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12: 프란시스 베이컨, 자연 지식의 새로운 이상

강형구 2016. 4. 21. 06:11

 

제13: 프란시스 베이컨, 자연 지식의 새로운 이상

 

윌리엄 이어먼,자연의 비밀에서 공공적 지식으로

 

   전통적으로 지식을 비밀시하는 것은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지식의 공적 성격이 강조된다. 인쇄술은 개념들을 의사소통하는 데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까지 학문적 공동체는 특권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이었으며, 이 공동체에서는 고대의 숨겨진 지혜를 복원하려 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비밀의 책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지식을 통해 물질세계에서 무한히 많은 것들이 가능해진다고 믿었으며, 자연의 힘은 신비에 가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지식의 신비적 성격으로 인해 지식은 소수에게만 비밀리에 계승되어야 하며, 지혜는 대중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전통 또한 이어졌다.

  

   비밀적 지식은 장인과 마술적 전통에서 계승되었으며, 이러한 지식은 감각 혹은 이성이 아닌 경험(experience)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이른바 비밀스러운 것은 오컬트적인 성격에 의해서와 인공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성된다고 보았으며, 비밀적 지식은 과학적 지식과 분리되었다. 감각적 원인 없이 자발적으로 발생하므로 비밀적 지식은 공식적 과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장인, 기술자, 발명가 등은 자신들의 고유한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 지식 공개를 꺼려했다. 르네상스 시대, 근대 초기에는 지적 재산권이 합법화 될 필요가 있었으며, 이 시기에 이르면 지식의 공적 사용 가능성이 대두된다.

  

   지적 재산권은 경제적인 이유 및 기술적 지식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후 지적 재산권의 개념이 확정된다. 과학의 목적과 과학적 지식의 공개에 관한 새로운 태도가 등장하게 되는데, 루스첼리(Ruscelli)Secreti는 실험 아카데미에서 행해진 연구 성과를 출판하는 비밀 집단이었으며, 이 집단은 자연에 대한 해부(Anatomy)를 표방했다. 루스첼리에게서 실험이란 신중하게 시험된 것이었으며, 비밀스럽게 실험을 수행했다. 이 집단은 스스로가 새로운 것을 행한다는 것을, 다른 집단이 자연의 비밀 탐구에 대한 의혹을 가진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루스첼리의 아카데미는 마술에 참여하고 정치적 반역을 꾀한다는 의심 때문에 폐쇄되었을 것이다. 아카데미에서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일반인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에도 여전히 금지된 지식에 대한 탐구에 대한 훈계는 이어졌다. 자연의 신비에 대한 탐구가 기존의 정치종교적 권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6세기가 되면 지식 전파에 관한 전통적인 한계가 다소 완화된다. 이는 마키아벨리와 루터의 저서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인쇄술의 발전이 기존의 장벽을 허무는 데 압력을 행사했으며, ‘출판될 것이냐 사라질 것이냐가 문제가 되게 된다. 17세기가 되면 지식에 대한 제한이 지식의 정체를 일으킨다는 생각이 등장한다. 종교와 국가에 대한 지식을 제외하고 서서히 자연에 대한 지식이 공개되기 시작한다. 과학적 진보의 개념이 등장하고, 과학적 공공성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도 찾아볼 수 있다. 기술적 지식은 개인적 차원을 떠나 누적적으로 발전되며, 기술적 주제에 대해서 쓴 저자들은 지식이 공적이고 상호협력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비밀적 지식은 기존의 계급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데 장애적인 요소라고도 생각하게 된다.

  

   지식은 권력이었으므로 지식의 폐쇄성은 진보 및 자유와 양립 불가능했다. 마술적 지식과 기술적 지식이 구분되었으며, 기술적 지식은 자연 현상의 원인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된다. 기존에는 언어의 사용에 대한 신비적 견해(언어를 통해 사물을 통제할 수 있다)가 있었으나, 17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언어에 대한 신비적 견해가 부정된다(홉스, 베이컨). 베이컨의 과학적 진보 개념은 공적 지식이라는 과학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는 데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과학적 상호협력을 강조했으며, 소수에 의해 형성되고 변동 없는 철학에 대비해서 다수에 의해 형성되고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기술적 지식을 내세웠다. 베이컨의 저작, 특히 그의새로운 아틀란티스는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과학 탐구 조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게 되었다. 공개된 의사소통, 내부적 신뢰비밀 등이 과학 조직의 특성이었다.

  

   베이컨은 공공선을 위해 지식 추구에 헌신하는 과학 탐구자의 상을 창시했으며, 이는 당시에 보편적 지식언어교육을 통해 평화를 얻으려던 청교도 운동과 합치했다. 과학과 교육이 기독교 세계를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등장했으며, 인간의 부와 건강을 위해 각종 실험과 연구가 공적으로 시행되는 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베이컨의 철학은 실험 과학의 발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의 비공식적인 관계를 장려했다. 1662년에 찰스 2세의 허가로 런던 왕립학회가 설립되면서 과학이 공적 지식으로서 제도화된다. 올덴부르그는 과학 공동체의 연구 결과를 상호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전까지는 개인적 서신 교환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다면, 이제는 새로운 발견을 공적으로 발표하고 과학적 논쟁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토론하게 되었다.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과학적 발견의 우선권을 확립하게 되고, 많은 자연철학자들이 이러한 과학적 정보의 의사소통방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665년부터 발간된 왕립학회의 철학회보는 왕립학회가 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과학기관으로 인정받게 했다. 보일과 후크는 기계적 기예가 자연철학에 있어 중요함을 주장했지만, 장인들이 그들의 비밀을 공개하는 것을 꺼려하였으며 국익에도 위배되는 부분이 있었다(선박 제조 기술). 과학에서는 비밀을 거부하게 되었고, 새로운 과학이 제도화되면서 과학이 특별한 형태의 지식이며 대학의 교과 과정과는 다른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왕립학회의 경우, 국가의 안정적 지지가 없고 자발적으로 회원이 되게끔 한 왕립학회로서는 대규모의 연구를 진행하기 힘들었던 측면이 있었다. 과학의 비밀과 공개에 대한 논란은 종교적, 정치적, 제도적, 과학적 차원 모두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피터 해리슨,근대 초기 영국에서의 호기심, 금지된 지식, 자연철학의 개혁

 

   인간의 지식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호기심이 악덕이라고 생각했던 관례를 극복해야 했다. 저자는 호기심이 악덕에서 미덕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다룬다. 과학적 지식을 객관화하고 지식에 있어서의 특수한 분야, 과정, 방법으로 옮겨가게 된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호기심이 인간의 자연적 속성이라고 생각되었고, 다만 호기심이 과도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되었다. 기독교에서는 호기심이 원죄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호기심은 금지된 지식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허영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어거스틴에게서 분명히 드러난다. 호기심은 이단과 관련되며, 악마로부터 지식을 구하려 하며, 아담의 원죄와도 관련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호기심은 가장 큰 죄인 자부심과도 관련되었다.

  

   호기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그리스아랍 문화의 수용과도 결부되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상황이 다소 변하였으나, 여전히 호기심은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16세기 영국에서 청교도주의가 발흥하면서 호기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다시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시각은 16세기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어린 탐구는 죄악인 자존심과 결부되었으며,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모르고 자만심과 허영으로 죄악적인 지식을 탐구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호기심에 의한 지식은 비실용적이며 쓸모없다고 생각되었다. 근대 초기의 저자들도 호기심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호기심에 의한 세계 지식은 신적 지식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이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으며, 적절한 경계선을 초과한 호기심은 악마적 지식으로 이끌 수 있다고도 생각되었다.

  

   점성술과 연금술은 호기심에서 비롯하는 대표적인 학문으로 여겨졌다. 플리니우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자연철학도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의 수사는 지식임을 주장하는 경쟁 상대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 아닌 다른 종류의 지식 추구를 주장할 필요가 생겼다. 유용하면서도, 금지된 지식을 탐구하지 않는 것이 새로운 지식이 만족시켜야 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이러한 기준은 베이컨이 세웠다. 베이컨은 당대의 도덕적신학적 요소들을 고려하여 새로운 종류의 지식 모형을 설립했다. 그는 금지되지 않고, 유용하며, 자비로움의 실천이며, 호기심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지식의 상을 만들었다. 그에 의하면 지식 추구는 호기심이 아닌 자비로움으로부터 비롯된다. 또한 지식은 마음의 즐거움이나 허영심을 위한 것이 아닌, 유용성을 위한 것이다. 그는 인류애, 자비 등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철학을 신성화시킴으로써, 성서에 기반한 철학에 대한 반대를 무마시켰으며, 지식 추구에대해서 도덕적 합법화했다. 호기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도하고 두드리고 찾는 등 자비의 마음에 의해서 지식을 탐구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베이컨은 복지를 위한 과학 프로젝트와 왕립학회의 활동을 합법화했다. 베이컨 이후 더욱 더 공격적으로 자연철학과 호기심을 합법화하려는 경향이 생겼으며, 홉스는 호기심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일 뿐만 아니라 짐승과 인간을 구분짓는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홉스에 이르면 호기심이 탐욕과 경이에 결부되었으며, 호기심이 도덕적 부담에서 해방되게 된다. 데카르트도 호기심은 지식 추구에 있어 자연적이고 필수적이라고 보았으며, 중요한 것은 호기심을 적절히 규제하는 것이었다. 밀턴에서도 호기심은 무해한 것으로 그려지며, 기계적 철학자들(보일, 클라크, 타이슨) 또한 호기심을 높게 평가하며 지식 탐구는 자랑스러운 활동이라고 주장했다.

  

   로크 또한 반대자들에 대항해서 지식 탐구를 옹호했으며, 새로운 철학의 옹호자들은 적의 수사적 무기를 차용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보일에게서 자연철학은 회의주의와 호기심 사이에서의 조심스러운 균형 잡기였다. 호기심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합법화되었으며, 자연 지식이 신학적 유용성을 가진다는 물리-신학적 논증이 보편화된 것과 호기심의 합법화가 연관된다. 호기심에 대한 17세기의 양가적 태도가 18세기에 이르면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바뀐다. 흄은 지식이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으며, 호기심은 악덕에서 미덕으로 변신을 완성하게 된다. 자연철학에 대한 성서적 해석이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 지식 획득이 지식 추구자의 도덕성 및 방법과 연계되었으며, 이후 지식 획득은 점차적으로 방법과만 연계된다. 지식 추구에 있어 점차적으로 도덕적 유용성과 분리되었다. 이렇듯 감수성의 변화사를 살펴보는 것은 과학사를 더 심오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발바라 샤피로,사실개념의 법적 기원과 문화적 전파

 

   저자는 사실개념이 진화했다는 것, 이 개념이 영국 자연철학에 도입된 과정, 법률에서 이 개념을 차용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우선 법률과 사실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로마법 전통에서는 합리적 심문과 증인(증거) 제도가 실행되었다. 사실과 법이 구분되었고, 사실은 개별적인 행동이자 믿음이며 판단의 토대가 되었다. 공통법 체계의 세 측면으로, 사실의 문제가 법적 문제와 구분되었고, 사실 판단자로서의 배심원 제도가 발전되었으며, 공정한 공적 심의와 판단에 가치를 두었다. 사실의 문제와 법적 문제 구분의 전통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실은 개별적 사건, 행동을 지칭했고, 이때는 이러한 사실이 벌어질 수 있는 정황이 고려되었다. 정황으로부터의 추론도 가능하였으나, 직접적인 증인에 의해 보장된 사실을 선호하였다. 판단에 있어 증인은 매우 중요하였으며, 배심원들이 증거를 판단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배심원들이 공식적 인도를 받은 것은 아니며,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믿을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했다.

  

   소수보다는 다수에 의해, 미심쩍은 자보다는 믿을 수 있는 자에 의해, 이익에 관계되는 자보다는 이익과 무관한 자에 의해 증언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했다. 초기 영국 과학에서 공정성무관심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법률에서의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결과일 수 있다. 16, 17세기가 되면 법적 절차를 통한 사실확인이 보편화되고 다른 종류의 지식 영역에도 이 개념이 전파된다. 객관적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역사에서도 법률적 개념과 절차를 차용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역사 서술에 있어서도 법률적 범주를 사용했으며, 역사가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주장하며 역사와 법률이 개념과 범주를 공유해서 사용함을 확인할 수 있다. 셀던은 참된 역사와 거짓된 역사를 구분했으며, 역사가들은 증거와 사실 및 공정성과 무관심을 주장했고, 이를 법정에서의 배심원과 연관시키기도 했다. 역사가가 단지 사실만 기술해야 하느냐 아니면 사실에 대한 이유 및 설명을 제공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대부분은 전자를 선호했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추측이라고 명명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사실 제공을 넘어 이유와 설명을 하려 했으며, 가설의 바람직함은 제시된 사실의 확실성을 근거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사에서도 사실의 문제가 중요시되었다. 지지학은 증거의 평가 개념이 자연현상 및 사건에 적용되게끔 하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지지학에서도 증인의 신뢰성, 문헌적 증거, 증거의 입증 등이 중요시 되었다. 법적 개념들과 절차들이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으로 자연 현상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추측이다. 지지학에서도 정확한 정보, 공정한 판단이 중요하였고, 왕정복고 시기에 이르면 사실의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수용된다. 법률에서의 사실개념이 자연철학에 도입되었는데 이에는 베이컨의 공로가 컸다. 베이컨이 제시하는, ‘사실을 만족하기 위해 필요한 기준들(증인, 증거 등)은 법률에서의 기준들과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자연적 사실 또한 증인 및 증거에 의해서 그 신뢰성을 평가 받게 된다. 새로운 철학은 사실에 기반하고, 사실은 관측과 실험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또한 보고자들이 사심이 없고 보고 내용이 충분해야 수용되었다.

  

   자연사에 있어서도 사실과 사실의 이유 혹은 설명을 구분하였는데, 이때도 일차적 증인 및 믿을 만한 증거 등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정황에 의한 추론보다는 증거에 의해 수립되는 사실이 더 뛰어나다고 판단되었으며, 가설은 사실 만큼의 확실성을 얻기가 힘들다고 생각되었다. 가설을 사실에 근거해서 잘 수립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보일에게서도 법률적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는 사실에 대한 지식이 개인적 경험, 역사적 경험, 신학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보일이 법률적 개념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실험철학에서 증인의 사회적 지위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제도적 절차가 법률에서 자연철학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이성이 감각에 우선하고 가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생각이 우세했으나, 이후 사실과 가설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등장하며, 사실과 가설들에 대한 동등한 믿음이 보일의 실험철학에서 보여진다.

  

   신학자들 또한 사실개념을 받아들였다. 성경에 대한 믿음의 합리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증인과 사실을 강조했으며, 이는 성경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설에 대비되는 사실의 강조는 로크의 철학에 반영되었다. 그에 의하면 확실성의 근거는 개인 혹은 타인의 지식, 관찰, 경험이었다. 로크 또한 법률적 절차를 도입하며 사실의 확실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는 개별적 사실들이 시민적, 자연적 지식의 의심할 수 없는 토대라 여긴 것이다.

 

마이클 헌터,왕립학회의 중요성

 

   왕립학회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왕립학회는 중요했지만 왕립학회가 표방한 것과 실제 역사 사이의 차이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왕립학회가 베이컨의 상호 협력적 귀납 프로그램을 표방하고 수행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견해는 너무 소박하다. 당시의 과학적 성과들과 왕립학회 사이에는 형식적 연관만이 있었을 뿐이라는 비판이 있다. 또한 왕립합회는 일종의 사교집단(모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학회는 1650년 경 여기 저기에 퍼져 있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런던의 클럽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과학 활동을 더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과학기관을 제도화하려는 열망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또한 당시 학문의 진보는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도 생각했다(베이컨의 책새로운 아틀란티스의 영향).

  

   왕립학회는 공식화된 기관이 되기 위해서 제도와 형식을 갖추려고 하였고, 법적 구조, 간부의 선출, 관련된 자금 및 재산에 대한 사항 등이 제도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저명한 과학 실천가들을 회원으로 포섭하려고도 노력하였다. 학회는 지식의 진보를 위한 종합의 역할을 하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표방하며 방대한 양의 사실을 수집했다. 더 나아가 학회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 아니라 과학적 탐구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곳이었다. 왕립학회를 위해 일하는 과학자를 선출하고, 운영비는 기부에 의해서 충당되었다. 학회와 연관된 단과대학을 설립하려고 시도하였으며, 학회를 자발적 참여자들의 모임 이상으로 격상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는 다른 조직과의 마찰을 빚게 하기도 했다. 대규모의 지원을 통해 학회를 확고하게 설립하려는 시도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왕으로부터도 충분하는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는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왕립학회의 재정은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되었다. 아마추어 회원들의 대대적 영합으로 재정 상태가 다소 양호해지고, 이를 토대로 학회 과학자들에게 급여도 지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학회의 재정 상태 및 도서 보유량 등은 열악한 상황이었으며, 학회의 가치가 인정받을 경우 사회로부터 재정을 안정적으로 지원 받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신념을 가졌으나, 학회의 적극적 실험 횟수는 점차로 줄어들고, 다만 과학 성과를 보고하거나 논쟁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상호 협력적 과학 연구를 표방했으나 제도화만 되고 전문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러한 연구가 추진되기 어려웠다. 높은 계측의 회원들은 실험보다는 토론을 선호했고, 학회의 과학 활동은 전문가보다는 대중을 대상으로 했던 것도 원인이 되었다. 학회에 이른바 신사들이 참여하여 사소한 토론을 늘어지게 하곤 했고, 왕립학회 내에서 개인 간의 갈등도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1700년까지 지속되고, 초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회원들은 이후 모임에 간헐적으로 참석 및 탈퇴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왕립학회가 런던에서 제도적인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학회는 과학 활동의 중심체 역할을 할 수가 없었으며, 학회와는 별도로 개인적 차원에서 과학 활동이 수행되었다. 학자들은 다른 종류의 과학 기관(제도)와 연계하여 과학 활동을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학회를 20세기적인 전문 제도로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학회 참가자들이 단일한 철학적 이념을 갖고 있었던 것 또한 아니었다. 학회에 대한 외부적인 평가는 과장된 측면이 많았다. 물론 학회는 왕의 지원에 근거해 제도화되었으며 새로운 과학을 표방했다. 저명한 인사들을 영입함으로써 과학의 위상을 높인 것 또한 사실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과학자들의 연구를 자극하고 출판하고 정리하는 것에 왕립학회가 적합했다. 이는 올덴버그가 이룬 성취였다.

  

   올덴버그는 과학자 관계망의 중개자 역할을 했으며, 그의 서신 교환은 과학사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올덴버그는 학회의 권위를 안고 서신 교환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만큼 공신력이 있었다. 올덴버그는 과학자들의 발견을 공개적으로 출판하는 것과,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연구 결과를 상호 교환하는 것을 장려했다. 그가 수립한 서신 교환의 전통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665년에 창간된 철학회보도 매우 중요했다. 회보의 영향력은 상당했으며, 왕립학회와는 별도의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대해 의사소통하는 적절한 장의로서의 철학회보의 명성은 영국을 넘어서서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회보는 광범위한 독자들을 그 대상을 하였으며, 비전문인과 소수자들의 과학 탐구를 장려하기도 했다. 올덴버그는 과학의 적합한 역할 및 사실과 가설에 대한 베이컨의 견해를 회보를 통해 대외적으로 표방하고, 그의 사후에도 이러한 전통은 이어졌다.

  

   올덴버그의 서신 교환이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었고 철학회보와 유사한 간행물들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나, 왕립학회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다른 간행물들은 회보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다양한 학회들이 왕립학회를 모델로 해서 수립되었다. 후발 학회들은 왕립학회에 대한 존중을 보였고, 내부적이고 제도적으로는 위태로웠으나 왕립학회의 사회적 명성은 높아졌다. 후크는 학회의 성과물을 학회원들에게만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런던 회합에서 실행되는 일들이 과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이는 서신교환 및 철학회보 등과 같은 과학적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존 게스코이그네,과학 혁명에 있어 대학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

 

   과학혁명은 옛 지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려고 시도하였므로, 옛 철학을 고수하던 대학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16, 17세기 과학 형성 및 전파에 있어 대학은 부정적 역할을 했다는 통념이 있다. 그러나 과학자의 87퍼센트가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중 45퍼센트가 대학에서 일을 했음을 감안한다면, 과학혁명에 있어서 대학의 역할을 재점검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근대 초 대학 교과과정에 과학연구의 토대가 되는 세 과목이 편성되어 있었다. 자연철학, 수리과학(4: 대수, 기하, 천문, 음악), 자연학이 그것이다. 의학에서는 고전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체에 대한 실험을 실시하였으며, 학문의 독자성 강조로 신학과 기타 과학들이 분리되고, 자연철학과 수학의 통합이 서서히 이루어지게 된다.

  

   근대 초 스콜라 철학이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로만 만연했던 것은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 및 새로운 과학의 내용도 언급되고 있었다. 갈릴레오 또한 기존의 스콜라 전통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월리스는 갈릴레오를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라고 평가한다. 새로운 과학을 전통 철학에 포함시키려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노력은 새 과학의 내용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편의에 의해서 전통적인 교수법 및 교과과정을 유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상 또한 가르쳤다. 전통적 방법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새로운 과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수용되었다.

  

   데카르트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관련지으며 데카르트주의를 광범위하게 받아들였으며, 신학 및 교회에서는 데카르트주의의 도입을 반대하였으나, 학문의 자율성 강조로 인해서 결국 데카르트주의는 자연철학에 수용되었다. 17세기 말이 되면 유럽 전체를 걸쳐서 대학이 데카르트 자연철학 및 그 결론들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기에 이른다. 뉴턴 또한 대학에서 데카르트 주의를 공부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대학은 기계적 철학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함축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중심적인 장소가 되었다. 데카르트주의는 문헌에서 권위를 찾는 것을 약화시키고 좀 더 실험과 관측에 개방적인 태도를 조장했다. 자연철학에 실험 및 수학적 원리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 후기 대학에서는 4과 중 천문학을 강조했다. 대학에서 수학 교수직이 많아지고, 이는 대학이 지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했음을 뜻한다. 폴바흐와 레기오몬타누스는 고대 그리스 수학에 대해 관심을 보였고, 부유한 인문주의자 후원인 또한 수학과 같은 고전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므로,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 수학의 중요성이 보편화되고 수학 교수직이 정식화된다. 인문주의적 대학 개혁을 통해서도 수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클라비우스는 유클리드 기하학, 천문학을 강조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이해에 있어서도 수학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라뮈도 수학의 실용적 사용을 강조했고, 스넬 또한 라뮈의 영향을 받았다. 대항해에 있어서도 수학 교수들이 큰 역할을 했으며, 대학 교과과정에서는 지속적으로 수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66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 수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아이작 배로우 또한 대학에서의 수학 교육을 정당화한다. 위에서 언급된 요소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대학에서의 수학 비중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볼로냐 대학에서는 특히 수학이 강세를 나타냈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도 학부생을 대상으로 수학을 가르쳤으며 학생들과 교수들은 수학적이고 천문학적인 주제들에 관심이 있었다. 라뮈의 영향을 받은 독일 대학에서는 수학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졌다.

  

   대학에서 천문학은 수학의 영역에서 가르쳐졌다. 폴바흐, 레기오몬타누스는 인문주의와 기존의 4과 전통을 통합하여 천문학을 종합적으로 편찬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위의 천문학 전통 및 대학에서의 학습을 통해 천문학을 습득한다. 코페르니쿠스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있어서도 대학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 비록 천문학적 계산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대학은 이후 천문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습득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티코 브라헤와 케플러에게도 해당된다. 수학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대학에서 수학이 자연철학에 비해 차지하는 공식적인 위상도 상승할 필요가 생겼다. 대학에서 수학과 자연철학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데카르트주의가 자연철학과 수학의 결합에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 대학에서는 수학에 기반한 물리학이 교육되었다. 자연철학과 천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수학이 필수적이라는 견해가 확립되었으며, 이는 반대를 극복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낸 성과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목적론적인 생물학 연구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의학 교수들은 과학혁명 초기에 의학 교육 및 실천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대학에서 의학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고, 이탈리아 출신 학자들이 유럽 전역의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프랑스 대학에서는 갈렌의 이론을 지지하였으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고전적 아리스토텔레스 전제를 포기하고 자연에 대한 기계적 모형을 받아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