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05: 중세 후기의 과학

강형구 2016. 4. 13. 06:20

 

5: 중세 후기의 과학

 

린드버그(Lindberg), 서양 과학의 시초11~13

 

11: 중세의 우주

 

   7~10장까지 로마시대 이후 기독교적 전통에서 그리스와 이슬람의 과학을 동화시키려는 서양 문명의 노력을 보여준 린드버그는, 앞으로 3장에 걸쳐 이 시기의 우주론, 물리학, 생물학을 서술하고 있다. 백과사전 전통의 학자들로부터 우주에 대한 초보적 지식을 물려받은 서양에 플라톤의 저작이 소개되면서 플라톤 철학과 신학의 우주론을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이런 시도를 한 대표적인 인물들로 티에리(Thierry)와 그로세테스테(Grosseteste)가 있으며, 특히 후자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반영하여 빛으로부터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 12세기까지는 우주가 균질하다(homogeneous)고 여겨졌고 천상계/지상계의 질적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13세기에 이르러 그리스아랍어 저작들이 대부분 번역되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균질적 우주가 아닌 천상계/지상계가 구분된 우주상이 확산되기 시작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이 지적 전통으로 정착한다. 우주 밖에는 물질이 없고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1277년의 금지령을 계기로 다수의 우주 창조 여부, 바깥 천구가 직선 운동을 하는지의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대개 이런 논의들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인정되었으며 몇몇 소수의 인물들(브래드워딘Bradwardine, 오램Oresme)은 이를 긍정하기도 했다. 위의 논의는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며, 기독교적 전통이 신학과 우주론을 조화시키려고 한 결과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바깥천구 등 총 8개의 천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서에 따르면 하늘과 분리된 단단한 것이 위아랫부분의 물 영역들과 다시 분리되므로사람들은 가장 바깥에 천사가 거주하는 천구가 있고, 그 아래에는 수용성 천구가 있으며, 그 아래 항성천구가 있다(따라서 총 10개의 천구)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신학과 우주론이 상호작용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천상계의 물질인 에테르에 대한 논의 또한 일어났다. 가장 바깥천구가 움직이고 그 아래 천구들이 그 움직임을 모방함으로써 천체의 운동이 일어난다면, 가장 바깥천구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Unmoved Mover)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이에 뷔리당(Buridan)은 신으로부터 비롯된 근원력(motive force)인 임페투스(impetus)를 주장한다. 이러한 우주론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천구까지의 거리를 계산하기도 한다(달 천구의 안과 바깥은 107936~209198마일, 토성 천구의 안과 바깥 사이의 차이는 73387747마일).

 

   12세기 후반에 톨레미의 알마게스트가 확산되면서 신학적 우주론을 수리천문학과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등장하고, 이에 따라 수리천문학 모형을 단순히 도구(허구)로 보느냐 아니면 실제의 물리적 실재로 보느냐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중세 초기의 수리천문학은 초보적이었지만 10~11세기에 스페인으로부터 수학적 지식 및 천문측정도구가 유입되면서 이전까지의 질적 천문학이 양적 천문학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천측구(astrolabe)는 별행성의 고도 측정 및 천구를 평면으로 투영하는 등 여러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와 함께 발달된 천문학이론이 도입되고 이 이론을 기독교 문화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하게 된다. 요한네스(Johannes)가 쓴 천구(The Spheres)는 대학에서 초보적인 천문학 교과서로 쓰였고, 이는 이후 좀 더 정교한 천문학을 담고 있는행성론(Theorica Planetarum으로 대체된다. 이와 더불어 천문학 관측 결과가 정리된 알폰소 목록(Alfonsine Tables)이 보급되면서 전문적인 수리천문학 전통이 성립된다. 톨레미가 처음 제기한 수리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조화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의 학자들 또한 관심을 갖는데, 알하이탐(al-Haytham)로저 베이컨(Roger Bacon)귀도(Guido)포이어바흐(Peurbach)와 같은 학자들은 천구이론에 물리적 실재를 부여하려 했다.

 

   우주의 운행이 지구의 사물들에 물리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한 학문을 점성술이라고 한다면 점성술은 중세에 있어 중요한 학문이었다. 천문학적 관찰에 의하면 태양의 운행이 계절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분명하게 여겨졌으며 옛 종교들에서도 천체의 움직임이 지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운동자, 스토아 학파의 유기적 우주 개념 등은 점성술을 인정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톨레미도 자신의 저서에서 지상계에 대한 천체의 영향을 서술하고 있었다. 물론 점성술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비판들은 주로 점성술의 결정론적 성격 및 천체의 신성화에 대한 것이었다. 12세기에 플라톤 철학, 이슬람의 점성술이 들어오며 점성술이 보편화되었고, 알부마살(Albumasar)의 저서 점성술 입문(Introduction)에서는 점성술에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적 토대가 제공되었다. 또한 점성술은 의학과 병행해서 실천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달 아래의 세계인 지상계는 4원소로 이루어지고, 불과 공기는 올라가는 본성을 가진 반면 물과 땅은 내려가는 본성을 가졌으며 이들 4원소는 천체 운동의 영향을 받는다. 혜성의 출현과 무지개 현상은 지상계 천구의 윗부분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되었으며 테오도릭(Theodoric)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무지개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대륙이 유럽아시아아프리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으며, 당시의 지리학적 지식을 대변하는 저자로 플리니우스(Pliny)와 이시도르(Isidore)를 들 수 있다. 중세의 지도는 현대의 지도처럼 계량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은유적역사적장식적인 것이었다. 13세기 후반부터 항해를 목적으로 수학적 지도가 등장하기 시작하고, 톨레미의 저서 지리학(geography)이 알려지면서 원 표면을 2차원 평면에 기술하는 기법이 발달하고 항해 범위도 확장된다.

 

   또한 지구의 회전 여부에 대한 논의 또한 등장하는데, 뷔리당(Buridan)은 지구가 정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물리적인 논변을 펼친 반면, 오렘(Oresme)은 평행 운동이 보존됨을 주장하며 경제적인 관점에서 천구의 회전보다 지구의 회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렘의 논변은 신의 전능함이라는 교리에 의해 설득력을 얻지 못했고, 오렘 또한 자신의 결론이 논증을 통해 믿음을 공격하려는 사람에게 일종의 교훈을 준다고 서술하고 있다.

 

12: 지상계의 물리학

 

   중세 시대에 지상계의 물리 현상에 대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학자들은 능동적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의하면, 형상과 질료가 결합하여 사물을 이루고 사물은 그 본성에 따라 움직인다. 사물에는 본질적 형상(성질)과 부수적 형상(성질)이 있고, 지상계의 모든 사물들은 더 본질적인 4원소로 환원되며 4원소 또한 형상(따뜻함, 차가움, 젖음, 마름)과 질료(원초적 물질)이 결합하여 이루어졌고 상호 변환 가능하다. 아비체나(Avicenna)와 아베로에스(Averroes)는 원초적 물질이 3차원 물질로 변할 때 개입하는 물질적 형상(corporeal form) 개념을 도입했고, 그로세테스테(Grosseteste)는 이 물질적 형상이 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사물들이 원소들의 혼합(mixture)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제기된다. 혼합물 특유의 질적 특성은 언제 등장하는가? 또한 혼합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특성은 어떻게 보존되는가?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천체의 힘, 천체의 지성, 등 다양한 답변이 나왔고, 두 번째 문제는 중세 말기까지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또한 물질의 물리적 분할 가능성 문제도 제기되었는데, 이에 분할은 논리적으로는 무한히 가능하나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제시되었다. 또한 학자들은 고대의 원자론자들과는 달리 가장 작은 물질의 단위는 여전히 질적 특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연금술(alchemy)는 진지하게 탐구된 야금술 및 화학 기술을 의미한다. 당시 사람들은 물질의 변환(transmutation)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이는 일상적인 관찰 및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연금술의 전통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이슬람을 거쳐 다시 서양 문명으로 들어왔다. 연금술에서는 황과 수은의 숙성 및 정화 과정을 통해 모든 금속이 생성될 수 있으며, 금속의 내적외적 속성을 변화시켜 원하는 금속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의 유명한 연금술사인 파울(Paul)은 물질이 원소와 원초적 물질로 분해되지 않는다는 입자 화학적 이론을 제시하고, 이는 세너트(Sennert)로 이어져 이후 보일(Boyle)17세기에 새로운 화학을 수립하는 데 영향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서도 변화는 매우 역동적이다. 변화에는 네 가지가 있으며(생성쇠퇴generation and corruption, 변경alteration, 확장축소augmentation and diminution위치 운동local motion) 위치운동은 위의 네 가지 변화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운동에 대한 중세 학자들의 분석은 다채로운 개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정글과도 같았으며, 운동은 움직이는 물체와 분리될 수 없는 과정그 자체라는 견해와 운동이란 그 자체로 고유한 성질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오컴은 첫 번째 입장으로 운동이란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반면(유명론, 사유 경제의 원리, 오컴의 면도날) 뷔리당은 운동은 장소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일종의 질적 특성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은 14세기가 되면 보편적으로 퍼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입장에서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데까지 나가는 데에는 몇 세기에 걸친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피타고라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아르키메데스를 거쳐 제랄드(Gerard)에 이르면 운동학(kinematics)과 동역학(dynamics)이 구분되며 운동학적 논의에 집중하게 된다. 뒤이은 옥스퍼드 머튼 학파(Merton School)는 이 구분을 강조하며 속도/순간속도 및 등속운동/가속운동을 수학적으로 구분한다. 이 때 속도 개념이 운동의 척도로서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질적 특성의 강도(intensity)와 양(quantity)을 구분하는 전통이 운동에 적용된 결과였다. 죠바니(Giovanni)와 오렘은 이 구분을 기하학적 표상과 결합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성질의 강도를 선분으로 표현하고, 이후 대상을 가로축으로 성질의 강도를 세로축으로 표현한다. 뒤이어 한 쪽 끝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물체의 속도를 수직선으로 표상하고, 이후에는 시간이 가로축이 되고 속도가 세로축으로 추상화된다(속도는 시간의 함수).

 

   또한 운동의 강도인 속도 뿐만 아니라 운동의 양 또한 측정하는 방법을 도입하는데, 이는 등가속도 운동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나타났다. 머튼 학파의 두 가지 정리인 평균속도정리와 운동 시간에 따른 운동 거리의 관계(후반의 운동 거리가 초반의 운동 거리의 3)는 모두 기하학적 분석을 통해 증명되었으며, 이 때의 분석은 실험한 것이 아닌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분석은 이후 갈릴레오에 의해 사용되면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 시대에는 운동학 뿐만 아니라 동역학에 대한 탐구 또한 일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이 자연 본성 혹은 외적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고, 이에 아비체나와 아베로에스는 사물의 형상이 원인이며 질료는 원인이 아니라 보았지만 아퀴나스는 이런 생각을 거부했다. 투사체 문제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체로 운동 원인이 전달된다고 생각했지만, 필로포누스(Philoponus)는 매체는 운동의 원인이 아니라 저항이며 물체 내부에 운동에 대한 근원력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탐구는 로저 베이컨, 아퀴나스, 마르키아, 뷔리당으로 이어진다. 뷔리당은 운동과는 구분되는 내적 특성인 임페투스(impetus)’를 도입하고, 임페투스는 속도와 질량의 곱이며 이 이론을 통해 천체의 운동 및 낙하운동 또한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뷔리당의 기본적 개념틀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동역학(저항속도 사이의 관계)를 수량화하려는 경향 또한 등장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이에 관한 초보적 시도(

)를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속도가 무한하게 되기 때문에 진공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필로포누스는 우리가 실체로 매체의 저항을 측정할 수 없으므로 각각의 물체가 낙하하는 시간을 비교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무게의 차이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별로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이는 매체의 저항이 속도차를 완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브래드워딘(Bradwerdine)은 이전까지의 세 주장들을 수학적으로 개념화하고(

) 각각의 주장들이 모순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반박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동역학 법칙을 제시하는데, 그의 공식은 이전의 세 가지 공식이 보여준 난점들을 피할 수 있었고 이후의 동역학 탐구에 큰 영향을 행사하게 된다.

 

   광학 및 시각 이론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로부터 빛이 들어온다는 삽입이론(intromssion), 유클리드는 수학(기하학) 이론에 바탕한 방출이론을 제시했으며 갈렌은 안구 해부에 중점을 두었다. 알하켄(Alhacen)은 이전과는 달리 물체로부터의 빛의 방출이 비간섭적(incoherent)이라고 생각했으며 눈의 생리학 구조상 눈은 수직의 빛만을 받아들인다고 상정함으로써 삽입방출 이론을 생리학적이고 수학적인 관점에서 통합하며 이후 광학을 더 확장한다. 로저 베이컨은 그리스와 이슬람의 광학 이론을 모두 받아들여 통합하려고 시도하며, 이는 후대의 광학 이론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 중세의 의학과 자연사

 

   로마 제국의 붕괴로 그리스의 지적인 의학 전통이 급격한 쇠락을 보인다. 초기 중세에 전해진 그리스 의학의 성격은 대부분 실용적인 것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저서로 디오스코리데스(Dioscorides)의학재료(De materia medica)를 들 수 있다. 왕족을 치료하는 비종교적 의술인이 6세기 후반기까지 존재했지만, 이후에는 주로 수도원 공동체를 위해 의학이 교육되었다. 기독교적 개념과 그리스-로마 의술 전통이 충돌한다는 것은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었으며 그 두 전통이 극단적으로 대립하지는 않았다. 기독교에서는 질병 및 치료가 모두 영적(spiritual)인 성격을 띠었지만 질병의 자연적 원인 또한 기독교적 전제 하에서 받아들여졌고 교부들 또한 그리스-로마적 전통의 의술을 인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적 치유와 의학적 치유가 혼합적으로 실시되었다.

 

   중세 시대에 교회는 세속적 의학 전통과 교류한 강한 문화적 힘을 가진 집단이었으며 의학을 동화하고 변형시켰다. 8~10세기에 의학 분야의 저서들에 대한 그리스-아랍어 번역이 이루어졌고, 이슬람 의학은 그리스 의학을 완전히 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갈렌(Galen)의 전통을 이어받아 의학과 철학을 결합시켰으며, 이슬람 특유의 방식으로 의학을 역동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슬람 고유의 의학적 내용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11~12세기에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의학 교육의 중심이 수도원에서 학교로 바뀌고 의학 또한 전문화되고 세속화된다. 살레르노(Salerno)10세기 경에는 의학의 실천으로 유명했으나 이슬람의 의학이 받아들여지고 이론 의학이 발전하면서 12세기가 되면 조직화된 의학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초기 중세 시대의 의학적 실천은 비전문적이고 기능적인 과정이었고 세속적 의학과 전문적 의학이 혼재한 상황이었으나 이후에는 두 의학 사이의 구분이 분명해진다. 수도원 학교가 의학을 주로 담당하다 12세기에 이르러 세속적 직업으로서의 의학 분야 및 대학에서의 전문 직위 또한 등장한다. 중세 대학에서 의학이 제도화된 것은 의학의 이론 및 실천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를 통해 의학 연구의 연속성이 보장되었고 의학과 다른 분야의 지식(특히 자연철학)이 연계될 수 있었다. 의학의 교과 과정은 자연철학과 의학 이론 및 실천이 혼합된 것이었으며, 대학을 거쳐 학위를 받은 의학 박사는 엘리트이자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었다.

 

   중세 의학에서는 사람의 몸이 4가지 체액(, 점액, 흑색 담즙, 황색 담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마다 체액들의 구성 방식이 다르다고 보았다. 병은 체액 사이의 조화가 어긋날 때 발생하며, 따라서 병의 치료는 식이요법약물치료방혈 등으로 체액의 조화를 회복함을 통해 이루어졌다. 어떤 사람의 체액 구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관찰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의사들은 주로 왕족에 소속되어 왕족을 전문적으로 치료했다. 당시 가장 흔한 치료법은 약물치료였는데 초기에는 그 지식 수준이 매우 열악했다. 12세기에 갈렌아비체나의 의서가 보급되면서 약학 또한 체계화 및 조직화되며, 이 체계에 의하면 약의 효과는 그 약의 성분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소변분석()과 맥박진단(심장)이 중요한 진단법이었으며, 의학과 점성술 또한 결합하여 전염병에 대한 설명 및 약 처방수술 시기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점성술이 개입했다.

 

   수술은 점차적으로 대학 출신 외과 의사의 전유물로 제도화되는데, 당시에는 아주 간단한 수술부터 좀 더 복잡하고 위험한 수술(백내장 제거 및 방광석 적출 등) 또한 실시되었다. 의학적 실천에서 해부학의 실질적인 필요성은 중세에도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12세기 갈렌의 저서가 번역되면서 의사들은 자신의 지적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체의 구성에 관심을 갖고 해부 활동을 하게 된다. 볼로냐 대학에서 공식적으로 실시되던 해부는 14세기가 되면 의학 교육의 일부로 제도화되었으며, 이 때 이루어진 해부의 주 목적은 갈렌의 의학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신체의 구성 및 기능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15세기 무렵부터 인쇄술 및 삽화술의 발전으로 해부 도식이 정밀화되고 이는 이후의 의학 발전에 있어 토대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중세에는 병 치료 전문 기관으로서의 병원이 발명되는데,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도입된 병원은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12~13세기가 되면 유럽 전역에 설치된다.

 

   중세 시대의 식물학은 의학과 연계되어 탐구되었으며, 초기의 식물학 저서들은 초보적이고 실용적이었으나 이후에는 자연철학적 관점에서 포괄적인 저서들이 쓰여진다. 알베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 동물학에 근거한 철학적 관심에서 동물을 탐구했다. 프레데릭 2세의 저서인 매 사냥법(On the Art of Hunting with Birds)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동물학에는 형이상학적이고 상상적인 요소(각종 우화집에서 볼 수 있는) 또한 강했다. 이러한 우화집들은 도덕적신학적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 쓰여졌으며 교육과 흥미를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