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21: 생체기술, 특허, 정치학

강형구 2016. 5. 1. 06:02

 

생체기술, 특허(patent), 정치학(politics)

 

  

케이(Kay),사이버네틱스, 정보, 생명 : 유전에 대한 기록적 표상들의 출현

콜러(Kohler),초파리 : 실험실의 생명

고딜리에르(Gaudilliere),생체기술계의 전역화와 규제

부고스(Bugos) & 케블스(Kevles),지적 재산으로서의 식물

아비르암(Abir-Am),큰분자의 정치학

 

   독서를 늦게 끝마쳤기 때문에(지금 시각 오후 35, 수업은 오후 4시 시작이다) 아주 간략하게 독서소감을 쓰겠다.

 

  

   케이는 사이버네틱스를 담론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노버트 위너 등으로부터 개발된 새로운 담론인 사이버네틱스는 세계 2차대전이라는 전쟁의 맥락에서 파생되었다. 2차대전을 통해 적의 미사일을 요격하는 방법, 움직이는 적의 공격무기의 위치를 탐지하는 방법, 정보를 전기 신호로 암호화해서 전달하는 방법, 적의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 등과 같은 고도의 전쟁 기술들이 수학자, 물리학자 등을 통해 개발되었고, 이러한 기술 개발의 과정 속에서 정보 이론, 되먹임 작용, 통제 개념이 배태된다.

  

   이후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담론을 창시하고, 이 담론을 형성하는 데 여러 분야에 속한 과학자들이 참여했다(수학자, 물리학자, 신경생리학자,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등). 이 담론에서 핵심적인 개념들인 정보, 되먹임, 자율적 조절 등은 당시의 각종 분야들로 확대된다. 특히 분자유전학의 경우, 새로운 생물학자들은 사이버네틱스의 개념을 차용해서 유전정보를 일종의 정보로, 메시지로 이해하려고 했다. 사이버네틱스 담론을 생물학 탐구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생물학적 현상을 사이버네틱스적 개념들과 대응시키려는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사이버네틱스 담론은 지배적 담론의 차원에서 생물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들(사회학, 경제학 등등)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이 담론이 실질적인 과학적 활동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에피스테메, 담론의 차원에서 사이버네틱스를 분석하는 것은 적절하고 유효한 접근이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가 담론의 차원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케이의 평가가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인공생명, 인공지능의 영역에는 사이버네틱스가 담론의 차원을 넘어서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고 판단할 수 있다.

 

  

   콜러의 논문은 매우 흥미로웠다. 콜러는 실험실 연구자들과 초파리의 관계를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자연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해나간다. 우선 그는 초파리의 자연사를 간략하게 제시한 다음, 어떤 이유로 인해 초파리가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포함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 및 멘델의 유전비율과 관련해서 다양한 종류의 생물 종들을 키우고 있었다. 처음에 초파리는 그다지 흥미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돼지나 쥐처럼 드러나게 표현형을 보여주지도 않았으며, 다소 지저분한 존재(부패한 음식이 있으면 항상 출현하는)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험실 생물학자들은 초파리를 잘 사용하지 않았으며, 신참 연구자들이 연구에 익숙해지는 방법으로 사용하게 하거나, 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목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초파리의 경우, 번식 속도가 빠르고 대량의 자손들을 생산하며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최초에 모건은 멘델의 유전비율을 탐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초파리 실험을 한 것이 아니었다. 모건은 실험 진화론의 대상으로 초파리를 다루었다. 모건은 번식 속도가 빠르고 다량으로 자손을 생산하는 초파리들을 관찰함으로써, 초파리들이 진화를 위해 요구되는 변이를 보여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실험실 초파리들을 야생 그대로라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실험실에서 육종된다 하더라도, 돼지나 쥐와는 다른 의미에서 초파리에게 실험실은 야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 초파리의 생존 환경이 실험실이나 실험실이 아닌 공간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건은 초파리들 사이에 변이가 확인된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나, 변이의 수와 종류가 너무나 다양했고 이는 곧 이 변이들이 진화론의 의미에서의 변이가 아님을 의미했다. 초파리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변종들은 성 결정론, 멘델의 유전 비율 등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으며, 모건은 곧 실험 진화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전학을 위해서 초파리 연구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왜 모건이 초파리 연구를 통해서 유전을 연구할 수 있었는지를 자세하고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과학사 논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화라고 해도 단일한 세계화가 아니다. 고딜리에르는 이런 주장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국가에 따라서 생체의학의 실천 양상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유방암 유전자 검사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전문가 집단의 감시를 통해 수행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이 검사가 Myriad 회사를 통해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GMO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전문가 집단의 감시 하에 이와 관련된 각종 까다로운 규제가 행해진 반면, 미국에서는 별 규제 절차 없이 유통되었다. Myriad 회사의 경우, 생체기술을 상업화하고 독점화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챙기기를 원했고, 프랑스 전문가 집단은 생체 기술의 위험성과 상업성을 감시하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규제를 만드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프랑스 농민들에게 GMO는 곡물 시장에 대한 미국의 잠식 의도처럼 여겨졌으며, GMO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 또한 GMO를 규제하게 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서로 다른 사회정치적 문화 속에서 BRCA(유방암 유전자 검사)GMO에 대한 논쟁이 서로 다른 결과를 도출하게 되었다. 모든 국가들에 세계화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나라에게 세계화가 필연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세계화가 국소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자 한다.

 

   부고스, 켈브스의 논문은 길기도 하고 지루했다. 잘 이해하지 못했고, 기억나는 바도 별로 없으니 딱히 쓸 내용도 없다. 미국에서 다양한 식물들이 여러 가지 이유들(육종자들의 권리 및 이익, 식물의 상품화 등) 때문에 일종의 지적 재산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논문이다. 이 과정에서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 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저자들이 강조하고자 하는 점이다.

 

   아비르암의 논문은 부고스, 켈브스의 논문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읽혔다. 20세기 중반 분자생물학의 출현을 놓고, 분자생물학자들과 생화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흥미로웠다. 분자생물학자들의 경우 국가 정책과 긴밀히 결합하여 분자생물학을 새롭게 등장한 학문으로, 분자 수준의 생명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생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옹호하려 했던 반면, 생화학자들은 이러한 분자생물학의 등장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생화학자들이 보기에 분자생물학이라는 독립적인 분야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자생물학은 생화학으로부터 파생된 학문일 뿐이다. 분자생물학자, 생화학자 모두 실제 과학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서로 적대적인 학문의 정당성을 부정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는 분자생물학이 생물학에서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생화학자들은 당시 등장하고 있던 새로운 개념틀, 즉 사이버네틱스 담론에 입각해서 생명 현상을 일종의 정보 전달로 이해하려는 개념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나는 논문 막바지에 등장하는 생화학자 샤르가프의 이야기에 애착이 갔다.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 서양 학문을 주도하던 것은 영국, 프랑스, 독일이었다. 2차대전을 통해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미국은 학문의 중심지가 되지만 미국의 학문은 그 실용성과 천박함 때문에 유럽 학자들의 조롱 대상이 되었다. (미국의 실용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샤르가프 또한 정치경제적으로 상품화되고 거대화 된 분자생물학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생물학은 미국 주도의 풍토에서,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분자생물학이아니라 생화학이라는 믿음을 고수한다. 물론 그의 입장은 이후 점차 사라지기는 하지만, 나 또한 여전히 미국 주도의 학풍이 과연 깊이가 있고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학풍에 익숙해지면서 회의적인 입장이 조금씩 누그러들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