 집단들이 같은 척도의 시간을 공유해서 행동해야지만 상대방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계획된 일들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당대의 기술적이고 실천적인 요구들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특허국이라는 현장에서 직접 체험했으며, 이러한 체험은 아인슈타인이 고전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갤리슨의 주장이다. 특허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과 관련된 몇몇 결정적인 착상들(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만족할 만한 방식으로 수립될 수 없다는 생각, 에테르는 불필요한 물리적 개념이라는 생각 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다루는 문제를 직접적이고 집중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의 조율 개념을 문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 시간의 조율 개념을 토대로 고전물리학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당대의 다른 물리학자들(로렌츠, 푸앵까레, 아브라함)과 아인슈타인 사이의 중요한 차이였다. 따라서 로렌츠, 푸앵까레, 아브라함 등은 수학적으로는 아인슈타인과 유사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처럼 물리학을 기술하는 기본적인 틀을 혁신하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절대적인 방식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시간과 신호의 속도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파악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절대적인 시간 개념을 결정적인 방식으로 수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순수한 이론물리학적 의미 외의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서로 다른 장소에서의 시각을 정확히 조율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당시의 유럽 전역을 괴롭히던 기술적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논문은 물리학 논문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특허 출원 논문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갤리슨은 당시 물리학계의 대표 잡지였던물리학 연보에 실렸던 다른 논문들과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비교하면서, 특허 출원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아인슈타인 논문이 보여주는 독특한 특성(거의 등장하지 않는 참고문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독일 제국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극심하게 비판해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특수상대성이론의 기술적 의의는 일견 역설적이다. 이 이론은 독일 제국의 시간 통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는 별도의 중앙 통제 시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시계가 서로 동등하기 때문에, 폰 몰트케의 꿈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갤리슨은 논문 막바지에 이르러, 과학사 서술에 있어 관념론적 역사 서술과 맹목적인 유물론적 역사 서술 모두를 비판하면서, 형이상학적 관념 속에서도 물질적 조건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물질적 조건 속에서도 그 조건을 잉태한 형이상학적 관념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갤리슨 자신의 말대로 그는 철학적 혁신가로서의 아인슈타인의 면모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대의 물질적 배경 조건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 수립 당시에 아인슈타인이 시간 조율에 관련된 숱한 특허 출원들을 다루던 특허국 심사관이었다는 사실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수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것이 갤리슨의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는 갤리슨이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논문 전반을 통해서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특수상대성이론이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 물질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것은 이 이론에 대한 하나의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특수상대성이론을 좀 더 정확하고 제대로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여전히 이 이론에 대한 물리학자나 과학철학자의 설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마 물리학자, 과학사학자, 철학자는 특수상대성이론이 형성되는 데 관련된 여러 요소들 중 어떤 요소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대답들을 제시할 것이고, 이 물음과 관련된 몇몇 지점들에서 의견 충돌을 보이며 서로 대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각자가 속한 관점에서 특수상대성이론이라는 과학적 업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면, 이러한 관점들 중 어떤 관점이 옳고 그른지를 단순히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폴 포만(Forman),바이마르 시대의 문화, 인과율, 양자이론 1918-1927(1971)

   윌리엄 톰슨, 어니스트 러더포드, 닐스 보어, 아르놀트 좀머펠트는 고전적인 양자이론을 대표하는 물리학자들이다. 특히 보어와 좀머펠트는 고전 양자론의 정점에 서 있었다. 원자에 대한 보어의 모형은 혁명적인 측면이 있었지만(전자 궤도의 양자화), 보어 모형은 태양계의 유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어의 지대한 영향을 받으면서 연구했던 하이젠베르크는, 물리적으로 직접 측정할 수 없는 물리량에는 어떤 의미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면서(하이젠베르크 본인에 의하면 이런 태도가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토대가 된 철학적 태도였다) 양자적 현상을 기술하는 데 있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역학을 창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행렬역학(Matrix Mechanics)이다. 이후 드 브로이의 전통을 잇는 슈뢰딩거가 파동역학을 창시했고, 파동역학과 행렬역학은 수학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이 슈뢰딩거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랙은 양자역학을 수학적으로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이부분과 전체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 이후 독일 젊은이들은 이전까지 독일을 지배해오던 질서에 대한 반감을 가졌고,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축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전통에 대해 도전하는 젊은 하이젠베르크의 태도는 새로운 역학을 수립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포만은 이 가능성을 더욱 더 확장시킨다. 그는 양자물리학에서의 변혁 자체가 당시 사회에 팽배해 있던 기계론적, 결정론적 물리과학-특히 이론물리학과 수학-에의 적대감에 대해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음을 주장한다. 물론 포만의 이러한 주장에는 다소 과격한 측면이 있으며,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가 양자역학을 형성하는 데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는지를 세부적으로 규명할 부담을 가진다.

  

   부분적 발췌 : 외적 영향이 물리학자로 하여금 비인과론적 양자역학을 열렬하게 바라고,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기꺼이 받아들이게끔 하였다는 주장(318). 패전후의 바이마르 시대의 학문세계를 풍미했던 지적 경향이 신낭만주의적 실존주의의 생의 철학’-위기를 마음껏 즐기는 풍조, 분석적 합리성에 대한 일반적 반감 그리고 정밀과학과 이들의 기술적 응용에 대한 적대감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이었다는 것을 보였다(319)... 이 고도로 전문화된 과학자사회가 적대적인 지적 환경에 대처해 가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적응의 경향이 이데올리기의 차원에만 한정되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를 넘어서서 과학 자체의 실질적인 학문적 내용에까지도 미쳤던 것일까? ...당시의 물리학자가 대중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시키려고 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과율, 그리고 물리학적 자연관에 있어서 가장 널리 혐오되었던 특징이었던 엄격한 결정론을 제거해야만 했겠기 때문이다(322).

  

   ...그들은 자연과학을 그 당시 사람들이 처해 있던 세계적 위기의 원인으로 취급했으며 그 위기와 밀접히 관련된 지적/물질적 비참함 역시 모두 자연과학의 탓으로 돌렸다(325)... 오히려 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들이 상대성이론에서 오늘날의 반합리주의적 경향에 대한 지주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유별나게 역설적이라고 느꼈다(326)... 합리적 세계질서에 대한 신념은 전쟁이 끝나고 연합국의 뜻에 의해 평화가 정착되어진 방식으로 말미암아 뒤흔들려졌으며, 그 결과 사람들은 비합리적 세계질서에서 구원의 길을 찾게 되었다(327)... 이 생의 철학(실존주의는 생의 철학의 한 분파에 불과하다)을 루카치는 독일의 제국주의 시기 전체를 통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보며, “전후에 널리 읽힌 부르조아지의 세계관에 관한 문헌은 거의 전부가 생의 철학적이었다고 말한다(329)... ‘숨막힐듯한 결정론에 대항하는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비-돌일인의 출처로서 앙리 베르그송... 의미가 있는 질문은 교육받은 대중들 자신이 물리과학자와 그의 세계관에 대해서 어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론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인과론자로서의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부정적 가치평가를 낳았던 것이다(332).

 

존 헨드리(Hendry),바이마르 시대의 문화와 양자적 인과율(1983)

   포만 명제에 대한 여러 측면에서의 비판, 헨드리는 포만이 물리학 내적인 요인을 거의 무시하고 당시의 환경의 영향만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포만의 첫 단계, 바이마르의 지적 환경이 물리학, 특히 인과율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 둘째,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의 이러한 환경에의 적응을 증명하는 것. 셋째, 물리학에서 인과율의 개념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

  

   그러나! ...따라서 바일의 생각과 바이마르의 환경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지만, 관념들의 근원에 있어서건 그 수용에 있어서건 분명한 인과적 연결은 쉽게 주장될 수 없다...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이 당시의 환경의 힘들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다는 사실... 정밀과학 분야들의 내용에 있어서의 어떤 적응도 시사하지 않으며, 가치의 적응이라는 것조차도 오해를 유발시킨다... 인과율에의 도전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반응이 환경에의 적응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환경으로부터의 격리의 경향까지도 있었다는 것이 드러날 것...

  

   ...다윈은 분명히 인과율에 대한 압력을 의식하고 있었는데 이 압력은 아직은 양자이론의 문제들과 파라독스들에 의해 생겨난, 거의 전적으로 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논의로부터 이미 우리는 인과율에 대한 그의 거부가 비록 근본적으로는 경험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저인 결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적 문제들의 복합체 속에 뿌리박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과율을 가지고 독일의 물리학자들을 양분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어쩔 수 없이 다소 임의적인 것이다... 파울리를 제외하면 물리학자들은 단순히 그 이론과 연관된 전문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 여부에 따라 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환경에 대한 독일 물리학자들의 반응은 적응이라기보다는 격리 쪽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며, 양자이론에서의 인과율에 대한 반응은 주로 내적인 고찰들에 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한 포만의 생각은 실제로 아주 강한 것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그가 제시한 감정적이고 가치가 개입된 예들에 대한 논의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315)... 그러나 다른 한편 포만의 논문은 순전히 외적으로 다루는 데 내재하는 위험들을, 그리고 모든 소박한 사회적 환원주의가 지니게 되는 빈곤성을 또한 보여주었다... 우리는 아직 어떤 영향들이 가장 중요한가에 대해 논하지 말고, 먼저 여러 영향들이 어떻게 서로 결합하고, 서로 침투하고, 서로 함께 작용했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주었다(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