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08: 갈릴레오와 과학혁명

강형구 2016. 4. 16. 08:51

9: 갈릴레오와 과학혁명

 

갈릴레오(Galileo),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별의 메신저)

 

   코페르니쿠스는 그 자신이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자신의 저서가 교회 및 대학에서의 전통적인 우주론과 상치되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는 그의 사후에야 비로소 출판된다.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을 단순히 수용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걸쳐서 동화시켰고, 대학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을 교과 과정의 표준으로 채택했다. 비록 교회의 자연 철학자들이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하는 차원을 뛰어 넘어 그 철학을 더 심화시키고 더 나아가 그 철학에 반대되는 결론들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세계관 그 자체의 변화는 특정 철학 내부에서의 발전으로만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쿤(Kuhn)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모두에게 신-플라톤주의가 큰 영향을 미친 점을 지적하며 패러다임 변화에 있어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강조했으나, 웨스트만(Westman)이 자신의 논문16세기에서의 천문학자의 역할에서 지적한 것처럼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변화 만으로는 근대 초기의 과학적 활동이 겪은 성격의 변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당시 수리천문학자와 자연 철학자 사이의 (인식적사회적) 관계가 어떠했는지, 수리천문학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들을 철학자의 지위에까지 올릴 수 있었는지를 분석하지 않으면 서양 근대 과학의 본질적인 측면을 파악하기 어렵다.

 

   티코, 케플러, 갈릴레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중요한 측면이 있다. 비록 세 사람 다 교회 및 전통적인 대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적 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추진력이 된 또다른 사회적 집단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궁정(court)이다. 중세에 교회가 사회의 지식과 정치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면, 중세가 그 말기에 접어들고 근대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은 교회 이외의 집단들이 기존에 교회가 독점하고 있던 지식과 정치력을 분산시키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지식과 정치력을 내부로 응집시키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궁정과 시민 계급은 근대 초에 교회의 사회적 지배를 견제하고 대체하기 시작한 가장 대표적인 두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자연 철학자의 지위로까지 나아가려고 노력했던 수리천문학자들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은 바로 궁정이었다. 당시의 왕권 또한 교회의 지적정치적 지배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새로운 방식으로 장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왕실에게는 수리천문학자들이 교회가 지배하고 있던 지적 영역에 대항할 수 있는 좋은 후보들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수리천문학자들은 교회를 주도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 철학이 틀렸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교회 및 대학에서 신학자나 철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리천문학자들이 늘 시달려야 했던 학문 영역의 제한과 급여의 제한을 없애줌으로써, 왕정은 세계에 대한 지식이라는 상징을 무기 삼아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비아졸리(Biagioli)를 비롯한 많은 사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갈릴레오의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는 당시의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책의 이면에는 수리천문학자에서 자연 철학자로 나아가려는 갈릴레오의 각종 노력들이 숨어 있다. 물론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사용해서 최초로 달 표면의 굴곡을 관측하고 목성 주위를 도는 4개의 위성을 발견했으며, 이는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을 크게 뒤흔들어 놓은 천문학상의 중요한 발견이었다. 하지만 이 발견은 톨레미나 티코의 체계를 완전히 반박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갈릴레오 자신도 이 책을 통해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책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갈릴레오 자신이 이전까지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많은 천문학적 관측들을 실제로 했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그 결과 발견한 목성의 네 행성을 메디치 왕조에게 영광스럽게 바치는것이다.

 

   코시모 드 메디치 2세에게 바치는 서문에서 갈릴레오의 이러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갈릴레오에 의하면 탁월한 인간들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질시를 막아내고, 그 불후의 명성을 망각과 몰락으로부터 지켜낸 사람들이야말로 더 없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봉사를 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갈릴레오는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4개의 위성에 메디치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러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봉사를 하려 한다. 그렇다면 왜 그는 곧바로 목성의 위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 것일까? 우선 그는 당시 꽤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망원경들에 비해 자신의 망원경이 월등히 뛰어났음을, 그런 까닭에 자신의 망원경으로만천체의 현상을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었음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가 자신의 망원경이 갖는 뛰어남 및 달의 표면에 대한 상세한 스케치를 책 초반부에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자신의 기술적 독창성 및 천문학적 발견의 우선성을 대외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망원경이 뛰어난 성능을 갖고 있으며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난 다음, 갈릴레오는 목성 주위를 관찰한 자신의 관측 일지를 세부적으로 소개한다. 관측 일자에 따라 목성 및 주변의 위성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스케치를 곁들여가며)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갈릴레오는 자신의 관측 결과가 철저한 사실에 기반한 것임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자신의 천문학적 관측 결과를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우주론의 문제(코페르니쿠스 및 톨레미 천문학에 관한)에 적극적으로 결부시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그는 자신의 천문학적 관측 결과를 근거로 새로운 천문 체계에 대한 적극적인 논증을 하지 않았을까? 그 대답은 단순하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의 목적은 새로운 천문 체계를 옹호하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을 근거로 유럽 궁정들의 주목을 얻고 메디치가의 신임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의 삶이 당대의 평범한 천문학자의 삶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가 철학자의 이름을 얻기 위해 극도로 노력했다는 것 또한 수긍이 간다. 그러나 그가 궁정 철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이전에 어떤 과정을 통해 이전까지의 자연 철학을 습득하였으며 어떻게 새로운 역학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는 당시의 궁정 문화를 분석하는 것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물론 그 시대의 과학적 실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역학의 창시자로서의 갈릴레오의 면모를 파악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애리우(Ariew), 1610년 이전까지의 금성의 식() 현상

 

   금성의 식 현상은 톨레미 천문학 체계에 대한 결정적인 반증임과 동시에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옳음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의 역할을 했다고 흔히들 얘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적인반증 혹은 증거는 1610년에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 금성의 식 현상을 실제로 관측한 것과 결부된다. 저자인 애리우는 1610년에 이루어진 금성의 식 현상 관측에 대한 위와 같은 기존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과연 금성의 식 현상이 톨레미 천문학 체계에 대한 결정적인 반증이었는지를 그 시대의 지적 맥락 속에서 다시금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갈릴레오가 천체들 중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물체와 그렇지 못한 물체를 망원경을 통해 구분할 수 있었다는 것,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들은 고정된 위치를 갖기 때문에 빛을 발하는 태양 또한 우주에서 고정된 위치를 가짐을 발견한 것이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체계를 지지하는 데 있어서 금성의 식 현상을 관측한 것보다 더 중요했다고 주장한다.

    

   1610년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맥락에서도 과연 천체들은 자발적으로 빛을 내는가 아니면 모든 빛의 근원은 태양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슬람 자연철학자인 아비체나(Avicenna)의 경우 천체들은 각자가 독자적을 빛을 낸다고 생각했으나, 이에 반해 알베르트(Albert)는 모든 천체가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빛을 낸다고 생각하고 그는 이러한 결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도 합치한다고 생각했다. 당시까지의 천문학적 관측 수준으로는 금성의 식 현상을 뚜렷하게 관측할 수 없어서 알베르트는 이에 대해 임시 방편적인 설명을 했고, 이는 금성의 식 현상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을 지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1610년 실제로 금성의 식 현상을 관측했을 때 문제가 된 것은 단순히 금성이 식 현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달의 식 현상이 보여주는 모든 모습을 금성 또한 보여주었다는 데 있었다. 이는 금성이 지구 주위가 아니라 태양 주의를 돈다는 것을 시사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기하학적 모형을 수립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톨레미의 천문 체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겨졌다. , 톨레미 천문학 체계 내에서의 수정을 통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이 현상은 금성의 주전원이 태양 근처에 있다는 것 이상을 강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코페르니쿠스 시대에는 금성의 식 현상을 실제로 관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갈릴레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강력한 입증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갈릴레오 본인도 인정하고 있듯 이는 톨레미 체계 그 자체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위와 같이 금성의 식 현상 관측의 과장된 중요성을 바로잡은 뒤, 저자는 갈릴레오의 천문 관측이 갖는 더 큰 중요성을 다른 관점에서 살핀다. 과연 어떤 천체가 빛을 내느냐에 대한 논의는 망원경을 통한 관측이 가능하기 이전까지는 사변적인 측면에서만 행해졌다. 그런데 망원경을 통한 관측이 이루어지면서 어떤 천체가 빛을 내고 어떤 천체가 빛을 내지 않는지가 분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빛을 내는 천체인 항성들은 천구상에서 고정된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만약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결론은 태양이 고정된 지구 주변을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고정된 태양 주변을 회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톨레미의 체계와 양립 가능한 금성의 식 현상보다는 위의 발견이 새로운 우주론을 위해서 더 중요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웨스트팔(Westfall), 과학과 후원 : 갈릴레오와 망원경

 

   애리우가 갈릴레오의 금성의 식 현상 발견에 대해 지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웨스트팔은 무엇이 갈릴레오로 하여금 망원경을 통한 천문학적 관측에 열중하게 했는지에 대해 당시의 수리천문학자들의 인식적사회적 지위의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갈릴레오 관측의 또 다른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망원경을 통한 천체의 관측이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지지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1610년 당시의 갈릴레오에게 망원경과 그 관측 결과는 그의 지위 상승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당시 갈릴레오는 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두아(Padua) 대학의 교수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후원자들과 정치적 관계를 맺는 것은 중요했다.

 

   갈릴레오는 단일하고 강력한 후원자를 찾아 안정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메디치(Medici)가의 후원을 받기 위해서 나침반을 제작하고 메디치 가의 후계자 코시모(Cosimo)를 가르치는 등 여러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자석을 코시모와 연관시키며 자석에 후원자와 관련된 상징을 부여함으로써 메디치 가문과 자신과의 결속을 더 단단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코시모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투스카니(Tuscany)의 공작이 되자 갈릴레오는 코시모에게 더 높은 지위와 보수를 요청했지만 코시모에게서는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이 때 플란더스(Flanders)에서 온 어떤 사람이 망원경을 들고 왔고 갈릴레오가 이를 개량함으로써 베니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된다.

 

   이후 망원경에 대한 요청이 여기저기서 이어지고, 갈릴레오는 더 좋은 성능의 망원경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최상의 망원경을 통해 그 누구도 관측하지 못한 천체 현상을 관측할 수 있게 된 갈릴레오는 이를 통해 후원자와 협상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되었다. 때마침 그 시기에 목성을 관측한 갈릴레오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발견하고, 코시모는 4형제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목성 위성들의 발견을 코시모와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코시모는 갈릴레오의 의도에 맞게 목성의 위성에 큰 관심을 갖게 되고, 갈릴레오는 자신의 발견에다 메디치가의 이름을 결부시켜 책으로 출판하기로 결심한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의 출판은 당시의 사회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켰으며, 결국 갈릴레오의 전략은 성공하여 그는 피사의 수학 교수로 임용됨과 동시에 메디치 공작의 수학자이자 철학자가 된다.

 

   끝내 후원의 정상에 올라선 갈릴레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는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성들의 정확한 주기를 계산하지는 못했는데, 만약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정확한 주기를 계산하게 되면 자신의 우선권이 위협을 받게 될까 두려워 한 갈릴레오는 이후에도 목성의 정확한 주기를 계산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또한 망원경을 통한 천체 현상의 발견이 새로운 천문학을 지지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의문을 제기한 카스텔리(Castelli)의 편지를 받은 이후, 갈릴레오는 이전까지의 자신의 태도와는 다르게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추측이다. 저자에 의하면 갈릴레오는 처음부터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하기 위해서 망원경을 갖고 체계적인 관측을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본래 목적은 강력한 후원을 획득하는 데 있었으며, 이후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하게 된 것에는 천문학적 관측에 있어서 압도적인 지위에 있던 그가 다른 천문학자들에 비해 뒤지지 않으려는 의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비아지올리(Biagioli), 궁정 신하로서의 갈릴레오1~2

 

   정치경제적인 이해 관계에 무관하고 중립적이며 자율적인(혹은 그래야 하는) 기관이 대학이며, 그러한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학자로서의 교수 또한 중립적이라는 것이 일반인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통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지적했듯, 대학에 대한 이와 같은 중립적이고 자율적인 이미지는 국가와 대학 사이의 특정한 계약이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과학자의 순수한 과학적 활동과 그 과학자가 소속된 정치적 집단 및 그 과학자가 맺고 있는 사회적인 상호 관계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견해였다면, 이러한 견해 또한 그 과학자의 지적 생산물의 본질을 오도하는 또 다른 환상일지도 모른다.

 

   과학자 또한 특정 사회 집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사회인이다. 정치적 이해 관계와 완전히 무관한 사회인은 있을 수 없다. 우리 시대에는 비교적 과학자 집단의 독립성이 잘 확립되어 있지만, 갈릴레오의 시기에는 과학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을 뿐만 아니라 그 지위의 독립성조차도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과학자로서의 갈릴레오의 삶과 그의 과학을 분석함에 있어 그가 당시의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그 시대의 과학적 실천의 본질을 오해하는 결과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론 갈릴레오의 과학적 성과물 그 자체를 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그의 과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지만, 그가 어떤 정치적사회적 맥락에서 과학적 실천을 했으며 그러한 맥락과 그의 과학적 성과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세밀하게 파악하는 것 또한 그의 과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비아졸리의 이 책은 갈릴레오의 과학에 대한 내적 접근의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당시 대학에서 수리천문학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했는지, 당시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강력한 사회적 집단인 궁정(court)이 과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을 진흥함에 있어서 어떻게 문화적 실천을 기획하고 통제하고 조정했는지, 이러한 후원 문화를 작동시키는 기제(mechanism)는 무엇이었으며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러한 기제가 작동했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적 질서와 실천 속에서 과학자로서의 갈릴레오를 위치시키고, 그가 어떤 고려와 전략들을 통해서 이러한 질서와 실천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밝힘으로써 비아졸리는 과학자로서의 갈릴레오와 궁정 신하로서의 갈릴레오가 엄격하게 분리될 수 없음을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있다.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갈릴레오와 과학자로서의 갈릴레오는 분리될 수 없으며, 그러한 두 측면을 뛰어나게 조화시킬 수 있었다는 데에 갈릴레오 특유의 독창성이 있다. 갈릴레오는 단지 수리천문학자로서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뛰어난 정치적 수완가였던 것이다.

 

   근대 초기에 이르면 문화 전반에 걸쳐서 궁정이라는 사회적 장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학문의 영역의 경우 기존에는 교회와 대학이 그 주도권을 장악했고 대부분의 인적지적 교류가 그 두 집단과 관련된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근대 초에 궁정이 급격히 부각되면서 모든 종류의 문화적 활동과 궁정은 서로 필수불가결한 결속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특히 과학자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과학자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궁정 및 궁정 문화와 연계되어야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당시 대학에서 수리천문학자의 지위가 철학에 비해 낮고 주변부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 그가 자신의 영역을 합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대학과는 다른 사회적 집단과의 연계를 통해 스스로의 사회인지적 지위를 높여야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과학자와 궁정의 관계는 더욱 중요해진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그렇듯 후원 관계 또한 그 고유의 복잡하고 미시적인 질서를 갖고 있었다. 후원자와 피후원인이 서로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항상 후원자와 피후원인 사이에 중개자(broker)가 역할을 했다. 후원자, 중개자, 피후원인 모두 복잡한 계층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1605년 이전까지 갈릴레오는 코시모 2세에게 직접적으로 접촉을 요구할 만큼의 지위에 올라 있지 않았고, 그가 그러한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후원 관계의 질서 속에서 계획적이고 신중한 고려를 통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후원 관계는 일종의 권력 관계였고 권력이란 실천되는 과정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고 입증을 하는 속성을 갖기 때문에, 권력의 실천 과정을 유지하기 위해 후원자, 중개자, 피후원인 모두 늘 서로를 필요로 했다. 단순한 보수의 상승이 아니라 고귀함을 얻길 원했던 갈릴레오는 후원자중개자피후원인 사이의 이러한 필요 관계가 엊물리는 방식을 잘 포착해서 신분과 지위가 상승할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해야만 했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일종의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되는 것처럼, 후원 관계 또한 고유의 상호작용 방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선물 교환이었다. 어떤 궁정과 다른 궁정이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서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주고 받아야 했다. 이 때 이러한 선물에 과학자들의 과학적 발명품이 포함될 수 있었다. 다른 궁정을 경유해서 특정한 과학적 발명품(예를 들어 망원경)을 요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과학자들 사이의 교류가 성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궁정 사이의 결속 관계도 유지되었다. 과학적 발명품 뿐만 아니라 과학적 발견(목성의 위성 발견)특정한 과학적 주장에 대한 논쟁 또한 선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었으며, 후원자와 중개인들은 피후원인들 사이의 논쟁을 중개함으로써 이 논쟁은 순수한 과학적 입장에 토대를 둔 경쟁이 아니라, 일종의 유희적이고 형식적인 경기 혹은 시합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과학자들은 단지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그 후원자의 표상(대표)’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주 대단한 선물을 제공해서 메디치 가문이 그 선물에 합당하는 보답을 자신에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갈릴레오가 자신의 지위 및 신분 상승을 위해 사용한 전략의 핵심이었다. 선물은 후원 관계 속에서 후원자와 중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측정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자신의 도전이 메디치 가문에 제대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자석을 코시모 가문과 상징적으로 연계시키려고 시도한 적이 있던 갈릴레오는, 정권 초기부터 코시모 1세가 목성으로 상징된다는 점과 자신의 목성 위성 발견을 기가 막히게 관련지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비를 들여가며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출판하고, 이 책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도구인 망원경을 다수 제작해서 유럽 전역의 궁정에 배포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자신의 발견이 갖는 과학적 우선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별이었던 것을 아주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고 따라서 이를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는 것은 이익과 무관하며’ ‘자발적인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궁정 문화에 익숙했던 갈릴레오는 궁정 문화에 걸맞는 문학적 재능과 재치 있는 말솜씨를 갖고 있었다. 자연 철학 및 과학의 모든 분야에 능통해 있었으며, 궁정 문화로의 편입을 통해 고귀함을 얻으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잘 준비된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개량하고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갈릴레오는 1610년에 메디치 가문의 정식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임명되며, 이 이후 명성 있는 갈릴레오에 대한 비판자들의 비판 강도도 더욱 거세진다. 특히 갈릴레오의 신분 상승 이후 비판자들은 갈릴레오의 발견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함과 동시에 성서의 권위에 대한 위협이 됨을 부각시키고, 이러한 상황에서 갈릴레오는 더욱 더 강력하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비아졸리의 주장이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갈릴레오의 이력은 그가 맺고 있던 후원 관계와 불가분의 연계를 가지며 그가 1633년에 이르러 유죄판결을 받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윙클러(Winkler)헬덴(Helden),갈릴레오와 시각 천문학

 

   어떤 특정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을 할 때는 그 분야에 고유한 방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방식은 시기에 따라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주요 이유들 때문에 변화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철학에 있어 자연을 수학화하는 방법 그 자체를 배제시켰는데, 그에 의하면 자연에 대한 올바른 탐구는 질적 성질을 나타내는 감각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적 성질을 추상화시키는 수학적 방법이 올바른 자연 탐구의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자연을 수학화하는 것은 과학적 탐구의 핵심적인 방법론이 되었는데, 이러한 변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오랜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이와 유사하게 천문학에서의 방법론의 변환 또한 일어났는데 이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천문학적 관측 결과를 모사하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자연의 수학화와 유사하게 이 방법이 처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천문학의 시각화에 대한 갈릴레오와 헤벨리우스(Hevelius) 사이의 생각 차이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갈릴레오는 시각화에 관심이 있었고 실제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 달의 표면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등 자신의 관측 결과를 대외적으로 공표할 때에도 시각화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본격적인 저작인 대화새로운 두 과학에서는 시각화의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만 해도 철학에 속하고 고급한학문에서 기능공의 영역에 속하는 삽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수학자라는 낮은 지위에서 철학자로의 지위 상승을 꾀하던 갈릴레오로서는 자신을 기능공과 엄격하게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도 자신의 망원경은 엄연히 광학에서의 굴절 법칙에 근거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기능공의 산물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갈릴레오는 이렇듯 한 편에서는 시각화를 옹호하면서도 그것을 학문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했다.

 

   이에 반해 천문학을 시각화하는 헤벨리우스의 태도는 갈릴레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헤벨리우스는 천문학적 관측 결과를 시각화하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좀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관측 결과를 모색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갈릴레오가 자신의 언어적 주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관측 결과의 특정한 부분을 부각시킨 반면, 시각화 자체를 천문학에 대한 정당한 방법론으로 여긴 헤벨리우스는 왜곡 없이 최대한 자연적으로 천문학적 관측 결과를 묘사하려고 애썼다. 이후 천문학에서는 이전까지의 시기와는 달리 시각적 표현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갈릴레오와 헤벨리우스의 이와 같은 상반된 태도는 어떤 학문 분야에서의 지배적 방법론이 변화하는 과정을 잘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세그레(Segre), 갈릴레오와 비비아니 그리고 피사의 사탑

 

    우리는 피사의 사탑하면 자연스럽게 갈릴레오의 낙하 실험을 떠올리게 된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초중등과학 교육에서 어김없이 등장해서 학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과연 갈릴레오는 피사의 사탑에서 물체의 낙하 실험을 실제로 수행했을까? 아니면 이는 단지 지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까? 만약 이것이 지어진 이야기라면 그것은 단순히 우화차원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면 이러한 반-허구적인 이야기가 과학자의 입장에서 대중에게 과학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혹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과학사를 서술하는 것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일까? 세그레의 이 논문은 바로 위와 같은 몇몇 문제 의식을 출발으로 왜 갈릴레오의 실험이 문제가 되었는지, 이 실험에 대한 실상은 무엇인지, 만약 이 실험이 사실적이기도 하고 허구적이기도 하다면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지를 조목 조목 따져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