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23: 과학과 현대 사회

강형구 2016. 5. 3. 05:28

과학과 현대 사회

 

자사노프(Jasanoff),과학, 정치학, 그리고 EPA에서의 전문가 재협상(1992)

홍성욱,20세기 과학연구의 지형도 : 미국의 대학과 기업을 중심으로(2002)

웨이크먼(Wakeman),새로운 아틀란티스를 꿈꾸다 : 과학과 테크노폴리스 계획(2003)

(King),질병 출현에 대한 규모의 정치학(2004)

캐스퓨&래이더(Casphew, Rader),거대과학 :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댓가(1992)

 

Science, Politics, and the Renegotiation of Expertise at EPA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우리 말로는 환경보호국정도로 될 수 있겠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화학적 상품들이 대량 생산 및 유통되면서, 미국 정부에서는 환경을 파괴하고 시민의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식품이나 의약품들을 규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수립된 기관이 바로 환경보호국이다. 시민들은 환경보호국이 산업화된 과학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활동해야만 환경보호국의 정책이 공정하게 수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경보호국은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의사결정과정을 비교적 투명하게 하고, 환경에 위협이 되는 몇몇 유해물질들에 대한 규제 조항들을 설정함으로써 환경보호정책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보호국의 정책 수립 및 실천이 무리없이 진행된 것은 아니다. 산업계에서는 환경보호국의 규제 조항들이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산업계의 입장에서는 보호국의 규제 조항의 내용이 자신들의 상품 생산 및 판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호국의 규제 조항들이 보수적(conservative)이기 때문에 산업 발전에 제한적인 요소가 된다고 반론을 제기한 집단도 있었다. 환경보호국의 정책 과정이 비교적 많은 부분 공개되었던 것 또한 여러 논란들의 씨앗이 되었다. 의사결정과정이 외부의 감시로부터 차단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블랙박스화 되지 않는 한, 이 결정과정의 신뢰성과 타당성에 대한 이의제기의 가능성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경보호국은 환경보호정책 수립에 있어서 보호국의 입지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정책수립을 위해 외부 자문위원들에게 조언을 요청하기도 하고, 정책수립에 조언을 줄 수 있는 과학자 집단을 보호국 내에 설치하기도 한다. 시민들은 보호국이 과학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과학계와 산업계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기를 바랐고, 이러한 다소 아이러니한 바람에 맞추어서 환경보호국은 의사결정과정의 과학성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과학계의 도움을 받는 동시에 의사결정과정을 어느 정도 블랙박스화함으로써 수립된 정책들에 대한 이의 제기를 상당부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암 발병 위험 판단(Cancer Risk Assessment), 발암성의(carcinogenic). 자사노프는 환경보호국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제도적 절차, 의사수립절차의 합법성을 강조하고, 사실을 만드는 과학적 절차를 제도 안으로 도입하고, 이를 지지하는 수사학적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한 듯하다. 정책 수립에는 과학적/정치적/제도적 요소들이 함께 개입한다.

  

20세기 과학연구의 지형도 : 미국의 대학과 기업을 중심으로

   21세기에 이르러 대학과 기업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대학은 기업의 이익에 맞고 당장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는 연구를 진흥하고 있는 반면, 이공계에서의 기초연구 및 인문학같이 즉각적인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학문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일까? 현재의 상황에 대해 과학사가 무엇인가를 말해줄 수 있을까? 홍성욱은 현 시대의 과학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를 주요 사례로 삼아 20세기에 미국에서 대학과 기업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가면서 과학 연구를 수행해 왔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왜 그리고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는 대학과 기업에서의 과학연구가 정착된 시기였다. 영국, 프랑스 및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던 미국의 경우, 국가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유럽의 대학 모델을 자국에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대학과 기업이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비록 대학이 실용화된 과학 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시 미국에서는 국가를 이끌어 갈 엘리트 계층 양성이 시급했고, 대학은 이러한 엘리트 계층을 양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관으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에서의 교육과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은 그것의 응용성, 기술성보다는 도덕성이 더욱 더 강했다. 또한 당시의 대학은 기업계, 경제계와 분리된 상태에서 순수한학문을 추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2차 대전 당시 과학기술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미국 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냉전 구도가 성립되면서 과학과 기술의 결합이 더욱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대학이 학문의 순수성을 추구하던 경향은 점차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또한 1957년에 발생한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이후, 미국은 교육 뿐만 아니라 과학 연구에 있어서도 기초 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기초 연구가 활성화되면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응용연구가 따라나오고 이에 따라 국가가 발전할 것이라는 선형적 모델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까지 지속되며, 이 시기에 이르면 기술적이고 응용적인 연구를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매우 능숙한 학자가 학생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모습을 보인다.

  

   1970년대 이후에는 다시 상황이 바뀐다. 우선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냉전 시대에 과학과 군사기술이 밀접하게 결합하여 발전한 반면, 60년대 말 무렵에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국내의 분위기는 과학과 군사기술의 결합에 적대적으로 변한다. 따라서 이전까지 국방부가 대학에 연구비를 대량으로 지원했다면, 60년대 말 이후 국방부로부터의 연구비 지원은 점차적으로 감소된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선형적 모델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기초 연구로부터 직접적으로 응용 연구로의 발전이 초래되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게끔 하는 결과들이 다수 발생했고, 기초 연구와 응용 연구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클린턴 행정부는 실용적인 기술에 대한 적극적 투자를 명시적으로 정책적 기치로 내걸었고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과학연구는 점차적으로 직접적인 실용성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홍성욱은 20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과학연구의 지형도를 역사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어떤 나라보다도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우리나라에서의 과학 연구 실태가 현재 왜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과학이 아닌 역사는 과학처럼 정량적으로 미래를 예측하지는 못하지만, 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재가 미래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 나갈지를 가름할 수 있게 해준다. 현재를 보다 깊게 이해하도록 해줌으로써 다가오는 미래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 이것이 역사의 중요한 기능이 아니겠는가.

  

Dreaming the New Atlantis : Science and the Planning of Technopolis, 1955-1985

   현대 프랑스 과학에 대한 논문이라 눈에 띄고 새로웠다.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과학은 냉전 시대의 과학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가 없다.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새로운 국가로 자리매김을 한 반면, 프랑스, 독일 등은 전쟁의 아픔을 딛고 다시 국가를 재건하려는 목표를 갖게 된다. 웨이크먼은 전쟁 이후 프랑스 과학엘리트들이 과학도시인 테크노폴리스를 건립함으로써, 이 테크노폴리스가 현대 프랑스의 이상을 제시하는 하나의 모형으로 기능하기를 의도했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테크노폴리스는 국가의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과학 연구가 수행될 뿐만 아니라, 첨단의 방식으로 도시화되어 있고, 국가의 이익과 영예를 창출하기 위한 기능을 하는 장소였다. 사람들은 테크노폴리스를 현대의 가장 이상적인 도시 형태로 생각했으며, 테크노폴리스의 과학자 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1955년 이후 프랑스에서는 과학기술혁신과 자본생산 및 소비를 증가시키기 위한 과학 특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엘리트들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어떤 디자인으로 테크노폴리스를 설립하려고 했을까? 그리고 테크노폴리스를 통해 볼 수 있는 지식의 지형도는 무엇일까? 19세기 이래로 프랑스에서는 각각의 도시들마다 도시 고유의 과학을 발전시키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레노블(Grenoble), 툴루즈(Toulouse), 마르세이유(Marseilles), 낭시(Nancy), 릴르(Lille) 등은 공학과학(engineering science)으로 특화되었고,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 보르도(bordeaux), 몽펠리에(Montpellier) 등은 화학으로 특화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특화된 상황은 이후에도 장기간 유지된다.

  

   전후 1950년대에 등장한 프랑스 과학 엘리트들은 과학이 프랑스 사회와 문화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과학 엘리트들은 프랑스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곳곳에 과학센터를 건립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후 이 계획은 실현된다. 프랑스 과학의 아이콘으로 기능한 것은 이와 같은 지역적인 과학센터들이었다. ZIRST(Zone pour l'Innovation et les Realisations Scientifiques et Techniques)의 경우, 컴퓨터공학, 전기공학, 로봇공학과 관련된 130개의 첨단기술 회사들과 3,000명의 사원들이 밀집해 있는 공간이 되었다. ZIRST는 국가 주도로 매우 설립되었고, 건물들의 건립에는 정합성과 형식성이라는 기준이 적용되었다. 테크노폴리스는 새로운 프랑스 시민과학자를 육성하고, 프랑스의 발전 및 자본생산을 목표로 하는 꿈의 세계였다. 이와 같은 도시화 된 유토피아는 새로운 프랑스 사회를 위한 이상을 제시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사회학자 부르디외(Bourdieu)가 말한 것처럼, 테크노폴리스가 내세우는 중립적인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의 픽션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유토피아 아래에 있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투쟁을 은폐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비록 테크노폴리스가 주변부에 설립되었다고 하더라도, 테크노폴리스는 도시의 확장된 영역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주변의 도시들과의 연결을 통해서 테크노폴리스는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테크노폴리스는 일종의 교차로(crossroad)인 셈이었다. 테크노폴리스는 전후 프랑스 사회에서 일종의 새로운 엘도라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테크노폴리스를 다른 도시와 분리시키는 것은 기술적 분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리이기도 했다. 테크노폴리스를 고안했던 과학엘리트들은, 테크노폴리스를 이상화 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특화시키고 옹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논문이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통해 근대의 새로운 과학자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했다. 베이컨은 이 책을 통해 이전까지와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종류의 지식과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옹호하려 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프랑스 과학엘리트들은 테크노폴리스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과학적 도시과학자 연구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하려 했다.

  

The Scale Politics of Emerging Diseases

   거대과학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대과학의 형성 및 거대과학이 작동하게 되는 과정을 보이는 것, 그것이 거대과학에 대한 새로운 분석 방법이라는 것이 저자의 기본적인 입장이며, 이러한 입장은 캐스퓨(Casphew) 및 래이더(Rader)의 입장과도 일맥 상통한다. 저자인 킹은 새롭게 출현하는 질병들에 관련해서, 규모를 강조하는 수사학(질병에는 국경이 없다, 오늘 지구 반대편에서 등장한 질병에 내일 걸릴 수도 있다 등)이 질병 방지 정책, 기관 수립, 재원 확보 등에 기여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바이러스 학자(virologist) 모스(Morse)는 새로운 바이러스의 진화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해도, 질병의 출현을 추적하고 예상할 수는 있다고 주장했다. 모스에게는 인간과 질병 사이의 상호작용을 규정짓는 보편적인 분자적(molecular), 생태학적 법칙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생물학과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의 작업은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을 넘어서 질병의 해결책까지도 제시하려 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의약청(Institute of Medicine)은 세계적으로 출몰하는 질병들이 미칠 국가적 규모의 귀결들에 초점을 맞춘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질병이 전지구화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포괄적이고(comprehensive) 컴퓨터화된(computerized), 전지구적인 질병 감시 연락망 구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관계자들은 새롭게 출현하는 질병에 대응하기 위해서, 국가적 차원의 질병감시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재정지원이 필요하다고 정부에 호소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러한 규모의 수사학(rhetoric of scale)은 이후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규모의 수사학은 질병에 대해 보도하는 언론인들의 글들에서도 드러난다. 언론인이었던 프레스턴(Preston)의 경우 규모의 수사학을 사용해서 질병 관련 사건을 묘사한 저서를 출판했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둔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전지구적인 질병 출현에 대해 지구가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면역 체계를 발동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언론인이었던 개렛(Garret)의 경우, 그녀는 공공의료의 저하, 경제적 불평등의 증가, 사회적 부정의의 확산으로 인해 질병이 출현했다고 진단한다. 키키위트(Kikiwit)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출현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각종 언론에서 경쟁적으로 보도하려고 몰려들었으며, 비평가들은 언론이 개별적인 질병 출현을 너무 확대해석하고 과장해서 보도한다고 비판했다.

  

   유사한 수사학이 생물학적 테러리즘에도 사용되었다. 정책 수립자의 입장에서는, 생물학적 테러는 언제 어디에서나 지구 곳곳에서 벌어질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국제적 감시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정부에 호소함으로써, 관련된 제도와 기관을 수립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생물학적 테러를 보도하는 언론인들 또한 질병 출현 때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수사학을 사용하며 시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전지구적인 질병 및 생물학적 테러를 예방하기 위한 대규모의 제도와 집단이 수립되는 데에 규모의 수사학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저자는 거대과학이 수립되고,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생시키고,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수사학을 분석한 것이다.

 

  

Big Science : Price to the Present

   이 논문의 첫 부분에서 저자들은 거대과학의 여러 의미들을 해설한다. 병리(Pathology)로서의 거대과학을 지적한 저자로 노버트 위너를 들 수 있는데, 위너는 거대과학의 군사적이고 산업적인 성격을 비판했다. 거대과학을 하나의 과학적 현상(scientific phenomenon)’으로 바라보고자 한 사람도 있었다. 프라이스(Price)의 경우, 과학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학 그 자체가 충분히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못했다고 보았으며, 거대과학은 소과학(Little Science)과 새과학(New Science) 사이의 중간 단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2차 세계 대전이 과학 성장의 주요 요소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거대과학이 정치적 도구의 기능을 한 것에 주목한 저자들도 있었고, 거대과학과 산업 생산과의 관련을 눈여겨 본 입장도 있었다. 자본화로 인한 과학자들과 생산자들 사이의 분리가 나타나고, 이에 따라 과학행정가들에게 권력이 집중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거대과학과 전쟁이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거대과학은 윤리와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게 되기도 했다.

  

   거대과학과 정치의 관계도 복잡해졌다. 과학자가 과학정책에 비중 있게 관여해야 하느냐 기술적인 전문가로서만 남아있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딕슨(Dickson)은 민주적으로 과학을 통제하는 전략을 제시하려고 했고, 왓슨(Watson)은 거대과학을 일종의 해석적 자원으로 사용했다. 20세기는 제도로서의 거대과학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CERN은 세계 핵물리학자들의 집합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거대과학은 과학적 활동의 제도적 조직을 재조직화했고, 거대과학 자체는 재정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요소들 때문에 재조직화되었다. 또한 거대과학은 일종의 문화로서 등장했으며, 일종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거대과학과 관련된 규모의 드라마를 탐구할 수 있을까? 거대과학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거대해진 것일까? 분석가들은 거대과학 형성에 있어 거시적 요소들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거대과학은 근대과학 이후 과학의 점차적인 규모 확장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거대과학은 20세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19세기 초의 전기화학에서 보여주는 대규모 전지 설립(험프리 데이비에 의해)은 거대과학의 또 다른 예이며, 계몽시대의 백과전서 편찬 작업 또한 일종의 거대과학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다윈과 린네 시대에 있었던 과학자들 사이의 활발한 서신 왕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거대과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거대과학 그 자체를 생성시킨 것과는 분리되는(구분되는) 거대성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저자들은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거대과학에 대한 지금까지의 분석과는 다른 새로운 분석틀을 제안한다. 지식의 추상적 구조가 아닌 사회적 실천으로서 과학을 파악해야 하며, 거대과학에는 집중적 거대과학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분산적 거대과학도 존재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술적 변화의 동역학에 주목해야 하며, 과학과 경제 사이의 상호작용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섀핀과 섀퍼는 17세기 영국에서의 지식 생산의 기법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인 바 있으며(리바이어던과 에어 펌프), 저자들은 앞으로의 분석이 이렇듯 거대과학이 생성되게끔 한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