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22: 냉전 시대의 과학

강형구 2016. 5. 2. 06:41

 

냉전 시대의 과학

 

  

코헨콜(Cohen-Cole),창조적인 미국인: 냉전 살롱, 사회과학, 현대 사회를 위한 치료

헤이엑(Heyck),혁명의 후원자들 : 전후 행동과학 기관들과 그 이상향들(ideals)

하운셀(Hounshell),냉전, RAND, 지식의 생산, 1946-196

위어트(Weart),지구 온난화, 냉전, 연구 계획들의 진화

슬로텐(Slotten),인공위성 커뮤니케이션, 지구화, 냉전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전쟁과 과학은 이전시대보다 더욱 더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기계화되고 과학화 된 전쟁무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다수의 과학자들이 전쟁 수행에 직접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에는 전쟁에서 사용된 기술적 지식들의 몇몇 요소들이 사회의 지식 체계 전반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싸이버네틱스의 경우). 또한 2차 대전 이후 미국 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립구도가 형성되면서 냉전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 냉전 시대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치열한 군비 경쟁이 지속된다. 냉전 시대와 더불어 군산학 복합체의 합동 연구도 활발히 이어졌고, 이러한 연구들은 당시의 사회문화 뿐만 아니라 몇몇 학문들(양자 전기공학)의 본질적 특성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위의 다섯 논문들은 냉전 시대에 일어난 과학과 군사 기술 및 당대의 사회문화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논문은 각각 2009년과 2006년에 출판된 논문으로서 냉전 시대의 과학을 바라보는 비교적 최신의 관점을 담고 있고, 나머지 세 논문들은 냉전 시대의 과학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에 입각해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코헨콜의 논문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코헨콜에 의하면, 전후 미국의 행동과학은 심리학적 특성을 강하게 나타냈으며, 행동과학자들은 특정한 심리학적 특성들을 기준으로 권위적-획일적-공산주의적인 사람과 창조적-자율적-독립적-자본주의적인 사람을 구분하려고 했다. 행동과학이라는 과학은 단순히 학문적 차원에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냉전 시대인 당시에 타자들과 우리들에 대한 표준적인 구분 기준을 사회에 제공함으로써 미국 사회 구성원들을 통합했고, 더 나아가 미국 사회에서 바람직한 개인의 모습 및 공동체의 모습 또한 제시했다.

  

   미국의 지배적 지식인 계층은 세계대전 이후 복잡하고 거대해진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심했다. 그들의 목적은 미국을 건전한 다원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전문성 또한 포기할 수 없었다. 미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전문적이면서도 획일적이지 않은 다원주의적인 신념 체계를 갖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우선, 행동과학에서는 미국이 자유를 대변하고 소련이 획일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 지성적 자유 혹은 자율성(autonomity)의 유무가 두 국가 사이의 가장 큰 차이임을 내세웠다. 심리학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이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심리학적 행동과학에서는 동일성 및 획일성과 대비되는 창조성(creativity)을 내세웠으며,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원주의 미국 사회에서 개별 구성원들의 자율성과 결속을 보장하는 것은 다름아닌 창조성이라는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이고 질병과 비슷한 천재성과 달리 창조성은 정상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창조성은 양육 혹은 학습될 수 있는 덕목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심리학적 행동과학은 어떤 특징들이 창조성을 표현하는 특징들인지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지만, 이러한 연구는 일정 부분 순환적일 수밖에 없었다. 행동과학자들은 미리 바람직한 개인의 상, 바람직한 조직의 상을 선정해 놓은 다음, 그 상들 속에서 중요한 특징들을 추출해냈기 때문이다. 행동과학자들이 제시한 창조적 사람들은 다름아닌 그 자신들의 특성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학계(academy)는 창조적인 개인들이 모이는 이상적인 집단으로 형상화되었다.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개인들이 학회에 모여 활발하게 토론하고 협동작업을 하는 것은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이상적인 집단으로서의 지식인 집단은 창조성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이었다. 창조성은 사회적 접착제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간학문성은 서로 다른 학문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협력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 때 모호함 혹은 애매함(ambiguity)에 대한 관용이 필요했다. 코넌트(Conant), (Kuhn) 등은 이상적인 시민집단에 대한 범례로서 과학자 공동체를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의 저녁 파티는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이 여러 주제에 대해 폭넓게 얘기하는 장소를 제공했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변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더불어(베트남 전쟁, 반전평화운동 등) ‘창조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 헤이엑의 논문을 보자. 헤이엑은 전후 행동과학의 양상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초기의 행동과학이 문제 해결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간학문적인 연계를 중요시했으며, 프로젝트 성립에 있어서 브로커의 역할이 중요했다면, 후기의 행동과학은 분과학문 사이의 경계가 뚜렷했고, 생물학적 치료(therapy)가 중심이 되었으며, 프로젝트 허용 여부를 심사하는 형식적 절차가 존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브로커의 역할이 감소되었다는 것이다. 헤이엑에 의하면, 위와 같은 현상은 전후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과학의 후원 양식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기의 행동과학은 과학성을 중요시했고, 행동과학의 수학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복잡다양한 인간과 인간 집단의 행태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수학 이론, 경험적인 실험 데이터 및 서로 다른 학문을 전공한 전문가들 사이의 협동 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플러드(Flood)와 사이먼(Simon) 같은 브로커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학자들을 모았으며 프로젝트를 위한 재정 지원을 따냈다. 행동-기능적 접근의 채택은 사회과학을 수학화시켰다.

  

   반면 후기의 행동과학은 기초적 사회과학과 응용 사회과학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분과학문들 간의 경계를 뚜렷하게 했다. 초기 행동과학자들이 대규모의 개체들로 구성된 체계들의 통합성, 조직성, 안정성을 유지하게 하는 기제(메커니즘)를 연구했다면, 후기 행동과학자들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기반한 합리적 선택 이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초기 후원을 대표하는 기관이 포드 재단(The Ford Foundation)’이며, 후기 후원을 대표하는 기관이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NIMH)이다. 포드 재단에서는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한 수학적, 행동과학적, 간학문적 연구를 지원했다. 또한 행동과학 연구자를 육성시킬 수 있는 최고의 교육기관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런 목표는 CASBS로 구체화되었다. NIMH에서는 포드 재단과는 달리 정신의학적 치료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으로 하운셀의 논문을 살펴보자. 이 논문은 냉전 시대에 과학과 기술이 국가 안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냉전 시대의 과학을 바라보는 고전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포만(Forman)의 경우 정부의 재정지원 방식이 양자 전기공학의 특성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고, 국가안보정책이 미국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학자들 사이의 논란도 존재한다.

  

   Research ANd Development(RAND)는 세계 대전의 경험으로부터 구성된 연구기관이었다. 미 공군에 소속되었던 아놀드(Arnold) 장군은 세계대전을 통해 군산학 협동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RAND는 그러한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단체였다. RAND에서는 지적 호기심과 독립성을 강조했으며, RAND의 핵심 과제는 체계분석(system analysis)이었다. RAND 연구자들은 컴퓨터에 기반한 강력한 체계분석을 통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과학을 완성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초기 이 분석이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패를 보인 이후, 연구자들은 문제의 영역을 좁히려고 시도했고 이러한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RAND의 이러한 연구는 분석적 방법론을 미국의 다른 지식 영역에 광범위하게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RAND커뮤니케이션 및 감시기술(reconnaissance) 연구를 수행했으며,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에도 관여했다. 또한 원자폭탄이 어떤 환경적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불확실성 속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을 위한 분석적 방법론을 개발했으며, 이런 방법론을 개발하는 데에는 모르겐슈타인 및 폰 노이만의 게임이론 및 컴퓨터 기술이 사용되었다. 애로우(Arrow)의 경우는 미국-소련 관계에 게임이론을 적용시키기도 했다. 기술의 발전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RAND에서는 점차적으로 거시적 문제가 아닌 세부 사례 문제들을 연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RAND에서는 인공지능 연구를 통해 인간 의사결정 과정의 인지적 차원을 밝히려고 했다(Simon).

  

   즉 RAND이라는 연구기관은 국가의 안보라는 국가정책적 차원의 목표를 갖고, 당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지적/물질적 자원을 활용하며 연구를 수행했다.

 

   위어트는 진화론이라는 이론틀을 갖고 온실효과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분석하고 있다. 이 때 위어트는 주로 물질적(재정적) 지원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위어트는 재정지원과 전지구적 정치학이라는 사회적 요소들에 의해 과학 연구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우선 위어트는 과학적 개념이 발전하는 모습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는 다윈 이론에 입각해서 지구 온난화 연구가 어떤 사회적 환경 속에서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겠다고 한다.

  

   초기에는 이산화탄소의 증가가 지구의 온난화를 가져오는지의 여부가 논란의 대상이었다. 아레니우스와 칼렌다는 이산화탄소 때문에 지구에 심각한 기후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산화탄소에 의해 흡수되는 장파장 복사는 대기 중에 존재하는 수증기에 의해서 흡수되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다는 반론으로 인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역사 이전 시대에 대한 지질학적 측정 결과 지구가 여러 번의 급격한 기후 변화를 겪었음이 확인되었지만, 이 또한 아주 오랜 주기의 현상으로 취급되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칼렌다의 경우에는 자신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해 연구 보조금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후 냉전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군 조직이 과학 연구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담당하게 된다. 군에서는 다양한 기후적 환경이 군사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세부적으로 조사하기를 원했다. 적외선 기술은 전쟁 기간을 통해 발달했다. 이산화탄소로 인해 어느 정도로 대기의 온도가 올라가는지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전기 컴퓨터가 필요했는데, 폰 노이만의 경우 컴퓨터를 이용해서 기후를 예측하고 변화시키려 했다. 플라스(Plass)의 경우 기후 변화가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을 하기는 하였으나, 몇 세기가 지난 이후에야 그러한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생각했다.

  

   기후에 대한 연구는 인류학, 고고학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Revelle의 경우). 하지만 이 때까지도 이산화탄소로 인한 기온 상승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이를 확실히 밝힌 것은 킬링(Keeling)이었다. 킬링이 이 사실을 밝히는 데에는 그의 순수한 지구화학적 관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기후 탐사는 주된 목적이 아닌 부수적인 목적이었으며, 군이 재정 지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온실효과 연구가 등장하게 된 데에는 우발적인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슬로텐의 논문을 보자. 이 논문의 핵심은, 전후 냉전시대에 위성 커뮤니케이션이 세계화와 더불어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미국 중심의 질서 유지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 위성 커뮤니케이션은 세계화적 기능과 냉전 시대의 정치적 입지 유지의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의사소통수단의 발전 또한 세계화에 중요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는 광역전송기술에 있어 미국이 소련에 뒤져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미국 정부에서는 우주 탐사가 비서구권 국가들에도 이익이 됨을 보여주어야 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대규모의 재정 지원을 감수해가며 우주탐사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국가 정책의 차원에서도 커뮤니케이션 체계가 중요하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개인, 기업들이 공동소유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가? 미국은 텔레비전을 통해 교육 뿐만 아니라 소련의 선전에 대항하려는 목적 또한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하는 데에 미국은 성공한 반면 소련은 실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