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가까운 듯 먼 사이: 갈릴레오와 근대 역학

강형구 2016. 5. 5. 05:42

 

가까운 듯 먼 사이 : 갈릴레오와 근대 역학

 

살비아티 : (물체의 낙하 속도가 움직인 거리에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사그레도에게) 내 동료인 자네가 이런 실수를 범하다니 내겐 오히려 위로가 되는군.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이 글쓴이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성질들이 하도 그럴 듯해 그 사람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고 시인하더군.

 

1. 여는 말 : 갈릴레오에 대한 세 가지 물음

 

   코이레(A. Koyré)의 논문에서 갈릴레오(Galileo)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주의에 대항해 승리한 플라톤주의자(Platonist)로 등장한다. 비록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부르노(Bruno), 케플러(Kepler) 등이 기존의 우주관과는 다른 새로운 우주관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물체의 운동을 기하학적 공간에서 표상하고 그것을 양적으로 분석한 것은 다름아닌 갈릴레오였다. 갈릴레오로 인해 이전까지 지배해오던 질적인(qualitative) 세계상이 기하학적이고 양적인(quantitative) 세계상으로 대체된다. 이것은 일종의 혁명이었으며, 갈릴레오는 그 혁명의 최전선에 서서 그 혁명이 일으킬 새로운 변화를 분명하게 예상하고 있다. 코이레의 갈릴레오는 근대 역학의 영웅이다. 그의 갈릴레오는 근대 역학의 손을 붙잡고 그것을 미래로 이끌고 있다.

  

   갈릴레오의 과학을 집대성하고 있는 두 권의 책이 있다.대화는 그가 68세 때,새로운 두 과학은 그가 74세 때 출판된다. 어쩌면 위의 두 책에서 등장하는 노년의 갈릴레오는 코이레의 말처럼 근대 역학의 바로 앞에 서서 근대 역학의 손을 붙잡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과연 처음부터 갈릴레오는 근대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는가? 그는 처음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처음부터 자연의 수학적 조화에 대한 플라톤적 믿음을 근거로 지상계의 운동을 분석했는가? 그는 처음부터 운동에 있어서의 물리적 상대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는가? 만약 이 모든 처음부터의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긍정이 아니라면, 그는 무엇을 근거로, , 어떻게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과 싸웠는가?” 이런 물음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갈릴레오의 과학 그 자체에로, 그것이 발전하게 된 역사적 과정 속으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옹호하는 저서대화로 인해 1633년에 종교 재판소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는다. 이른바 갈릴레오 사건이라 불리는 이 유죄 판결은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기존의 종교적 세계관과 대결했던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사건으로 인구에 회자되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근대 과학의 선구자로서의 갈릴레오를 기억하고 있다. 이렇듯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에 대한 옹호로 가장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의 천문학은 그의 과학들 중에서 크게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Thomas Kuhn)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새롭게 제시한 천문학 체계를 궁극적으로 완성하는 이후의 수리천문학자는 갈릴레오가 아니라 케플러다. 쿤에 의하면 갈릴레오의 망원경 및 이를 통한 천체의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당시의 많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이는 천문학 혁명을 사회적으로 전파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새로운 천문학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천문학은 기존까지 존재했던 주전원(epicycle)들을 타원 궤도의 도입을 통해서 제거한 케플러에 의해서 완성된다.

  

   또한 비아지올리(Mario Biagioli)에 의하면, 비록 수리천문학자로서의 갈릴레오가 진심으로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믿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토스카니 궁정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극단적이고 적극적으로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옹호하게 되었고 끝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비아지올리에게 있어서 코페르니쿠스 주의는 코시모 2(Cosimo )와 결부되는 천문학적 발견들 및 과학자에 대한 당시의 후원제도라는 정치사회적 맥락을 통해서 갈릴레오와 연관된다. 쿤과 비아지올리 모두에게 갈릴레오는 능숙하고 유능한 천문학자였을지는 몰라도 새롭고 혁신적인 천문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과연 갈릴레오의 독창적인 과학에 있어 코페르니쿠스 주의는 핵심적인 것이 아닌 부수적인 위치만 차지했을까? 비록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관점이 코페르니쿠스나 케플러의 그것에 비해 혁신적이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갈릴레오의 중요한 과학적 업적인 그의 운동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이것이 우리가 갈릴레오에 대해 제기하게 되는 첫 번째 물음이다.

  

   핸슨(Norwood Hanson)과학적 발견의 패턴에서 갈릴레오, 데카르트(Descartes), 비크만(Beekman)이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 낙하거리, 시간 사이의 관계를 상정함에 있어 갈팡질팡했던 모습들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핸슨에 의하면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물체의 속도가 낙하거리에만 관계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낙하하는 물체의 운동을 분석할 때 시간이라는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다. 핸슨은 1604년 이후 갈릴레오가 새로운 표기법을 개발함으로써 시간을 통해 운동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올바른 낙하법칙을 유도할 수 있었다고 얘기하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서 갈릴레오가 그러한 새로운 표기법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지는 않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섀피어(Dudley Shapere)도 유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갈릴레오의운동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운동 이론에 아리스토렐레스적 개념들과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의 유체정역학적 개념들이 혼재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1604년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갈릴레오가 제대로 된 낙하법칙을 유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설명 없이 다만 몇 가지의 추측들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갈릴레오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의새로운 두 과학에 등장하는 올바른 낙하 법칙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우리가 갈릴레오에 대해 제기하는 두 번째 물음이다.

  

   위에서 제기된 두 가지 물음들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 정확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면, 글의 처음에서 이미 예상되었던 다음의 세 번째 물음에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갈릴레오는 어떤 세계관과 개념들을 갖고 그의 역학을 구축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나 아니면 이전까지의 세계관 및 개념들과 많이 닮아 있었나? 과연 코이레가 바라보는 것처럼 갈릴레오는 근대 역학의 바로 곁에 서 있었던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비록 그가 근대 역학의 발전을 위한 씨앗들을 많이 뿌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근대 역학으로부터 여전히 멀리 있는가?

 

  

2. 코페르니쿠스를 넘어서 : 천상계의 운동학에서 지상계의 운동학으로

 

   갈릴레오의 과학에서 천문학과 운동학은 별개의 분야였을까? 그의 과학에서 이 두 학문은 서로 다른 관심과 목적, 동기를 갖고 있었을까? 갈릴레오는 1589~1592년 사이에 피사 대학의 강사로 있으면서 운동에 대한 연구를 했고, 이 결과는 그의운동에 대하여(De Motu)에 담겨져 있다. 이 책을 저술할 당시 갈릴레오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아르키메데스의 유체 역학을 토대로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 운동학을 비판하면서도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개념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무게에 따라서 물체의 낙하 속도가 다르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도, 이로부터 무게에 관계 없이 모든 물체의 낙하 속도는 일정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 같은 밀도를 가진 물체들은 무게에 관계 없이 낙하 속도가 일정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전히 그는 서로 다른 밀도의 물체가 다른 속도로 낙하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물체의 낙하 속도가 물체의 무게에 비례하며 매질의 저항에 반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식

을 비판하고 낙하 속도가 물체의 밀도와 매질의 저항 차이에 비례한다는 수정된 공식

을 제시하지만, 여전히 이 공식에서도 시간은 핵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물체가 낙하함에 따라서 가속 운동을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시기의 갈릴레오는 낙하하는 물체의 가속을 그의 수정된 임페투스 이론을 통해서 설명한다. 물체를 던졌을 때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물체의 무게가 변하거나 매질의 영향에 의해서가 아닌 외부적인 힘때문이다. 물체가 던지는 사람의 손을 떠난 순간부터 이 힘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므로 위로 올라가는 속도는 점점 줄어들어 정점에 이르고, 이윽고 물체가 밑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본래의 힘(gravitas)이 더 우세하게 되면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떨어지는 가운데에도 외부적 힘이 점점 줄어들므로 떨어지는 속도는 계속 증가하지만, 이 외부적 힘이 모두 소멸한 이후에는 물체의 낙하 속도가 동일하게 유지된다. 갈릴레오는 낙하 물체의 가속 현상에 대해 이와 같은 질적인(qualitative) 설명을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가속 현상은 우발적인(accidental) 것이고 따라서 그는 이에 대한 법칙을 별도로 도입하지 않고 있다.

  

   갈릴레오는 실제 운동 현상을 정확하게 양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위와 같은 이론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물체의 운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다.새로운 두 과학의 후반부에서 제시되는 그의 운동론이 기존의 운동론과 상당히 다른 것을 감안한다면, 분명운동에 대하여새로운 두 과학사이에 갈릴레오의 운동 이론에 중요한 변화가 찾아온 것이 틀림없다. 과연 그 변화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계기는 어떤 방식으로 갈릴레오의 운동 이론을 변화시켰을까? 이 물음에 대해 네일러(Ron Naylor)는 논문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주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과학의 기원에서 주목할만한 답변을 제시한다. 네일러에 의하면 갈릴레오는 1595년 경에 조수 현상에 대한 관찰 및 이에 대한 이론을 구상하면서 지구의 회전에 대해서 굳게 믿게 되었고, 이와 같은 갈릴레오의 코페르니쿠스 주의가 이후 그의 운동 이론 발전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602년 귀도발도(Guidobaldo)에게 보낸 편지에서 갈릴레오는 진자의 등시성과 코드의 법칙(law of chords)을 발견한 것을 언급하는데, 이 두 법칙은 이후 그가 자유 낙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깊이 믿지 않았다면 위의 두 법칙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네일러의 주장이다.

  

   코드의 법칙을 언급하면서 갈릴레오는 이를 진자의 운동과 연관시킨다. 갈릴레오에 의하면 직선으로 IA를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과 곡선으로 SIA를 움직이는 시간이 같다. 그런데 코드의 법칙에 따르면 BA의 이동 시간은 IA, CA, DA 등의 이동 시간과 같으므로, 진자의 사잇각이 얼마든 상관 없이 진자는 같은 주기를 유지하게 된다. BA를 거치는 직선 운동IA, CA를 거치는 경사면 운동과 연관시킨다는 점, 또한 경사면 운동을 다시 진자의 주기 운동과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코드의 법칙과 진자의 등시성은 이후 갈릴레오의 낙하 법칙 수립 및 운동 이론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1602년에 코드의 법칙과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기 전까지, 갈릴레오에게 있어 자유낙하 운동과 경사면 운동은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기존 이론에 의하면 자유낙하 운동의 경우 가벼움의 임페투스는 작용하지 않고 오직 무거움(gravitas)만 작용하는 반면, 경사면 운동의 경우 가벼움의 임페투스와 무거움이 동시에 작용한다. 하지만 코드의 법칙의 등장으로 인해 자유낙하 운동과 경사면 운동이 같은 종류의 운동으로 분류되고, 이 법칙이 옳고 그른지의 여부를 실험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도 있었다. 갈릴레오는 진자의 등시성이 사잇각이 큰 경우에 실험 결과와 일치하기 어려움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는 진자의 등시성이 타당하지 않은 법칙이라서가 아니라 실제의 실험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수적인 효과들(매질과 물체 사이의 마찰 등)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일러는 만약 갈릴레오가 지구의 회전이라는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믿지 않고 있었다면 그가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갈릴레오가 자신의 운동 이론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코페르니쿠스 주의라는 형이상학적 입장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실제로 갈릴레오의 코페르니쿠스 주의, 더 구체적으로 말해 직선운동이 아닌 원운동에 대한 옹호는 그의대화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대화의 첫째 날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직선운동은 태초에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물질들을 움직일 때나 있었어. 하지만 일단 세상을 다 만들었으면 가만히 제자리에 있어야지. 움직이는 것은 원운동만이 가능해. 플라톤의 말처럼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한 다음 모든 물체들을 제 위치를 잡기 위해서 얼마 시간 동안 직선운동을 시켰다면 몰라도. 그 다음 이들이 정해진 위치에 닿자 하나씩 하나씩 돌리기 시작했지. 그러니까 직선운동을 원운동으로 바꾼 다음 이런 상태로 움직이도록 했다는 거야.갈릴레오는 원운동을 가장 완전하고 자연스러운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동의하지만, 지구가 정지해 있고 지상계에서의 물체의 움직임은 본질적으로 직선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갈릴레오는 천상계의 물체들에게만 적용되었던 원운동을 지상의 모든 물체들에 적용한다. 이는 천상계와 지상계의 운동학을 통합시키는 작업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갈릴레오가 케플러와는 다른 종류의 혁신(Innovation)을 이룩했음을 발견한다. 케플러가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작용할 것이라 추측되는 단일한 자기적 힘을 근거로 원궤도가 아닌 타원궤도를 도입했다면,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주의의 기본 원리인 원운동의 원리를 지상계에까지 확장함으로써 천상에 있는 물체들이 아닌 지상의 물체들의 운동에 대한 정량적 운동학을 수립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천상계와 지상계를 분리한 이후, 천문학에서 시간의 경과에 따른 항성 및 행성들의 위치 측정이 정교하게 이루어졌던 반면 지상계에서의 운동학은 목적론적이고 정성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정량적인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을 지구가 아닌 태양에 둔 것, 지구에게 정지가 아닌 원운동을 부여한 것은 단순히 천문학 내에서만의 변화를 함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구의 운동이 자연스러운 원운동이라면, 지구와 함께 움직이는 지상계의 모든 물체들의 운동 또한 그 본질상 자연스러운 원운동에 지나지 않는다면, 지상계의 물체들이 보여주는 운동들의 움직임은 천체들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량적인 분석이 가능해진다.

  

   코페르니쿠스가 예견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 지상계의 물체들 또한 천상계의 물체들과 마찬가지의 운동을 하며 그런 의미에서 수학적인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갈릴레오는 이루어냈다. 코페르니쿠스가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원칙인 일양적 원운동 개념을 고스란히 유지했다는 점에서, 갈릴레오는 케플러보다도 더 코페르니쿠스적이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주의로부터 비롯한 두 갈래의 혁신인 케플러의 천문학적 혁신과 갈릴레오의 운동학적 혁신은 언뜻 생각해서는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두 종류의 혁신인 것처럼 여겨진다. 케플러는 우주의 중심은 항성인 태양이다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를 유지한 반면 태양 주위의 모든 행성들의 궤도는 원이다. 모든 행성들은 일양적인 원궤도 운동을 한다라는 고전적인 원리를 포기했다. 반면 갈릴레오는 케플러와 달리 원운동의 개념을 모든 지상계의 물체들에 적용시키고 지상계의 운동학을 수립하려고 했다.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대립하는 지점에는 일종의 균열과 긴장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속에서 운동학은 오직 역학(kinematics)만을 지칭한다. 적어도 톨레미와 코페르니쿠스 모두 지구와 행성 혹은 태양과 행성 사이에 어떤 이 존재하는지 문제 삼지 않았으며, 수학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완전한 도형인 원이 천체의 겉보기 움직임과 잘 일치한다는 이유로 을 천체 운동을 기술하는 원리로 삼았다. 천체들에 적용되는 역학적 원리원운동의 원리를 물체 상호간에 복잡한 힘들이 작용하는 지상계의 운동 현상에 적용하려는 갈릴레오의 시도는 과감했으나 동시에 위험 부담이 많이 따르는 일이었다. ‘과연 지상계에서의 동역학(dynamics)에도 천체에서의 역학적 원리인 일양적 원운동의 원리가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지상계에 적용되는 운동학을 수립하려는 갈릴레오의 노력은 그의새로운 두 과학에까지 진행된다. 운동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이 책 3부의 서두에서 갈릴레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움직임이라는 매우 오래된 것을 주제로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려는 것이다... 아주 흥미롭고 굉장히 넓은 새로운 과학이 우리 눈앞에 활짝 열렸으며, 내 연구는 겨우 시작에 불과할 뿐 나보다 더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새로운 방법과 기구를 써서 이 과학의 구석구석을 탐험해 밝힐 것이다.” 과연 지상계의 운동학을 정립하려는 갈릴레오의 시도는 그의새로운 두 과학에서 성공을 거두었을까? 아니면 그의 새로운 시도는 특별한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을까?

 

3.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 : 질적 운동학에서 양적 운동학으로

 

   앞서 살펴보았듯 갈릴레오는운동에 대하여에서 제시된 운동 이론으로부터의 돌파구를 코페르니쿠스 주의로부터 찾았지만, 단순히 원운동만으로는 지상계의 물체들이 보여주는 운동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지상계 물체들의 운동이 천상계 물체들의 운동과 크게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었다. 우리는 돌 또는 나무조각 등 고체로 이루어진 물체를 들었을 때 이것의 무거움을 느낀다. 비단 고체 뿐만이 아니다. 물과 같은 액체에게도 무거움이 있다. 이렇듯 지상계의 모든 물체들은 무거움이라는 질적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 질적 특성으로 인해 지상계에서의 운동은 천상계의 운동과 다른 형태를 갖는다. 특정한 물체를 수직 위쪽으로 던지든 비스듬하게 던지든, 물체는 그 무거움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지는 듯 보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의 질적 설명이 가능하지만, 문제는 물체의 낙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내적으로도 모순되고 실제 실험 결과와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또한 지구의 회전 및 지상계에서의 운동에도 원운동이 적용된다고 믿었던 갈릴레오에게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갈릴레오는 기존과는 다른 운동학을 수립하기 위해서 당시 그가 사용할 수 있었던 개념적 도구들(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 및 중세 철학자들의 임페투스 이론, 유클리드의 기하학, 아르키메데스의 유체역학 및 비율 이론 등)을 가지고 오랫동안 고심해야 했다.

  

   갈릴레오가 남긴 기록들에는 1592년 이후 1636년에 출판된새로운 두 과학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상계의 운동학을 수립해나간 과정들이 담겨 있다. 대임로우(Damerow)를 비롯한 네 명의 저자들은전근대적 역학의 한계에 대한 탐구중 갈릴레오에 대한 부분에서 그의 낙하법칙 및 투사체의 궤적에 대한 이론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이와 같은 과정을 상세하게 분석해나가고 있다.운동에 대하여를 저술할 당시까지 갈릴레오는 타르탈리아(Tartaglia)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투사체의 궤도는 처음에는 직선을 이루다가 이후 급격하게 강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물체의 가속 현상이 우발적이며 물체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갈릴레오는, 투사체가 발사된 각에 따라서 영향받는 힘의 정도가 다르며 큰 각으로 발사된 물체가 작은 각으로 발사된 물체보다도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1592년에 귀도발도와의 실험을 통해서 투사체의 궤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 궤적이 대칭적이라는 사실 을 발견한다. 이 발견은 기존까지의 그의 운동 이론을 수정하게끔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갈릴레오는 투사체의 대칭적인 궤적에 대해, 상승 곡선을 이루는 전반부에서는 소멸되는 힘인 가벼움의 임페투스가 강세를 띠는 반면, 하강 곡선을 이루는 후반부에서는 계속 유지되는 힘인 무거움이 강세를 띠기 때문이라는 기존까지의 설명 방식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투사체 궤도의 대칭성으로 인해 갈릴레오는 낙하 물체의 가속 현상이 일시적이고 우연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견해를 변경하고 이것이 낙하 현상의 본래적이고 자연스러운 성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운동에 대하여에서 갈릴레오는 평면 상의 운동이 처음에는 강제적인 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운동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자연스러운 운동을 한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후 투사체 궤도의 대칭성을 발견함으로써 갈릴레오는 투사체 운동을 수평 운동과 수직 운동으로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있겠다는 중요한 착상을 얻게 된다. 수평 운동이 자연스럽고 일양적인 원운동이며, 이는 수직 운동과 분리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그의 코페르니쿠스 주의와 잘 부합하지만, 물체의 가속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1604년 동료인 베네치아 학자 사르피(Sarpi)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갈릴레오는 낙하 물체의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는 것(

)’낙하 물체의 속도는 낙하 거리에 비례한다(

)는 공리(Axiom)’를 토대로 도출해 냈음을 알린다. 고전역학적 관점에 의하면 이동거리를 시간으로 미분한 값이 속도이므로, 속도는 시간의 제곱 및 이동거리와 동시에 비례 관계를 가질 수 없다. 만약 갈릴레오가 고전역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위와 같은 그릇된 주장을 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단순히 그가 틀렸음을 지적하는 것보다는 그가 어떤 근거와 논증을 토대로 이같은 주장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갈릴레오는 물체의 운동을 분석함에 있어 서로 다른 양 사이의 관계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중세 시대의 머튼 학파 및 파리대학의 학자들의 역학적 작업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공리인 낙하 물체의 속도가 거리에 비례함을 나타내는 기하학적 도식을 미리 전제한 후, 그 도식으로부터 어떤 방식을 통해 낙하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함을 도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제가 되는 기하학적 도식을 통해 그는 아무리 큰 속도도 처음부터 곧바로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작은 속도로부터 그 중간 과정에 속한 모든 속도들을 거쳐서 도달됨을 보일 수 있었지만, 여전히 이 도식을 통해서는 운동의 시간과 도달 거리의 관계가 분명하게 제시될 수 없었다. 거리에 따라서 속도가 증가한다면 증가된 속도의 물체가 특정 거리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데카르트와 갈릴레오 모두 인정했던 사실이었다. 시간, 속도, 거리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갈릴레오가 도입했던 해법은 속도와 거리 사이의 이중 비율(double proportionality)’로부터 시간과 거리 사이의 중간 비율(mean proportionality)’로의 이행이었다. 만약 물체가 A에서 F까지 낙하함에 따라서 속도가 A에서 K까지 일정하게 증가한다고 가정해보자. 갈릴레오에 따르면 AC를 통과하는 시간

AD를 통과하는 시간

사이의 비율은, ACACAD의 기하평균인 AC’과의 비율의 역과 같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낙하 물체의 시간, 속도, 거리의 관계를 설정할 경우, 속도가 거리에 비례하면서도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결론이 도출됨을 확인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갈릴레오의 설명을 근거로 우리는, 아직까지 시간개념이 낙하 물체의 운동을 분석하는 기본적인 단위로 도입되지 않았으며, 갈릴레오가

로부터

를 도출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적(ad hoc)으로 이중 비율 관계를 도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비율 관계는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및 아르키메데스의 비율 이론을 근거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갈릴레오의 설명은, 그가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속도-거리 비율 관계를 근거로 이중 거리 규칙(Double Distance Rule)’을 도출함으로써 중요한 전환을 맞는다. 이중 거리 규칙에 의하면, 물체가 거리가

인 경사면을 따라 시간

동안 굴러 내려온 뒤 같은 시간 동안 평면을 이동할 경우, 평면을 이동하는 거리

의 두 배가 된다. ‘이중 거리 규칙은 그 결과적인 내용의 경우 고전역학적 관점에서 옳았으나 이 규칙을 도출하는 데 사용된 갈릴레오의 전제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중심 개념으로 하는 이 규칙의 도출을 계기로 갈릴레오는 낙하 운동을 분석함에 있어 속도와 거리가 아닌 속도와 시간사이의 관계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1604년 이후에야 비로소 갈릴레오는 속도가 거리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도출하지만, 이러한 도출 과정에 있어 그가 이중 거리 규칙중간 비율의 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다시금 문제가 된다. ‘이중 거리 규칙속도가 거리에 비례한다는 공리와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을 근거로 도출된 개념이었기 때문이고, ‘중간 비율의 기법 또한 시간변수를 직접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갈릴레오가 여러 방법들을 시도하면서 낙하 법칙을 제대로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중세적 개념 및 아르키메데스의 비율 이론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는 끝내 낙하 법칙에 대한 정합적인 유도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운동학을 다루는 갈릴레오의 마지막 책인새로운 두 과학에서 갈릴레오는 머튼 규칙(Merton Rule)’으로부터 낙하 법칙을 깔끔하게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머튼 규칙은 그의 이중 거리 규칙으로부터 쉽게 도출될 수 있었으며, 낙하 법칙을 유도하는 논증에 있어서도 갈릴레오는 고전역학에서처럼 시간과 속도 및 거리 사이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시간과 속도의 관계를 별도의 거리 척도와 비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운동 개념(물체의 무거움은 자연스러운 성질이라는 것), 중세 철학자들의 임페투스 개념, 아르키메데스의 곡선 및 비율 이론 등을 근거로 지상계에서의 운동학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비교적 정확하고 고전역학과 유사한 수준의 운동학적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고전역학적인 개념틀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이러한 운동학적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도록 했던 중요한 추동력을 그의 플라톤적이고 코페르니쿠스적 믿음(지상계의 물체들 또한 단순한 원운동의 원리 혹은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는 것)에서 찾는 것은 합당하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실험(experiment)이 그의 운동학적 탐구에 끼친 중요한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이론적 작업을 행해 온 흔적을 검토해보면,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원운동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역학적 현상들을 실험을 통해서 발견했으며(낙하하는 물체의 가속 현상, 비스듬히 던진 물체가 나선형 궤적이 아닌 포물선 궤적을 보이는 현상), 이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록 임시방편적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가용한 개념적 도구들을 사용하면서 이 현상들에 적합한 역학 이론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적 틀 속에서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거쳐 그 틀을 파격적으로 혁신하고 넘어섰다.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통해서 천상계의 운동학과 지상계의 운동학을 통합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던 그는, 이전까지의 질적인 운동학을 점차적으로 극복하고 서서히 양적인 운동학의 형태를 빚어내기 시작한다. 비록 이 운동학이 기존의 개념들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지상계의 물체들이 보여주는 운동을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과 전망을 제시해주었다. 갈릴레오 본인의 말처럼 그의 역학이 새로운 역학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진정으로 새로운과학이었던 것이다.

 

4. 넘지 못한 혹은 넘으려 생각하지 않았던 벽 : 갈릴레오 운동학의 전근대적 성격

 

   만약 갈릴레오가 근대적인 역학의 완성된 형태에 도달하는 데 오직 한 걸음부족했다면, 그 부족한 한 걸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었을까?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천문학 체계를 제시했되 여전히 그의 천문학이 톨레미 천문학의 잔재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코페르니쿠스 본인이 아닌 그 이후의 케플러와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지니는 천문학적이고 운동학적인 함의를 온전히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갈릴레오 또한 코페르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학문인 운동학의 큰 뼈대만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갈릴레오는 어떤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그의 새로운 과학을 수립할 수 있었으며, 그 방법론의 어떠한 한계가 그를 온전한 근대적 역학에 도달하지 못하게끔 했는지를 물을 수 있지 않을까? , 혁명적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흔적을 갖고 있던 갈릴레오의 역학에 대한 원인을 그의 과학적 방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갈릴레오 한계의 역학에 대한 이러한 방법론적 질문에 대한 해답은 월리스(Wallace)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월리스에 의하면 갈릴레오의 과학적 방법은 플라톤적인 것도, 가설-연역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갈릴레오의 과학적 추론 방법을 가정적 방법(Ex Suppositione)’이라고 부른다.

  

   이 방법은 중세 철학자,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통해 개발되었으며 기본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아르키메데스적인 특성을 띠고 있었다. 전적으로 수학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및 실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 방법은, 자연 현상에 대한 참되고 필연적인 지식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실재론적인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갈릴레오 시대에 최고의 수학자로 칭송받고 있던 예수회의 클라비우스(Clavius)에게서도 이같은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그는 톨레미 천문학 체계에서의 주전원이 단순히 현상을 구제하고 계산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물리적 실재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주전원은 현상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성 운동에 대해서도 말해주는 예측력(predictive force)’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한 예측력을 가진 두 종류의 가설이 존재한다면 둘 중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톨레미의 체계 둘 다 천체 현상을 같은 정도로 예측한다면 어떤 체계가 옳은가? 이 질문에 대해서 클라비우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물리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톨레미의 체계에 손을 들어준다. , 서로 경합하는 동등한 수준의 두 가설이 있을 경우, 이 가설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클라비우스와 유사하게 갈릴레오 또한 천문학에서의 가설을 두 종류로 나눈다. 그에 의하면 일차적(primary)’인 가설이 자연에 있는 절대적인 진실을 다루는 반면, ‘이차적(secondary)’인 가설은 별들의 운동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상적(imaginatively)으로 고안된다. 천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역학에서도 갈릴레오는 자연의 진실을 기술하는 일차적 가설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 참됨의 여부를 평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갈릴레오에게서 가설들은 어떻게 시험되는가? , 그의 가정적 방법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되는가? 이 방법은 가설-연역적 방법처럼 ‘p이면 q이다라는 형식을 갖고 있지만 가설-연역적 방법과는 중요한 지점에서 차이가 난다. 가설-연역적 방법에서 전건이 되는 가설 p가 자유롭게 설정될 수 있는 반면, 가정적 방법에서의 전건 p는 자연에서 규칙적으로 벌어진다는 것이 관측을 통해 잘 확인 된 가설이다.

  

   갈릴레오의 가정적 방법에 의하면, p라는 그럴듯한 가설을 제시하고, 수학적 추론을 통해 p이면 q라는 결론이 도출할 수 있고, q가 물리적으로 입증되었다면 우리는 p를 물리적 현상 q에 대한 적절한 원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 q가 있을 경우, 가설 p를 제시하고 p로부터 수학적 추론을 통해 q에 도달함을 보일 수 있다면, 이 경우에도 p를 물리적 현상 q에 대한 적절한 원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갈릴레오의 가정적 방법은 가설 수립에 있어서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지지를 결정적으로 중요시한다는 점에 있어 가설-연역적 방법과는 구분된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그의 가정적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운동학의 많은 결론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가 진자의 등시성과 코드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도출한 이후, 그러한 수학적 도출이 물리적 현상에도 적용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실험을 수행했고, 비록 실험상 어느 정도의 오차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이는 부수적인 요소의 개입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투사체 운동에 있어 평면 운동과 수직 운동을 분리시켜서 분석할 수 있고 이렇게 분리시켜 분석할 경우 투사체의 궤적이 포물선이 될 것이라는 그의 물리적 가설은 이후 실험을 통해 입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경험 및 실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가정적 방법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의 역학이 가졌던 한계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원인을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던 클라비우스의 사례를 근거로 짐작해볼 수 있다. 클라비우스의 경우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물리적으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던 반면, 유사한 실재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물리적으로 더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 사람의 판단 차이를 낳게 한 것일까? 이러한 판단의 차이는 두 사람이 물리적 세계에 대해 갖고 있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비롯되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세계관 및 지구의 부동성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클라비우스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보여주는 질적 단순성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반면, 플라톤적인 수학적 조화를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케플러는 천문학 체계의 수학적 단순성이 우주에서의 지구의 위치 혹은 지구가 정지하거나 회전하는지의 여부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갈릴레오의 경우, ‘지상 물체 또한 완전한 원운동을 한다는 가정에 기반해서 추론된 그의 코드의 법칙 및 비스듬히 던진 물체의 수직 운동과 평면 운동의 구분 등은 실험 결과와 성공적으로 합치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가지고 있던 고전적인 임페투스 개념과 무게의 개념으로는 낙하하는 물체의 가속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비록 그가 실험 결과 및 기존에 알려져 있던 수학적 추론에 기반해서 낙하 거리는 경과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q)’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속도, 거리, 시간 사이의 관계를 위의 결과와 부합되게 만들기 위해서 고전적인 개념들을 사용해서 임시방편적인 해결책(‘이중 비율의 관계’, p)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 오늘날의 개념을 빌려서 말하자면, 역학과 동역학의 구분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물리적 현상을 분석하는 효과적인 수학적 도구인 미분적분학(calculus)을 알지 못했던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개념과 유클리드 및 아르키메데스의 비율 이론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 q를 그릇된 전제 p를 통해 유도해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p에서 q로의 수학적 추론을 기존의 개념과 수학적 기법을 통해 임시방편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모든 판단은 우리가 근대 역학을 전제로 할 때에만 타당함을 주목하자. 당시에는 케플러조차 자신의 행성 법칙을 암중 모색 중에 발견했고, 그 법칙이 이전까지의 역학적 천문학을 부정하는 동시에 동역학적 천문학을 물리적으로 함의한다는 것을 그 자신 스스로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새 시대의 과학을 향한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접근법 중 누구의 것이 더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갈릴레오는 천상계와 지상계의 운동학을 통합하고 지상계의 운동학을 정량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당대 과학의 가장 첨단에 서서 이후의 역학을 위한 중요한 혁신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갈릴레오는 근대 역학에 도달하기 위한 벽을 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의 과학적 경력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벽의 직전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 자신의 혁신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그 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5. 맺는 말 :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근대 역학

 

   근대의 과학혁명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나? 코이레가 17세기 과학혁명을 다루는 자신의 논문에서 관성의 원리가 갖는 세 가지 특징을 말할 때, 그는 다름아닌 역학의 혁명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반면 쿤이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천문학의 혁명을 말하지만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뉴턴의 종합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이전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단순히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믿고 옹호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단순히 망원경을 만들어 관측을 하고 종교 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사회적으로 널리 전파하는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더 발전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지상계로 확장시키면서 천상계와 지상계의 운동학을 통합시키고 지상계에서의 정량적 운동학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정초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갈릴레오는 새로운 운동학을 수립하기 위해 그가 피사 대학의 강사로 있던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노력한다. 당시 갈릴레오는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운동 개념들, 아르키메데스의 곡선 이론 및 비율 이론, 중세 철학자들을 통해 개발되고 세련되어진 새로운 임페투스 개념과 과학적 방법론(‘가정적 방법’) 등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주의 및 지상계의 운동학의 가능성을 굳게 믿고 있었던 그는 이러한 모든 개념적 도구들을 이용해서 지상계의 물체들이 보여주는 운동을 수학적이고 정량적인 방식으로 비교적 성공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지상계 물체의 운동을 분석함에 있어 일양적 원운동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정의 부족함을 보충해 준 것은 바로 실험이었다. 정확한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들 중에는 기존의 운동 이론에 포함된 개념 및 원리들와 어긋나는 결과들이 있었고, 이러한 경우 갈릴레오는 단순히 실험 결과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 결과와 부합하도록 기존의 원리와 개념들을 조합하고 변경했다. 비록 이러한 조합과 변경이 임시방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는 최종적으로는 근대의 것과 매우 유사한 역학적 결론들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를 근대적 역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한다. 갈릴레오는 그의 마지막 저서에서도 원운동을 완전한 운동이라는 믿음을 고집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물체의 낙하 현상을 말하면서 임페투스자연적인 무거움을 언급한다. 우리는 그의 논의에서 질량 중심 사이의 거리의 역제곱과 질량 사이의 곱에 비례해서 작용하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중력을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여전히 공간과 운동은 그 모든 질적 특성들을 벗어버리지 못한 상태다. 또한 그는 지상계에서의 운동을 분석함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시간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코이레의 논문에서 등장하는 근대 과학의 영웅은 갈릴레오가 아닌 뉴턴이다. 코이레는 갈릴레오를 뉴턴으로 착각한 것이다.

  

   갈릴레오와 근대 역학 사이에는 역학과 동역학의 분리, 순수히 정량적인 방법을 토대로 한 운동의 역학적 분석, 질량과 질량 사이의 보편힘에 대한 수학적 추론, 해석기하학과 미분적분학의 도입 등과 같은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놓여 있다. 세계관의 변화는 비록 그 강도가 격렬하더라도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갈릴레오는 근대 역학으로의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었지만, 여전히 그는 이로부터 꽤 먼 곳에 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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