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13: 근대 초 과학, 사회, 종교

강형구 2016. 4. 22. 06:15

 

제14: 근대 초 과학, 사회, 종교

 

개리 아브라함,머튼 논제에 대한 오해 : 역사와 사회학의 경계에 대한 논쟁

 

   머튼 논제. 저자는 머튼 논제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논문을 시작하고 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에 의하면 자본주의 발전에 프로테스탄티즘(청교도주의)이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다. 베버의 주장은 사회 발전에 문화적 요소가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7세기 영국 사회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과학 활동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머튼의 논제도 베버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개인의 종교적인 측면에도 도움이 된다는 견해, 특히 과학적 활동이 종교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견해가 당시의 영국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 과학적 활동이 개인에 대한 구원의 확실성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다만 베버의 주장이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고 있다면, 머튼의 주장은 사회문화적 차원에 적용되며 그런 의미에서 주장의 외연이 더 넓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는 과학이 신의 영광을 합법화시키는 활동이며 사회 진보의 추동력이라고 생각했다. , 직업으로서의 과학이 지닌 개인적사회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머튼 논제에 대한 역사가들의 반응.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머튼의 종교개념을 협소하게 해석함으로써 머튼의 주장을 오해했다. 머튼의 종교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특정한 종교가 한 사회의 가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제도의 측면’, ‘행위의 유형’, ‘행위의 규제라는 세 가지 모습을 통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과학은 일종의 사회적 가치였다. 문화적 신사들은 과학을 교양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문학가들도 과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대학에서도 과학과 관련된 직위의 수가 증가했다. 이러한 배경은 과학 발전에 필요조건으로 기능했다. 과학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인 요소로 설명하려는 시도(힐과 커니)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종교적 교리가 사회적윤리적 결단(commitment)과 함께 과학적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것이 머튼 주장의 핵심이다. 과학이 사회 전반적으로 수용된 모습을 살펴야 하며, 과학과 관련된 표면적인 사항들(왕립학회의 설립 등)만을 살펴서는 안 된다. 과학은 종교의 교리 차원을 넘어 하나의 행동 양식으로서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머튼 논제를 평가하기.

 

스티븐 샤핀,머튼 논제 이해하기

 

   파레토 사회학은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등장했다. 파레토 사회학은 사회적 행위에 있어 비합리적, 비논리적 요소인 감성(sentiment)을 도입하고자 한다. 종교를 단순히 과학 외적 요소로 취급하면 안 되며, 과학자들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무의식적인 추동 요소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정신적 요소와 행위는 사회적 활동에 있어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단순히 관념으로서만, 물질로서만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되며, 두 가지 요소를 조화시켜야 한다. 머튼의 논제는 과학과 종교가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경험적 탐구를 촉발시켰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과학은 특정한 사회의 문화적이고 물질적인 조건 하에서만 발전한다.

 

데이빗 윌슨,갈릴레오의 종교 대 교회의 과학? 과학과 종교의 역사 다시 생각하기

 

   들어가는 말.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 한다. 과학과 종교 개념은 해당 사례에 적합하게 사용해야 한다. 갈릴레오의 재판은 1633년에 이루어졌고, 5년 후 그의새로운 두 과학이 출판된다. 티코 브라헤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쏜 대포알의 움직임 및 광행차를 관측할 수 없음을 근거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신플라톤주의, 태양 숭배, 우주의 기하학적 조화(정다면체)를 믿었던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받아들였다.

  

  갈릴레오의 코페르니쿠스 주의 연대기. 1597, 갈릴레오가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옹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갈릴레오는 조수 현상을 관찰하고 나서 지구의 회전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1600년 경 갈릴레오는 운동에 대한 새 이론을 수립하고, 그의 낙하법칙 및 투사체의 경로가 포물선임을 밝혀낸다. 1610별의 메신저에서 그는 달 표면의 굴곡 및 목성의 4개의 위성 등의 내용을 출판한다. 1613년 그는 태양의 흑점, 금성의 식 현상에 관련한 내용을 출판하며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옹호한다. 1615년 크리스티나 대공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는 카톨릭에 반하여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연 갈릴레오의 교회 사이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갈릴레오의 코페르니쿠스 주의. 경험주의에서는 지식의 타당성이 경험과의 합치 여부에 의존한다고 본다. 천문학적 관측 사실들이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했다. 갈릴레오의 운동 이론 또한 코페르니쿠스 주의의 결정적 증거는 아니었다.

  

  수리미학적 합리주의. 이성주의자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데카르트). 수리미학적 합리주의에서는 단순성(Simplicity)을 중요시 한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모든 천체를 발광체와 비-발광체로 구분했으며, 이 체계에 따르면 행성의 주기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었다. , 미적으로 단순하고 우아했다. 따라서 갈릴레오는 지구 회전에 따른 조수 이론이 실제 조수 현상과 일치하지 않아도 자신의 이론을 고수했다. 당시 조수 현상을 설명하는 다른 이론들이 있었으나(케플러와 데카르트) 갈릴레오는 그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수에 대한 갈릴레오의 논변은 수리적 합리주의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갈릴레오는 아마도 조수 이론의 수학적 우아함 때문에 자신의 이론을 고수했을 것이다.

  

   계시. 갈릴레오는 계시가 아닌 관측과 이성을 통해 자연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서의 내용을 코페르니쿠스 주의의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했으며, 신과 동등하게 인간 또한 자연의 수학적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카톨릭 교회의 응답. 카톨릭에서는 갈릴레오의 성서 해석을 반대했고, 코페르니쿠스 주의는 경험적으로 지지되지도 않는다고 판단했다. 교회는 인간이 신과 동등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으며, 조수 간만 현상도 갈릴레오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았으며 이는 코페르니쿠스 주의가 경험과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결론. 갈릴레오의 수리미학적 합리주의, 인간이 신과 동등하게 수학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교회는 수용하지 못했다. 교회는 성서를 경험에 근거해서 해석하려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갈릴레오가 교회보다 더 종교적이었으며 교회가 갈릴레오보다 더 과학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리스 피노키아로,과학, 종교,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역사적 서술

 

   최근의 역사 서술적 비판. 과학과 종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종교 인사 중에서도 갈릴레오에게 도움을 준 인물들이 있었고, 과학자들 중에서도 갈릴레오를 비판한 사람들이 있었다. 과학과 종교라는 구분에다, 보수적/진보적 태도라는 분류 기준을 더해서 살펴야 한다. 갈릴레오의 과학과 철학이라는 대립 구도 또한 부적절하다. 갈릴레오를 반대하는 철학자들과 지지하는 철학자들이 모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보수적/진보적 태도의 기준을 첨가해야 한다. 종교 내에서도 보수적(도미니크 수도회)/진보적(예수회) 진영이 나누어져 있었다. 대립 구도를 단순하게 설정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교황 존 파울의 조화 논제. 갈릴레오의 사건은 과학과 종교의 조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갈릴레오의 신념은 종교적인 것이었고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 같은 대립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탐구 대 성서적 진술이라는 대립은 여전히 남는다. 갈릴레오의 경우 성서의 내용이 오히려 지동설과 합치한다고까지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장차 증명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교황 파울의 해석이 부분적으로는 옳다고 하더라도 갈릴레오와 교회의 대립은 여전히 유효하다.

  

   몰푸고-타그리아부에(Morpugo-Tagliabue)의 조화 논제. 후기에 들어 갈릴레오의 인식론이 오류주의적, 확률적, 가설적 인식론으로(실재론적 입장을 유지하면서) 변화했다는 견해. 교회의 비판이 갈릴레오로 하여금 결정적인 증명을 찾도록 만들었다고 본다.

  

   파이어아벤트의 성직자 옹호적 해석. 파이어아벤트는 전문가 갈릴레오인문적사회적 가치를 근거로 전문가의 견해를 평가하는 교회사이의 대립 구도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해석은 해당 문제(우주의 구조)에 관계되는 전문가는 과연 누구였나 하는 의문을 남긴다.

  

   갈릴레오는 이단이었나? 갈릴레오의 유죄 판결은 그가 교회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코페르니쿠스 주의에 대해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단 선고를 하지 않았다. 특정 견해를 갖고 있는 것그 견해를 옹호(방어)하는 것사이를 구분할 수 있다면, 갈릴레오가 지동설이라는 견해를 단지 갖고만 있었는지 적극적으로 변호했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역사적 서술에 대하여. 갈릴레오의 재판이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이었다는 것은 최소적인 논제에 지나지 않는다. 비비아니가 쓴 갈릴레오의 전기는 신화적이었다. 살루버리는 교황이 화가 나서 갈릴레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 해석한다. 그 밖에 휴얼의 해석.

  

   에필로그. 갈릴레오의 재판,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보여주는 교훈은, 각 역사가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과학과 종교의 개념을 끌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대립 해석과 조화 해석 둘 다 유지하기 힘들다. 이 사건을 너무 단순화시켜서는 안 되며, 이 사건이 보여주는 표면적인 대립 아래에 어떤 심층 구조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데이비드 린드버그,갈릴레오, 교회, 우주

 

   갈릴레오 사건에서 논쟁의 주체개념이 아닌 인간이었음을 명심할 것.

  

   태양중심설. 기본 전제는 동일했다. , 2개 이상의 균일한 원운동을 통해 불규칙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톨레미 체계는 이심원과 등각속도점을 도입했다. 반면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단순성, 질서, 정합성, 이해가능성 등의 측면에서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일상 경험과 불일치한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을 부정한다는 것, 천상계와 지상계 구분을 없앤다는 것, 광행차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등의 난점이 있었다.

  

   갈릴레오와 태양중심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하늘로 돌렸다. 달 표면의 굴곡, 금성의 식 현상, 목성의 위성 4개를 발견했다. 천문학적 관측 사실들이 갈릴레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지동설을 지지하게끔 만들었다. 달도 지구와 유사했으므로, 달과 마찬가지로 지구 또한 우주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목성에도 위성이 있지 않은가? 지구 또한 목성과 유사하게 우주의 중심이 될 필요가 없다. 금성의 식 현상도 태양중심설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결정적인증거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논증은 (감정적 차원에서) 상당한 설득력과 위력을 가졌다.

  

   대립의 시작. 당시 프로테스탄트 개혁으로 인해 카톨릭이 더 강경한 보수적 입장을 취하게 된 상황이었다. 교회는 천문학적 관측 사실은 받아들였으나 지동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1613년 갈릴레오가 편지에서 주장한 태양중심설 옹호는 교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 성직자들은 갈릴레오를 고발하기까지 했다. 로마에서의 갈릴레오의 논변은 교회를 설득하지 못했다. 인식론적 권위의 문제, 즉 우주론적 주장은 과학에 의지해야 하는가 성서에 의지해야 하는가의 문제 또한 제기된다. 교회 측에서는, 인간으로서는 하늘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갈릴레오는 이단으로 선고 받지 않았으며 다만 경고를 받았을 뿐이었다(1616년 경).

  

   두 가지 주요 세계 체계에 대한 대화. 우르반 8세가 교황이 되었다. 그는 갈릴레오를 경애했던 갈릴레오의 친구였다. 갈릴레오는 이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 그는 태양중심설을 단지 가설의 차원에서 주장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의 저서에서 이를 단지 가설이 아닌 진실로서 주장한다. 그의 책은 교회의 정식 허가를 받아서 출판된 것이었다.

  

   재판과 신념 철회(recantation). 출판 당시의 여러 정황들이 갈릴레오에게 불리했다. 교황은 갈릴레오의 저서를 읽고 몹시 화가 났다. 그는 자신이 갈릴레오로부터 기만 당했다고 생각했고, 결국 갈릴레오는 재판을 받는다. 갈릴레오는 이단이 아니라 불복종으로 인해 처벌받게 되었으며,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설을 옹호할 의도가 없었고, 실은 톨레미의 체계를 믿고 있었다고 변명하였다.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그는 가택 연금으로 판정되었고, 이후에는 직접적으로 우주론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론. 이 사건에는 다양한 층위의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우리는 갈릴레오 사건을 그 당시의 맥락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던 인식론적 권위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진화론과 창조론).

 

지오바나 페라리,공공 해부 강연과 카니발 : 볼로냐 극장에서의 해부

 

   볼로냐 해부 극장에서는 카니발 시기에 맞춰서 해부를 실시했으며, 이때의 해부 강연은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극장이 다채롭게 꾸며졌을 뿐만 아니라 사회 유명 인사들이 참여했고,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해부가 실시되었으며, 그로부터 다양한 교훈이 도출되었다. 이는 당시 볼로냐의 중요한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과연 이러한 공공 해부의 특징은 무엇이었나? 대체 왜 행해졌나? 그리고 왜 카니발과 병행해서 행해졌나? 공공 해부 제도의 역사와 그 의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14세기에는 미래의 의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해부가 실시되었다. 병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서, 혹은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서 해부가 실시되었다. 당시에는 볼로냐에서 30말일 이상 떨어진 곳에서 시체를 구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인쇄술, 삽화술의 발전에 의거해서 인체의 본성을 탐구하는 해부에 대해 광범위한 계층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해부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존재했고, 해부를 언제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도 제시되었다. 공공 해부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베네데티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공공 해부는 일종의 의식으로 절차에 맞게 공적으로 행해지게 된다. 의학적 교육이 주요 목적이었던 해부의 성격이 점차적으로 변질된다. 또한 해부 강연에서의 관람객 수가 증가하는 이유 또한 복잡해진다.

  

   3. 해부 강연자가 대학 내에서 독자적이고 영속적인 자리를 획득한다(아란치오의 경우). 해부 강연은 카니발 축제 기간에 행해졌으며, 기존 교수진(학자들)의 제한 대신 정치가들과 합의하여 해부가 시행된다. 아란치오는 카니발 기간에 독점적으로 해부를 수행했고, 이는 기존의 관습에 반하는 것이었다. 해부 강연자 본인이 극장 사용료를 지급해야 하였고, 강연자는 해부 도중 제기되는 질문들에 대해 답변해야 했다. 이후 공공 해부는 공금에 의해서 지원된다.

  

   4. 이후 새로운 해부학 극장 건립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당시에는 재정의 문제가 중요했다. 공공 해부는 대학 선전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7세기에 새로 설립된 해부 극장의 구조는 공적 논쟁을 위한 설계를 반영했다. 해부 극장의 구조는 기능적 요구와 관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해부 극장을 당시 최초로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1627년에는 레반티가 건축을 담당했다. 새 해부 극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천장이었으며, 그 밖에도 각종 목적을 위한 다양한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해부 극장은 상원과 대학의 필요로 인해 건립된 산물이었다. 극장은 교수들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목적이 강했다. 극장 내 자리배정의 규칙은 엄격하게 지켜졌고, 극장은 정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해부학적 증명을 수행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5. 해부 극장의 이상적 모형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해부 극장은 일반 극장에 대한 원형의 기능을 수행했다. 해부학과 건축학 사이에는 개념적이고 인지적인 관계가 있었다. 에스티엔의 경우, 해부 극장도 일반 공연장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극장의 입구, 추구, 자리 배치 등에 신경을 썼다. 당시 해부 극장을 설립하는 데에는 고대의 극장을 참고했다. 실용적인 목적이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설계에 있어서는 고대 문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일반 극장과 해부 극장의 건축 구조는 병행 관계를 이루었다.

  

   6. 볼로냐의 권위자들은 해부를 위해서 극장에 시체를 제공했다. 해부 시에 맞닥뜨리는 질문들에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보수가 높았다고 하더라도 해부 강연자를 찾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연자에 대한 높은 명예와 보수로 인해서 18세기가 되면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7. 극장에서의 해부는 과학적 가치보다는 전시적 가치가 컸다. 생물학의 발전은 극장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공공 해부 강연에서는 과학적, 교육적 효과를 크게 얻을 수 없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까지 공공 해부 강연은 이어졌다. 공공 해부의 기능에 대한 맹공격이 이루어지고, 1800년까지 이어지다 나폴레옹의 대학 개혁에 이르러서야 해부 공연의 전통은 사라진다. 당시에는 해부 극장이 불평등한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반대도 제기되었다. 몬디니의 경우 새로운 해부 극장이 필요하지만, 이전까지의 극장이 가진 무용성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8. 구조적으로 잘 고안된 건물에서, 시의 저명인사들이 참석, 많은 청중들이 참석한 가운데에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해부 및 논쟁이 벌어졌다. 이는 시의 권력에 대한 확립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해부학자들이 공식적 토론을 통해 권력 및 외부 인사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청중들은 해부 강연을 통해 인체를 고안한 신의 완벽성 및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의 헛됨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해부의 도덕적 메시지가 주된 주제가 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반 청중들의 관심을 끈 것일까? 카니발 축제 시기가 일반 청중으로서는 강연에 참여하기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겠는가? 볼로냐가 아닌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공공 해부는 축제, 휴일 기간에 행해져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해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대상을 행해졌다. 당시 관람객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옷으로 가려진 상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신체의 모습에 대한 호기심이 사람들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관심은 당시 공개 처형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던 관심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당시에는 시체를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공동체에 속한다는 관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해부된다는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된다는 의미 또한 갖고 있었다.

  

   미하엘 바흐친은 당시 사람들이 카니발을 통해 기존의 질서가 전복되는 쾌감을 느꼈다는 주장을 펼쳤다. 세계는 붕괴와 생성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흐친의 분석은 당시 공공 해부가 갖고 있던 특성들 중 일부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흐친의 분석은 볼로냐에서의 공공 해부를 분석하는 데에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9. 이전까지 사람들은 죽은 자에 대한 일종의 친화적 감정을 가졌으나, 계몽의 시기에 이르면 사람들은 해부에 대해 당혹스러움과 혐오감을 갖게 되며, 이는 괴테와 루소의 경우에서 살펴볼 수 있다. 18세기, 계몽의 시기에 이르면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선명하게 분리된다. 그리고 시체 및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또한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파울라 핀들렌,카니발과 사순절 사이 : 문화 주변부에서의 과학 혁명

 

   자연과 지식에 대한 근대적 접근의 기원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문제. 과학혁명은 과학사 서술에 있어 하나의 실험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근대성이란 과연 무엇이었는가? 르네상스 후반기에 어떤 것이 자연에 대한 탐구의 동기를 유발시키고 탐구 형태를 빚어냈는가? 해학(comic) 내러티브가 과학혁명을 이해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을 줄 것인가?

  

   호이징가, 바흐친, 과학사. 카니발과 사순절은 상보적 관계에 있었다.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의 개념을 통해 인류의 역사는 유희의 역사로 해석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바흐친은 르네상스를 (중세의 권위에 대한) 풍자 혹은 해학의 시대로 본다. 당시 역설은 기존의 제도와 행동 양식을 비판하는 형태였다. 이후 데카르트의 세계관이 이러한 르네상스의 세계관을 억압하게 된다. 과학에서의 이론적 작업(모형, 가설, 수사적 논증) 또한 일종의 지적인 유희로 간주되었다. 창조 행위는 일종의 신성한 놀이였고, 과학은 신이 인간에게 알려주지 않은 사항들에 대해 추측하는 놀이라는 생각. 17세기에 이르면 과학의 유희적 측면이 억압되고 절제, 인내의 측면(진실)이 부각된다. 17세기에 객관적, 종교적 지식의 상이 새롭게 제시되는 것이다. 뉴턴과 보일의 르네상스 비판에는 카니발을 비판하는 용어가 자주 사용됨을 볼 수 있다.

  

   지식 놀이 즐기기. 르네상스에 유희의 정서는 핵심적이었다. 르네상스 자연학자들은 자연 속에서 해학을 찾았다. 또한 지식 놀이에 참가해야지만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케플러도 유희를 옹호하였으며, 수학이라는 놀이를 통해서만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유희는 모방의 궁극적 형태이자 신성한 예술이었다. 진실은 물리적 원인과 기하학적 지식 사이에서 드러나며, 자유 의지의 문제 등을 다루는 교회는 너무 심각했다! 신학적 문제가 자연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자연에 대한 카니발로서의 과학은 그 종말을 맞는다.

  

   근대 과학의 진지-해학적 기원. 베이컨, 데카르트는 진지한 자연철학을 주장했다. 보일과 렌은 과학을 시장에서 신의 사원으로 옮겼다. 보일은 신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며, 그에게서 자연철학의 해학적 성격은 점차적으로 사라진다. 케플러와 후크는 서로 관점이 달랐다. 케플러는 비일상적인 현상에서 유희와 해학을 찾았지만, 후크는 비일상적이고 유희적인 현상들을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애썼다. 자연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뜻에 복종한다고 생각한다. 이후 영국 자연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대륙의 철학자들도(라이프니츠) 자연의 유희적 성격을 부정하게 된다. 유희적 과학은 비-전문가들에게만 허용된다.

  

   16~17세기까지만 해도 자연에 대한 유희적 태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자연에 대한 진지함은 초기 근대 사회에서 과학적 활동의 의미 있는 지위를 마련하기 위해서 힘들게 고안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