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09: 기계적 철학

강형구 2016. 4. 18. 05:50

 

10: 기계적 철학

 

웨스트팔(Westfall), 기계적 철학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압도적으로 감각적이다. 햇빛을 받으면 따스하고, 봄바람이 불면 그 안에서 향기로운 꽃내음이 느껴진다. 물고기나 개, 새 등과 같은 생명체를 보면 정확히 같지는 않더라도 그것들에 인간과 비슷한 영혼이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느껴진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사람들의 의식은 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 등과 같은 정념들로 가득차 있고 이는 외부 세계와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오늘날 목적론적 세계관 혹은 물활론적 세계관이란 표현은 아주 비과학적이고 원시적인 세계관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아주 상식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잘 부합한다. 오히려 정말 비상식적인 것은 우리가 이른바 과학적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기계적 세계관일 수 있는 것이다.

 

   윌리엄 길버트의 자석에 관하여1600년 경의 자연 철학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는 저서이다. 길버트는 자석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실험적인 연구를 수행했으며, 그의 책은 자기 현상을 체계적으로 파악 및 정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자기 현상은 자연 현상 전체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토대이며, 자기적 인력은 비-물질적이며 형상(form)에 작용하는 힘과 관계되어 있다. 길버트는 자기력은 모든 천체들에 존재하는 보편적 성질이며 자기는 곧 지구의 영혼이라고 생각했으며, 자기력은 전기력과 달리 자발적이고 지구의 자전공전 또한 태양과 지구 사이의 자기적 상호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르네상스 당시의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물활론적 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길버트의 책은 이러한 르네상스 자연주의에 대한 학문적 표현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파라켈수스주의 신학자였던 판 헬몬트 또한 자기력은 자연의 능동적 힘이며, 자연은 이성이 아닌 이해즉각적인 직관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자연의 모든 작용은 마술적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이성합리성논리를 강조하며 르네상스 자연주의를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이성 앞에 명백하다(transparent). 그는 기계적 철학에 철학적 엄밀성을 부여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에 의하면 실재는 사고의 실체연장의 실체라는 두 가지 실체로 구성된다. 그는 활동적인 정신과 불활성이고 수동적인 물질을 명확하게 구분했으며, 근대 과학의 물리적 세계는 엄격하게 후자에만 해당된다고 함으로써 과거 자연 철학과 확고하게 단절했다. 그는 확고한 토대가 되는 이른바 코기토 명제(생각하는 내가 존재함은 명백하다)에 근거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신의 존재를 토대로 외부 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이 때 외부 세계는 이성적 추론에 의해 그 존재와 본성이 밝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외부 세계인 연장과 불활성의 세계는 오로지 (이성적으로 추론된) ‘물리적 필연성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일종의 기계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물질 세계에서의 운동의 핵심은 관성의 원리이며 정신적인 원인은 개입될 필요가 없다. 물질은 운동량을 보존하며 오로지 충돌에 의해서만 서로 작용한다. 데카르트에게 관성 운동은 직선 운동이며 원운동이 아니었다. 외부 세계의 본성이 연장(extension)이기 때문에 진공은 불가능하며 물질의 운동은 진공을 불가능하기 위해서 생성된다. 예를 들어 어떤 물질이 움직이면 물질이 떠난 자리에 진공이 형성되려고 하고, 그 진공을 메꾸기 위해 주변 물질들이 폐쇄 회로를 이루며 응집하는데, 이 때의 운동이 바로 강제적이고 원심력을 유발하는 원운동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물질 공간은 운동과 소용돌이의 결합으로 구성되며, 행성의 궤도 또한 소용돌이 사이의 동역학적 균형을 근거로 성립한다.

 

   그는 에테르를 제 1원소, 미시물리적인 소형 구체를 제 2원소, 행성을 제 3원소로 하는 소용돌이 우주론을 제시했으며, 이 우주론에서는 빛 또한 소용돌이의 결과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중력은 지구 주변의 소용돌이 작용에서 드러나는 원심적 경향의 상대적 결핍이며, 자기력 또한 자기 입자들의 소용돌이에 의해 생성된다. 이러한 우주론은 유기적 현상을 기계화시키고 물리적 실재와 감각을 엄격하게 분리시켰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또한 데카르트에게 자연 현상에 대한 실험적 연구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는 이미 알려져 있는 현상들에 인과적 메커니즘을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데카르트가 원리에서 출발해서 순차적으로 결론들을 도출하는 기계적 철학을 전개시킨 반면, 가상디는 고대의 원자론을 기계적 철학과 접목시켰다. 그는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며 진공 또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가 물질과 외연 및 기하학을 등치시켰던 반면, 가상디는 물질이 곧 외연은 아니라는 인식론적 회의론의 입장에서 오직 현상으로서의 자연 만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과학은 현상에 대한 기술이며 이런 생각은 이후 뉴턴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가상디 또한 현상의 기술이라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지는 못했고 그의 철학 체계에서도 (경험적으로 관측 불가능한) 여러 메커니즘을 도입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계적 철학은 모든 자연 현상을 물질과 운동으로 설명하려고 하였으며 자연 과학의 근본적인 틀이 되었으나 자연의 수학화에 대해서는 일종의 장애물 역할을 했다. 이는 이후 뉴턴에 의해서야 비로소 극복된다.

      

샤핀(Shapin), 무엇이 알려져 있었나?

 

   갈릴레오는 태양의 흑점 운동을 발견했다. 이는 기존의 자연 철학에 의문을 제기하게끔 만들었다. 갈릴레오는 지상계와 천상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공적으로 실험된 현상이 자연 현상에 대한 대표성을 지닐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발견 및 새로운 지식의 축적으로 고대의 지식사상에 대한 의심을 적극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과학에 대한 낙관주의는 프란시스 베이컨에서 대표적으로 찾을 수 있다. 당시에 새로 부흥하던 태양 중심의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과거의 지구 중심적인 톨레미 체계와는 확연히 달랐다. 톨레미의 우주 체계는 그리스의 물질 이론과 결합되어 하나의 우주론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는 인간 중심적인 우주론이라 할 수 있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강한 공격이 제기된다.

 

   더 이상 지구는 우주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게 되었으며,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한 결과 우주는 광대하고 그렇기 때문에 광행차가 관측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 있었다. 무한한 우주에서 지구는 하나의 티끌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이와 같은 새로운 세계상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에서 자연 운동은 수직 운동이고 강제 운동은 비-수직 운동이었으며, 근대 이전의 물리학은 인간적목적론적물활론적 성격을 띠었다. 새로운 자연 철학자들은 이전 철학의 이러한 목적론적 특성을 비판했다. 이는 토머스 홉스에게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자연을 일종의 기계 장치로서 모형화하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이전까지는 인간이 자연의 창조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장인이 만든 인공물과 자연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낙관적인 믿음이 생겨나고, 천체 운동은 인공적 고안물(기계) 운동과 동일하고 모든 감각적인 자연 현상들마저도 미시적 기계들의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시된다. 정교환 시계로서의 자연 개념(시계의 은유)이 등장하는데, 이는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에로의 변화 및 생산정치적 질서의 거대한 변화와 자연에 대한 관념의 변화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케플러, 데카르트, 보일 등은 자연 현상 더 나아가 생명 현상까지도 기계적 작용의 결과로 이해하려 했다.

 

   정교한 기계가 살아 있고 혼이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게 아닌 것처럼, 자연 또한 그 배후에 지적 설계자가 존재하더라도 그 자체가 지적인 것은 아니라고 기계적 철학자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기계의 일양성과 규칙성을 통해 신비적, 마술적, 변덕적, 비예측적인 요소들을 자연에서 배제시켰고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탈신비화시켰다. 기계는 그 자체로 경이로울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자연에는 목적과 의도가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흡입 펌프의 작용에 대해서 진공의 혐오라는 이유를 근거로 목적론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토리첼리는 기체와 유체의 무게(압력) 평형으로 이 현상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 그는 수은의 밀도가 물에 비해 14배 크다는 것을 근거로 수은주의 높이가 물의 높이보다 14배 작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예측했고 이에 기반해서 최초의 기압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를 의심하던 파스칼 또한 고도에 따라서 수은주의 높이가 달라짐을 확인하고 이러한 기계적 현상에 동의하게 된다.

 

   기계적 철학은 신비주의(occultism)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 입장에서는 모든 신비적 현상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현상을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용어들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기계적 철학자들은 르네상스 자연주의에 반대했는데, 메르센느의 경우 이단에 대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적 현상과 초자연적 현상을 확실히 구분하려 했다. 그는 물질이 완전히 수동적이고 관성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물질에서 활동적인 요소를 제거했고 이는 이후의 기계적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모든 자연 현상은 일상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기계적 혹은 물질적 원인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 기계적 철학의 입장이었으며, 보일은 당시에 유명했던 신비적인 치료에 대해 이는 치유력이 있는 발산기의 기계적 작용 때문이라며 기계적 설명을 제시했다.

 

   기계적 철학의 두 기본 원리는 물질과 운동이었으며, 철학자들은 이 원리를 성서적으로 해석하려 하기도 했다. 자연 현상을 어떤 방식의 기계적 철학을 통해 설명하는지에 대해서는 철학자들마다 의견이 달랐다. 데카르트의 경우 자기 현상과 신체 현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려 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예로 반사적 행동에 대한 설명을 들 수 있다. 이에 반해 보일 및 영국의 기계적 철학자들은 거침 없이 기계적 설명을 내놓는 것을 꺼려했고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매우 조심스러웠다. 비록 현미경을 통해 미시 입자들이 관측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기계적 철학자들은 이 입자들이 지각되지 못하므로 기계적 철학의 가정들은 가설의 성격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다양한 현상들이 물질과 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었고, 일상적인 감각적 성질들은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지 않은 입자들을 통해 설명하려 하였다.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갈릴레오에게서 찾아볼 수 있으며, 1차 성질인 형태, 크기, 운동으로부터 2차 성질인 색깔, 냄새, 맛 등이 도출된다(로크의 인식론). 이는 객관적 과정과 주관적 경험을 구분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 철학에서 핵심적이었던 형상과 질료의 구분 및 본질적 형상의 개념을 비판하고 거부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기계적 철학이 미시 기제를 통해 구조적인설명을 한다는 데 있었다. 보고 만질 수 있고 이해 가능한 현상으로부터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모든 현상이 이런 식으로 설명되기는 힘들었으며 일상적인 경험에 기반하지 않은 기계적 설명을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합당한 철학적 타당성은 없었다.

 

   기계적 철학과 자연의 수학화는 그 원리상 서로 친화적이었으나, 기계적 철학은 실질적으로 자연의 수학화와 별 관련이 없었다. 자연의 수학화는 피타고라스, 플라톤과 관련 있었으며 갈릴레오는 자연의 구조가 수학적이라고 주장했다. 자연의 수학화가 어느 정도로 가능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케플러의 경우 강경한 플라톤주의의 입장을 취했는데 그에 의하면 행성 천구 및 우주는 5개의 정다면체와 대응될 수 있고 우주 전체는 기하학적 질서에 따른다. 그가 생각한 창조주는 수학자였다. 이렇듯 자연이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는 믿음은 자연 철학을 수학화하는 동기를 제공했고, 이는 뉴턴의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그 결실을 보게 된다. 이 저서에서 자연 세계의 균질화객관화추상화가 이루어졌으며, 오직 물질적 원인만 인정되었고,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중력의 경우 수학적 법칙으로 기술만 했을 뿐 물리적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기계적 철학과 합치한다고 보기 힘들었으며 자연 철학에 활동적인 힘을 다시 도입한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다(라이프니츠). 그러나 중력은 수학적 법칙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완전히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뉴턴 체계가 기계적 철학과 갖는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

      

베넷(Bennett), 기계공의 철학과 기계적 철학

 

   수학적기계적 자연 철학이 실험적 방법과 결합하는 것은 17세기 과학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좀 더 수학적인 과학이 자연 철학과 결부되고 좀 더 기계적인 기예가 세속적이고 덜 과학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이 때 자연 철학과 수리과학이라는 두 범주가 어떻게 상호작용 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리과학은 복잡한 수학적 기법과 실천적인 적용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는데, 수리과학에서 사용된 수학적 도구는 주로 문제 풀이를 위한 것이었다. 17세기에는 굉장히 다양한 수학적 도구들이 있었으며, 기계적 철학은 자연 철학의 영역에 이러한 수학적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을 합리화시키게 된다.

  

   베넷에 따르면 17세기에 자연에 대한 기계적 철학이 출현하게 된 데에 16세기에 시작한 실천적 수학의 전통이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갈릴레오의 경우 군사적 필요가 시발점이 되어 나침반망원경 등을 만들었고, 분명 이러한 필요가 과학을 전적으로 추진시키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갈릴레오의 수리과학이 발전하는 데 확실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험적 방법, 자연 철학에 도구를 사용하는 것,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기계적 모형과 미시 기제들을 사용하는 기계적 철학은 고대의 원자론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따라서 기계적 철학이 등장하게 된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비록 헤르메티즘 혹은 르네상스 자연주의가 실험적 방법에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이 때의 영향은 미미한 것이었다. 오히려 (수학적 철학에 바탕한) 실천적인 수리과학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으며, 수리과학은 자기(magnetism)를 탐구하는 실험적 방법론을 수립한 상태였다. 쿤은 수리적 전통과 경험적 전통을 근본적으로 구분했으나 이는 근거가 없는 구분이며, 자연의 수학화 및 실험적도구적 방법론의 기원을 실천적인 수리과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베넷은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고급 과학과 저급 과학 사이에 근본적인 구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두 영역 사이의 상호작용이 있었으며, 비록 이론가와 실천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급 이론과 저급 실천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었다는 견해를 할(Hall)과 웨스트팔(Westfall)이 제시했다. 특히 웨스트팔의 경우는 후크(Hook)에 관한 세 사례를 통해 이론(수리과학)과 실천(기계적 문제) 사이의 간극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하지만 베넷에 따르면 자연 철학의 개념적이고 방법론적인 혁신에 있어 실천적 수리과학이 중요한 원천이었을 수 있다. 특히 당시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그레샴 칼리지에서는 높은 수준의 수학 전문가들이 연구를 수행했고, 파인골드(Feingold)는 이러한 제도 하에서 높은 수준으로 교육 받은 사람들이 새로운 종류의 과학이 출현하게 만든 결정적인 조건이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그가 그 조건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 데에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로씨(Rossi)는 기계공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과학과 기술-기예의 연합에 주목했다.

 

   저자에 의하면 수리과학을 실험적이고 기계적인 철학과 연계지을 수 있는 좋은 무대가 영국이다. 16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 수리과학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인다. (Dee)는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후드(Hood)는 영국의 수리과학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했는데, 후드에 의하면 수학은 이국적인 것임과 동시에 국가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이 시기에 대학 외부에서 수학적 실천가들의 집단이 성장하는데 이를 대표하는 사례가 바로 그레샴 칼리지(Gresham College)이다. 이 시기에 수학은 확실한 지식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적용(수학적 도구를 사용하여)도 가능하기 때문에 국가와 개인 모두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일종의 전통이 형성된다.

 

   17세기 당시 지구의 자기적 성질은 항해 수리과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특히 길버트와 디와 같은 사람들은 자침이 자북에 대해 얼마나 변화하는지를 확인하여 경도를 측정하는 방법에 관심을 보였다. 실천적 항해자이자 나침반 제작자 노만(Norman)이 지구 자기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했으며, 그는 실천적 지식이 학문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주장했던 수학적 지식을 갖춘 기계공이었다. 노만은 실질적인 실험을 강조했으며 지구의 자기를 탐구하기 위한 도구(딥 서클)를 고안했고, 이러한 도구를 갖고 진정한 자연 철학적 탐구를 수행했다. 노만 뿐만 아니라 험프리 길버트도 수리과학의 철학적 사용을 강조했으며, 보로(Borough)의 경우 자신의 편각 이론(Theory of Variation)에서 관측 자료의 수집 및 잘못된 개념의 기각 등이 궁극적으로는 자연 철학과 연계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블룬데빌(Blundeville)의 저서 연습에서도 항해에서의 편각에 대한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스테빈(Stevin)은 경도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위치 파악을 할 수 있도록 편각 측정법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고, 스테빈의 책을 번역한 라이트(Wright)는 수학과 지자기 탐구를 연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길버트는 자석에 대하여중 항해에서의 자기에 관한 부분을 실천적 수리과학의 방법을 사용해서 저술했다. 즉 르네상스의 자연주의는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 철학적 이론이 수리과학의 실용적 목적에 사용되었으며, 딥 서클은 자연 철학의 도구로 생각되었듯 수학적 도구가 자연 철학 이론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학의 수학 이론가, 자연 철학자, 수학적 실천가, 실용적 수학 집단의 지도자 등이 모여서 지자기 현상을 연구했으며, 따라서 지자기 현상은 수리과학과 자연 철학이 접목되는 영역이었다는 것이 베넷의 주장이다. 이에 덧붙여 편각이 장기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의 발견은 그 변화 아래에 존재하는 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베넷에 따르면 수리과학과 자연 철학이 결합된 분야는 천문학 뿐만 아니라 지자기학이기도 했던 것이다.

 

   1633년에는 철학적이고 수학적으로 희귀한 현상이 항해를 통해 발견되었는데, 이 항해의 장본인인 제임스(James)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장비와 수학 서적을 갖추고 있었고 이는 그레샴 칼리지와 관련이 있었다. 성직자였던 와트(Watt)의 경우에도 자연 철학에 있어 항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수히과학의 맥락에서 자연 철학의 개혁을 주창했다. 실험적 수학의 전문가 집단이었던 그레샴 칼리지에서는 점점 더 자연 철학에 관심을 보였으며, 수학적 마술을 출판한 윌킨스(Wilkins)는 자연물과 인공물을 구분하지 않았다. 옥스퍼드 그룹의 워드(Ward)는 자연의 현상을 기계적이고 정역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자기적기계적광학적 학파가 수립되어야 함을 주장했고, 실험적기계적 철학을 대표하는 후크의 경우 본인 스스로 많은 실험기구들을 제작했다. 후크의 실험적기계적 철학은 수학적기계적 기초와 실험적도구적 실천이 결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기계적 철학은 역사적 맥락에서 발전했으며, 실천적 수리과학이 기계적 철학의 탄생과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 베넷의 주장이다. 그는 기존에는 기계적 철학에 관해서 물질 이론에 주목했지만, 이보다는 실천적 수리과학이 기계적 철학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수리과학의 실천적 측면이 자연 철학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해야 하며, 이는 또한 기계적 철학을 사회적정치적 요소와 연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허치슨(Hutchison), 과학혁명을 통해 오컬트적 성질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나?

 

   17세기가 되면 어떤 종류의 성질도 지각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오컬티즘이 성행하는 것이다. 1600년 이후 오컬트개념이 변화하고 오컬트적 성질이 이해 불가능하지 않으며 대신 인과적 설명으로서의 본질적 형상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 오컬트적 성질이 실재하는 성질로 받아들여지면서 기존 성질들이 갖고 있던 오컬트적 특성이 포기되는 셈이다. 감각으로 지각 가능하지 않은 성질을 오컬트적이라고 지칭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은 한 때 그렇게 지칭되었던 성질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17세기 철학자들은 이러한 오컬트적 성질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전 철학에 대한 자신들의 철학의 우월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했으며, 길버트는 자석의 작용을 지각할 수 없어도 그것의 효과는 실험을 통해 믿을 만한 수준으로 연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컬트적 성질은 그 원인이 아니라 결과만을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인과 관계 규명을 중시했던 전통 철학에서는 정식 학문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세의 철학자들은 비감각적 존재자들이 구체화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데 실패했고, 비감각적인 것들은 불완전하게 밖에는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중세 철학은 감각하기에는 너무 작아 그 존재를 판가름하기 힘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중세 시대에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오컬트적 성질에 의해서 벌어지는 작용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성질의 통제는 마술사가 불러낸 악마에 의해서 실천된다고 믿었다.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 틀에서는 감각 이미지가 생성되지 않는 경우 인간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다고 보았고, 오컬트적 성질은 직접적으로 감각될 수 없으며 다만 경험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감각과 경험을 구분하고, 그 원인을 지각할 수 없고 다만 그 효과만 파악할 수 있는 경험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오컬트적 성질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의 인식의 범주로 포함되기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에 포함되지 않으면 오컬트적인 성질로 간주했고 오컬트적 성질은 자연에 보편적인 성질이 아니라 개별자들의 영역에만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파라켈수스의 경우 사람들 각각의 신체 과정은 제각기 다르고, 어떤 약물이 어떤 오컬트적 성질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반응을 살펴서 파악(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오컬트적 성질의 효과는 설명될 수 있고 이 효과를 잘 알고 있는 성질들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등장했지만, 어떤 효과라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철학자들은 온건냉습 이외의 오컬트적 작용도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는 새로운 과학이 이전 철학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데카르트는 명시적/오컬트적 구분을 없애고 모든 성질이 오컬트적임을 주장했다. 그는 모든 성질을 지각 불가능한 기제를 통해서 설명하려 했다.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은 곧 모든 성질이 오컬트적임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로크의 경우). 이를 대표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철학이며, 그는 감각 가능한 것은 이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감각 불가능한 존재자들의 존재를 주장했다. 샤를톤 또한 모든 성질은 오컬트적이며 이 성질에 대한 기계적 설명을 통해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컬트적 성질의 설명에 사용되던 동감 혹은 반감의 개념을 공격하고, 실제적 이유는 현상 근거에 있는 비감각적인 기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지 오컬트적 성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것이 오컬트적이라고 하면서 이 성질에 대한 탐구를 중단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이 성질에 대해 탐구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비로 가득한 자연을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보일도 명시적 성질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든 성질은 오컬트적이라 주장했다. 그는 오컬트적 성질은 기계적 철학을 통해 해명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비감각적 존재들의 작용으로 인해서 신체의 작용을 설명하려 했다. 아주 평범한 기계에서도 효과를 일으키는 원인이 숨겨져 있듯 이는 신체에도 적용된다고 그는 믿었다.

 

  

   감각은 일반적으로 믿을만 하지만 사물 자체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구성적 회의주의의 입장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에서는 모든 현상(자기 현상 및 색깔 등)을 동등하게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했고, 이는 오컬트적 힘에 대한 탐구 및 중력에 대한 변호까지 이어져 오히려 자연 철학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구성적 회의주의자들은 단순히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럴싸하다는 가능성을 인간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데카르트조차도 회의주의의 입장을 수용, 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하는 것으로 철학자의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기계적 철학자들에게 오컬트적 성질을 자연 철학에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했지만, 이는 그 성질들에서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했다.

 

   1700년에 이르면 감각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해 불가능한 것을 뜻하게 된다. 데카르트 주의자들에게는 오컬트적 성질에 메커니즘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클라크는 원인이 알려지지 않더라도 결과가 관측되면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뉴턴의 중력 개념을 데카르트 학파의 비판자들로부터 변호했다. 뉴턴은 활동적 원리가 오컬트적인 성질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으며, 원인과 결과의 논의를 구분하고 원인은 몰라도 결과를 감지할 수 있는 견해를 가졌다. 그는 각각의 현상에 대해 그 현상에 특수한 메커니즘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으며, 소수의 일반적 가정을 통해 모든 현상을 도출하는 것을 옹호했다. , 뉴턴이 거부한 것은 개별적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개별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었으며, 이의 대안으로 뉴턴은 소수의 오컬트적 원인들로 많은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오컴의 면도날을 통과한 오컬트적 원인). 다만 이러한 소수의 원인들은 누구든지 감지 가능하고 이 원인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명백해야 했다. 근본적 진실은 우리의 이해 능력 범위를 초과하며(신적인 개입에 근거하므로), 원인을 이해하지 못해도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뉴턴의 회의주의였다. 무엇이 이해 가능하고 무엇이 오컬트적인지에 대한 논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는 것으로 허치슨은 자신의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새퍼(Schaffer), 왕정 복고 시대 자연 철학에서의 정신과 영혼

 

   1670년 경 영국의 자연 철학적 프로그램에서는 영혼, 끌어당김 등의 개념들을 존재론 및 인식론에 포함시키고 있다. 17세기의 자연 철학자들은 오컬트적 성질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포함시키려 했다. 획일적인 기계적 철학이 17세기 자연 철학자들의 실천적 삶과 이론적 작업을 정확히 반영한다는 견해에는 오류가 있다. 당시의 자연 철학은 자연 지식을 생산하는 사회 조직의 실천 중 일부분을 구성하면서 자연 탐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으며, 17세기 자연 철학은 상당히 신학적인 구조를 띠고 있었으므로 강한 기계론적 입장을 주장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17세기 후반 자연 철학에서 영혼은 다양한 층위에서 존재했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실천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학문 영역의 중요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적인 활동적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의 자연 철학자들은 자연을 탐구하는 일종의 성직자로서 자연 철학이 기존의 종교 교리와 친화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영혼에 섬세한 유체, 비감각적이고 굉장히 활동적인 물질적 혼 등의 특징을 부여하면서 세계에서 영혼의 지위를 확보하려 했다. 자연 철학과 이에 관계된 다양한 실험 및 이론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으며 공통적으로 정신과 영혼을 탐구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빛과 미묘한 유체의 상호작용, 공기의 활성에 대한 실험, 연소 및 호흡에 대한 실험, 중력과 공기 펌프에 관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활동력을 도입하는 등 영국에서는 영혼과 관계된 실험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뉴턴의 가설은 빛, 중력, 탄성체와 연관되어 활동적 유체에 대한 실천에 영향을 주었으며, 보일의 경우 탄성과 진동이 본질적 역할을 하는 기체적 우주론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일은 기체 연구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뉴턴 또한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땅으로부터 활동적 증기가 생성되어 생명과 힘을 제공했으며, 이러한 공기로 인해서 생명이 유지되며 이는 질병과 치유의 근거가 된다고도 생각했던 것이다.

 

   의사, 성직자, 농업 저술가, 천문학자, 수학적 실천가 등이 모여서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들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전반에 걸쳐서 활동 유체의 존재를 입증하고 그 속에 영혼을 위치시키려 했다. 이 때 실험적인 기체영혼학이 정신과 영혼으로 가득찬 우주론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고, 이들은 더 나아가 활동적 유체를 통해 사회 현상 및 생명 현상 모두를 설명하려고까지 하였다. 신에 의한 사회 질서 유지 및 우주 질서 유지는 이와 같은 기체적 영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보일의 경우 소리, , 연소, 탄성에 대한 실험을 통해 행성, 혜성, 자석, 기계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며, 보이지 않는 유체인 탄성적 입자인 영혼이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는 자연 자체가 하나의 연구소로 여겨지고 자연 철학의 영역 및 그 안에서의 실험적 영혼의 역할 또한 강조되었다.

 

   유체 영혼의 개념을 다른 영역에 확장시켜 적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으며, 1670년대에 이르면 활동적 우주론이 조심스럽게 구성되고 있었다. 실험철학을 성서에 근거해서 변호하려는 시도는 뉴턴과 보일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보일의 경우 활동적 유체의 창조를 통해 존재론적 질서가 보장된다고 생각했으며 뉴턴 또한 생기적인 에테르를 통해 순환적인 우주론을 제안했다. 영혼을 설명할 때에는 신학적 입장과 기계적 입장을 조화시켜야 했으며, 보일은 인간의 다양한 인지적 작용(시간의 지각, 기억, 연상 등)을 기계적 철학에 바탕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영혼은 물질적 차원을 뛰어 넘는 작용을 할 수 있고, 영혼이 의지를 통해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물질적 신성은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생기적으로, 사고를 통해서 물질을 움직인다는 생각이 등장한다. 또한 인간 영혼을 신학적이고 자연 철학적인 관점에서 다루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기체영혼학의 또 다른 확장 사례는 혜성 관측학이었는데, 사람들은 혜성이 신성한 활동적 의도를 표현한다고 간주했다. 후크는 혜성 현상을 그것이 기체영혼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참조함으로써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중력 또한 일종의 자기력이라 생각했다. 플램스티드와 뉴턴은 혜성의 물질적 구성과 태양이 가까이가려는 혜성의 힘의 근원에 대해서 논쟁했는데, 플램스티드는 태양과 혜성 사이에 자기력이 있다고 주장했던 반면 뉴턴은 다른 종류의 힘을 주장했다. 이는 뉴턴으로 하여금 최초로 행성 간의 끌어당기는 힘을 생각하게끔 했다. 따라서 이러한 의견 교환은 뉴턴의 자연 철학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순수한 역학적 유체가 과연 그러한 작용을 할 수 있는지에 관련해서도 논쟁이 벌어졌다.

 

   실험가들은 자연에 활동적 정신이 존재함을 보임으로써 반신론적 기계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 세계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필수 불가결하지만 대중에게 전달하기에는 위험한 사상이라 생각되었다. 영혼의 입증을 실험의 공간에로 이전하는 데 있어서의 위험 요소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인식론적 요소로 이 실험이 통제되고 재생 가능하며 공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존재론적 요소로 이 실험에 따라 자연 전체의 지형도를 재정의해야 했다. 학자들은 영혼의 존재를 확신했으나 이를 공공적으로 공개하기를 꺼려했으며, 이러한 종류의 철학은 각종 영적 현상들을 인정했으므로 데카르트적인 의미에서의 기계적 철학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자연 영혼이 실험의 통제를 받느냐 그 통제 범위를 벗어나느냐 하는 인식론적 논쟁이 제기되었으며, 실험가들은 영혼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전문가로 만들 수 있었다. 학자들과 기능공의 역할을 재정의하면서 자연의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기존의 생각과 달리 기계적 철학은 논쟁의 대상이었고 이의 구조와 행운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기계적 철학은 실험에 의해서 지지되었으며 이 철학이 다양한 부류의 사회적 집단들과 관련되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기계적 철학의 언어는 자연 철학자들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합법화시켰으며, 영혼 지위에 관한 주제는 엘리트 정치 및 대중 문화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왕정 복고 시대의 정치적 위협 요소를 통제하기 위해서 이 철학이 사용된 측면이 있었다. 실험 철학은 영혼의 세계로 자신의 통제 범위를 확장하려고 하였으며, 라이프니츠와 스위프트는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비판했던 것이다.

    

데식(Decyk), 데카르트적 상상과 원근법 예술

 

   데식에 의하면 최근 자연 철학자로서의 데카르트의 면모가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밝혀지고 있다. 또한 당시 광학의 문제에는 다빈치, 뒤러 등 예술가들도 관계되어 있었다. 또한 광학의 문제는 데카르트 자연 철학에서 상상의 역할과 연계되어 있었다. 데카르트는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이해(understanding)가 핵심적이지만 상상 또한 이해에 상당한 보조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몇몇 측면에서 상상은 지성을 도울 수 있으며, 신체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상상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그는 상상이 감각 경험을 수학화하는 기능을 하며, 상상을 통해 운동을 수평적 요소와 수직적 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거리를 파악함에 있어서 눈의 형태, 눈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상의 구분과 빛의 강도의 조합, 대상에 대한 친숙함 등이 관계되는데, 이 중 두 번째 능력이 상상과 관계된다. 우리는 두 안구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에 근거해서 거리를 파악하게 되는데 이 때 상상이 개입되며 상상은 경험을 크기로 변형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당시의 예술가들 또한 광학적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중세의 예술이 평면적이었던 반면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면 평면을 3차원으로 보이게끔 해주는 원근법이 개발된다. 직선 원근법에 대해 저술한 알베르티(Alberti)는 원근법에서 기하학의 역할을 강조하고, 삼각형의 기하학적 성질이 사물 사이의 상대적 위치를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관측 도구와 기하학을 결합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의 거리를 판단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평면을 입체적으로 그리기 위한 다양한 도구들이 사용되었다. 원근법적 기술에 있어서는 특정한 방식의 시점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원근법적 그림이 그려지기 위해서는 매우 기술적인 과정이 필요했다. 이렇듯 원근법에서의 도구의 사용은 상상이 어떤 방식으로 경험을 질서짓고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준다.

 

   상상에 의한 수학화는 물질적 사물들을 데카르트적 연장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형태, 운동, 수치 등은 사물 그 자체의 존재 양식이었으며, 알베르티에게 관측 기구가 떨어져 있는 물체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능을 했던 것처럼 데카르트에게서도 상상은 경험을 수학화하는 기능을 했다. 원근법은 이미지를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미지는 대상과 닮을 필요가 없고 우리의 마음 속에 생성된 관념이 대상과 유사할 필요도 없었다. 데카르트는 물체의 형상이 눈에 전달된다는 식의 스콜라적 이론을 거부했으며, 이미지가 굳이 대상과 닮을 필요는 없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각이 대상들을 닮는 방식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지에서는 원이 달걀형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이미지가 원을 잘못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입체감의 환영은 크기형태색조가 비율적으로 변화함을 통해서 생성되었고 이는 평면과 곡면 모두에 적용되었다.

 

   다빈치는 자연 원근법과 인공 원근법을 구분했는데, 예술가들은 자연 원근법에 능숙하게 된 이후 인공 원근법을 탐구했으며 이는 일종의 유희로 생각되었다. 인공 원근법에서는 의도적으로 관찰 시점을 중심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으며, 제대로 된 상을 보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적절한 시점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적절한 위치를 찾아야 했다. 프랑스의 니세롱(Niceron)은 이러한 왜상적 그림에 대한 전문가였으며, 이러한 왜상적 그림은 이미지가 변형되더라도 이에 대한 정확한 수학적 관계만 주어지면 이미지가 재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미지의 변형과 재구성에는 공간, 운동, 도구가 필요했다. 인공 원근법의 유희에는 하나의 그림에 두 가지의 시점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마이그난(Maignan)이 그린 프레스코화에서는 하나의 시점에서 관측했을 때 풍경이 보이다가 다른 시점에서 관측했을 때는 기독교의 성인이 등장한다. 시점을 국소적으로 분산시키는 방법 및 전지역적으로 분산시키는 방법도 개발되었으며,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멀리 떨어져서 특정 관측 도구를 사용해서 보면 원래 그림에는 없었던 단일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감각 경험과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은 대상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당시 눈은 일종의 광학 도구(카메라 옵스큐라)라고 간주되었으며, 눈을 통해 생성된 이미지는 인식 가능하지만 대상을 완벽하게 표현하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시각 이미지의 변형이 체계적이고 비율적이기만 하면 이미지의 정보는 보존된다고 생각했으며, 이미지의 정보는 안구 뒷 부분의 운동으로 변형되고 정보 전달의 역할을 하는 이러한 안구 운동은 다양한 비율로 조합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사물의 정보가 암호화 과정을 거쳐 망각의 이미지가 되고, 이 이미지는 다시 암호화 과정을 거쳐 광학 신경의 운동이 되고, 이 운동은 또 다른 암호화 과정을 거쳐 다른 종류의 운동으로 변환된다. 이 때 암호화 과정은 수학에서의 비율적 관계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다. 왜상 예술은 어떻게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암호화되고 복구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상상은 다양하게 변형된 암호화된 이미지들을 해석하는 수학적인 도구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16, 17세기에 사람들은 정보를 암호화하고 해석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미지의 변형과 재구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당시 망원경 및 현미경의 발전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태양의 흑점 이동 현상에 대한 갈릴레오의 논증은 구형 표면에서의 왜상적 단축 원리에 기인했으며, 그가 쌍곡선 형태의 렌즈를 추천한 것으로 미루어 그가 구형 표현의 왜곡 현상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지는 갖가지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미지가 어떻게 변형되고 수학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원근법 예술에서의 기법 발전과 왜상 예술에서의 실험이 데카르트가 경험을 수학화한다고 언급한 상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데식의 생각이다. 저자는 수학자-철학자-과학자로서의 데카르트, 즉 자연 세계에 대한 이해가 감각 경험과 상상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데카르트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스(Jones), 정신 훈련으로서의 데카르트 기하학

 

   존스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기하학이 더 나은 삶과 지식을 위해서 필수적인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유클리드적이지도 않고 대수적이지도 않은 그의 기하학은 고유의 표준제한엄격함을 갖고 있었다. 키케로에게 영혼의 질병은 철학을 통해 치유될 수 있었듯, 데카르트에게 기하학은 정신적 훈련이었지만,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는 이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하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새로운 형태의 기하학이 정신적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는 식별력을 기르는 데에는 수학보다 더 좋은 활동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기하학은 명료하게 보고 생각하는 연습을 제공해서 건강한 영혼을 통한 경험이 가능하도록 해준다고 생각되었다.

 

   데카르트는 당시의 수학적 증명의 표준을 거부했고, 당시에는 수학의 대상 및 증명 기법 등과 관련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논의 영역 대상의 변경을 요구했으므로 증명 과정에 집중했다. 데카르트는 고대에 진정한 수학이 존재했으리라고 믿었고 그것은 고대의 철학자들이 제도로부터 독립적이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고대인들은 전문화되지 않고 제도 속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서도 불완전한 수준의 수학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으며, 데카르트가 생각했을 때 이것이 바로 고대인들의 한계였다. 데카르트는 페르마가 자신의 수학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방법을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페르마의 방식이 창의적이긴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다는 데 있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일반화된 방법을 요구했으며, 수학적 논쟁에 있어서도 보편적 규칙을 제시하는 것을 요구했다. 그는 기하학에서의 보편 언어가 대수학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대수학적 방법의 위력은 파푸스의 문제 풀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곡선을 그리는 도구를 사용해서 파푸스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 해법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대수학 및 수학적 도구는 동일한 차원의 것이었다. 둘 다 복잡한 증명 과정을 직관적으로 명백하게 해주는 기능을 했다.

 

   데카르트는 개별적이고 편파적인 지식을 극복하고자 했고, 기존의 정신 훈련 형식을 비판했다. 그는 겉보기에는 서로 구분되는 요소들을 엮어주는 본질적인 공통성을 이해하는 지성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고, 정신이 분산되지 않으면 성찰을 할 수가 없으며 진정한 지식은 자기 충족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수학적 증명 또한 의식 고유의 능력으로 어떤 문제든 풀 수 있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증명 과정을 모방하기만 한다면 인식적도덕적 측면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토대를 잃게 된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데카르트가 주장한 분명함과 명료함은 시인들이 미적이과 직관적인 방식으로 지식의 전체성을 파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는 서로 다른 요소들 근저에 있어 그것들을 조직하는 원리에 대한 지식, 연역적 지식을 단번에 환원시킬 수 있는 방법,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 등을 필요로했다.

 

   그는 모든 진정한 지식은 자명해야 하고 분명하고 직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함과 명료함은 인식적 기준이 아니라 심미적인 기준이었고 예술적이고 시적인 영역에 적용되는 용어였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수학은 분명하고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그는 직관적 친숙함을 얻기 위해 인공적 도구를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도구는 발견법적인 역할만 할 뿐 한 번 파악되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에 의하면 대수학적 상징 또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하며, 대수학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기하학적 대상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을 제공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분절된 요소들을 명료하고 분명한 통일된 질서로 환원하는 과정이 바로 습관화이며, 이는 수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수학은 직관적 명백함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었으며, 삼단논법 혹은 수사학 등과 같은 사고의 도구들이 직관적 명백함을 흐려서는 안된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고대인들이 기계적이라는 이유로 곡선을 사용하기 거부한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엄격한 기준을 통해 사용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곡선 사이를 구분했다. 그는 도구적으로 명백하게 조정된 곡선은 사용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허용 가능한 곡선과 그렇지 않은 곡선에 대한 데카르트의 구분 기분은 개인적인 것이었으며 객관적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존스는 지금까지의 사학자들이 데카르트 기하학의 실천적 측면의 중요성을 간과해왔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자발적인 철학이 우리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고 우리의 태도를 조정하며 우리 삶의 나아갈 방향을 지도하는 데 그 적합한 역할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