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04: 로마, 중세 초, 이슬람의 과학, 서유럽 학문의 부흥

강형구 2016. 4. 12. 05:24

 

4: 로마중세 초이슬람의 과학 / 서유럽 학문의 부흥

 

린드버그(Lindberg), 서양 과학의 시초7~10

 

7: 로마와 중세 초기의 과학

 

   로마가 그리스를 물리적으로 지배했을지라도 기예적(artistic)이고 지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는 로마를 지배했다. 로마 지배 초기에 로마 상류 계층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함께 사용했다. 당시 학문 활동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졌고, 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후원자(patron)의 기대를 충족시키 위해 로마 청중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주제들(실용적 가치가 있거나 그 자체로 관심을 끄는)을 그리스 문헌들 중에서 골라서 선보였다. 의학, 논리학, 수사학이 로마인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과학 혹은 자연철학은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B.C. 135~51)은 보편학자로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Things)에서 지구의 둘레를 제시하고(180,000 stades) 이는 프톨레미를 거쳐 이후 콜럼부스에게 영향을 미친다. 베로(Varro, B.C. 116~27)는 백과사전인 학문에 대한 9권의 책(Nine Books of Disciplines)에서 문법, 수사, 논리, 산술, 기하, 천문, 음악, 의학, 건축을 제시함으로써 이는 3(trivium) 4(quadrivium)의 기원이 된다. 키케로(Cicero, B.C. 106~43)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고 플라톤 주의와 스토아 철학을 접목시켜 철학을 대중화하고, 거시세계-미시세계(macrosm-microsm) 유비(analogy)를 제시한다.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50)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바탕으로 대중적 백과사전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저술한다. 플리니우스(Pliny, A.D. 23/24~79)자연사(Natural History)에서 엄청난 양의 사실적인 자료를 수집한다.

 

   로마의 주석적 전통으로서 마크로비우스(Macrobius)스키피오의 꿈에 대한 주석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플라톤적 입장에서 자연철학을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르티아누스(Martianus, A.D. 410~439)문헌학과 수성의 결혼에서 차례로 일곱 개의 학문(기하학, 산술, 천문학 등)을 제시한다. 그는 금성과 수성이 태양 주변을 돈다는 언급을 하고 있고 이는 이후 코페르니쿠스가 인용한다.

 

   서로마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고 동로마와 격리되면서 동서 사이의 지적 연속성은 약해지고 서부에서는 지적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번역이 이루어졌다. 칼시디우스(Calsidius)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이는 중세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미친다.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 및 유클리드의 원론, 포르피리우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입문을 번역한다.

 

   기독교 변증론자들(apologetics)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을 종교 변호를 위해 사용하려 했다. 아우구스투스(Augustine, 354-430)는 철학이 종교의 시녀(handmaiden)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사회적 제도들을 고려해볼 때 교회는 과학적 지식의 주요한 후원자였다.

 

   로마 시대에 교육자로서의 문법학자, 수사학자, 철학자에 대한 공식적 지위가 있었다. 교회는 초기에 그리스적 고전 교육에 대한 양가적(ambivalent) 태도를 취하고 있다가 수도원제도(monasticism)를 탄생시킨다. 성 베네딕트(St. Benedict)는 몬테 카지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베네딕트 규칙을 만들었으며, 수도원 교육은 최초에는 수도원 공동체 내적 요구(종교적 목적)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수도원 교육에 고전 교육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수도원이 과학사상 갖는 의의는 지식의 보존(preservation)과 전달(transmission)에 있다. 이시도르(Isidore, 560-636)어원학(Emymologies)에서 사물들의 이름을 어원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사물들에 대한 백과사전적 설명을 보여준다. 베데(Bede)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시각을 유지하고 달력을 통제하는 원리들을 수립한다.

 

   동로마는 비교적 사회적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기존의 지식을 보존하는 데 지적 작업이 치중되었다. 테미스티우스(Themistiu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물리학,천체론,영혼론)을 주석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종합하려 했다. 필로포누스(Philoponus)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리학,지질학)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코스마스(Cosmas)기독교 지형학(Christian Topography)에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의 천문학은 프톨레미의 이론에 대한 주석이 주를 이루었고 이슬람의 과학적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 베사리온(Bessarion, 1403~72)는 투르크 인들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자 알마게스트 대요(Epitome of the Almagest)를 라틴어로 번역한다. 당시 동로마에서는 식물학, 의학, 동물학이 발전하였고, 죽음을 위한 장소가 아닌 병을 치유하는 장소로서의 병원이 등장했다. 동로마에서는 고대의 철학적과학적 유산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라틴적 기독교 전통에서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새로운 지식을 동화(assimilate)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8: 이슬람의 과학

 

   알렉산더가 거대한 제국을 수립한 이후, 그리스의 과학이 페르시아를 거쳐 무슬림 제국으로 유입되는 데에는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Nestorian)파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코란과 함께 거대한 세력으로 융성하고, 이후 군사적인 확장일로를 거쳐 이슬람 제국이 형성된다. 이후 지배자인 알 만수르(al-Mansūr)는 바그다드에 수도를 세웠고 이 시기에 이르면 이전까지의 유목적 생활과는 달리 도시화 된 이슬람 문명이 발전하게 된다. 정복자들의 세력이 점차적으로 몰락하고, 제지 기술이 중국으로부터 도입되고,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학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그리스 과학에 대한 대대적인 번역작업이 시작된다. 이 번역 작업은 지적인 이유(다양한 학문에 대한 지원)와 정치적인 이유(페르시아 제국의 계승자) 때문에 주로 바그다드에서 이루어진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로부터 발생한 점성술에 대한 관심은 점차적으로 천문학, 수학에로 옮아갔다. 이교도 개종을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필요했으며, 그 밖에도 활발한 번역 작업을 가능하게 했던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번역자인 후나인(Hunayn, 808~73)은 상호협력적이고 세심한 번역 작업을 추구했으며, 일대일 대응 번역을 추구하였으며 그에 따른 한계도 있었다. 의사였던 그는 주로 의학서적(갈렌, 히포크라테스)을 번역했지만, 티마이오스를 비롯한 플라톤의 대화편, 형이상학영혼론 등을 포함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 및 논리학수학점성술에 대한 저작 및 구약성서를 번역했다. 그의 아들인 이샤크(Ishāq)는 유클리드의 원론과 톨레미의 알마게스트를, 쿠라(Qurra)는 아르키메데스의 것을 비롯한 수학천문학 저작들을 번역했다.

 

   그리스 과학에 대한 이슬람의 수용은 종교적인 쟁점을 건드리지 않는 실용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소개되었지만(invited guest) 이후 학자들의 왕성한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결국에는 이슬람 고유의 교육 체계와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이슬람의 단과 대학에 해당되는 마드라사(madrasa)에는 상당한 수학천문학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비체나로 알려진) 이븐시나(Ibn Sīnā)는 기존의 아랍 번역본들을 토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톨레미의 저작들을 독파했다. 이슬람 과학의 주 업적은 그리스 과학을 교정확장명료화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새로운 문제에 적용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학에서는 알콰리즈미(al-Khāwrizmī)힌두 숫자에 대하여에서 아라비아-인도 수체계를 도입하고 대수학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실용적 문제를 푸는 데 적용했다. 또한 이슬람 삼각법은 유클리드 원론과 인도의 싯단타를 토대로 발전하여 기술자, 건축가 등에 의해 사용된다. 이슬람 천문학의 두드러진 세 가지 특징은 첫째, 프톨레미 천문학 체계를 검사 및 수정하고 둘째, 행성 운동을 정밀하게 예측하는 모형을 고안했으며 셋째, 공식적 천문학 관측소를 설립했다는 데 있다. 알투시(al-Tūsī)가 설립한 마라가 학파(Maragha school)에서는 프톨레미의 등각속도점(equant)을 대체할 수 있는 물리적 모형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는 결국 알샤티르(al-Shātir)에 의해 성취된다. 천문 관측소는 풍부한 장서 및 관측기구를 갖추고 있었고, 많은 천문학자들이 모여 관측 및 천문학 모형을 제작했고 이후 천문학 지식을 널리 퍼뜨렸다. 마라가 및 사마르칸트(Samarqand) 관측소가 대표적이었다.

 

   이슬람은 기하광학 및 시각 이론에서 기존의 이론을 수정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장까지 제시해서 광학에 대한 새로운 종합을 이루었다(알하이탐al-Haytham의 새로운 시각 이론). 또한 굴절 및 무지개에 대한 실험이 실행되었다. 이슬람 의학의 경우, 후나인은 세 권의 중요한 의서들을 집필했고, 알라지(al-Rāzī)는 일반적인 의학 교과서를, 압바스(Abbās)의예총서, 알카심(al-Qāsim)의학백과를 저술한다. 이슬람 의학은 아비체나의 의학정전에서 절정에 이르고, 비록 그리스 의학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상당한 내적 성장을 이룬다. 이슬람 시대에 병원이 제도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해부학생리학이 발전하고 폐를 통해 피가 순환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9세기 중엽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과학 분야(특히 수학천문학)에서 강도 높은 진전이 이루어졌으며 물론 실용적 목적이 그에 대한 중요한 이유였다. 정치적 변혁 속에서도 군주들이 과학을 후원했으며, 16세기까지 이슬람 과학은 융성했다. 아주 미약한 근거에서 출발한 과학(수학천문학의학)이 다양하고 우연적인 환경 속에서 번성할 수 있었다.

 

9: 서양에서 학문의 부활

 

   초기 중세에서는 신학의 전통 위에서 고대 그리스의 지적 유산 특히 논리학과 형이상학이 신학자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었다. 샤를마뉴(Charmagne) 왕은 캐롤링거(Carolingian) 왕조를 건설하고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해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이 시기에 고전 전통의 책들을 수집하고 이에 대한 필사가 이루어졌으며, 종교적 의식을 위한 시각날짜 계산을 위해 천문학적 지식(마크로비우스의 것을 비롯한 네 권의 저작이 주로 이용)이 이용되었다. 캐롤링거 왕조의 업적은 기존의 문헌들을 복원하고 문자 사용의 범위를 넓혔으며 행성 운동을 기하학적 모형을 통해 표상하려고 다시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

 

  

   에리우게나(Eriugena)는 신플라톤주의의 입장에서 신학을 통합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게르베르트(Gerbert, 훗날 실베스터 2)는 본인이 고전 학문 부흥에 직접 기여하였으며 이슬람의 과학 지식을 기독교 세계에 유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슬람 문명이 스페인을 정복하고 알안달루스(Al-Andalus)에서 문예를 육성시킴으로써 카탈로니아(Catalonia) 르네상스가 펼쳐지고, 이 때 하스데이(Hasdāy)가 카탈로니아로 가져온 수학천문학 문헌들을 게르베르트가 입수한다. 게르베르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 이슬람의 수학천문학을 기독교 세계에 전파하는 데 힘쓴다.

 

   단일 왕조의 등장, 이민족의 격퇴, 정치경제적 번영, 기술의 발전, 인구의 증가 등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교육 기관이 다시 융성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수도원 교육 체제도 발전하기 시작한다. 교육 기관에서는 라틴 고전 문학의 부흥이 일어났고 신학에 이성적 방법론을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안셀무스(Anselm)는 이성적 논의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였고(신 존재의 존재론적 증명), 이는 이성적 논의가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안셀무스와 아벨라르(Abelard)의 예는 이성과 신념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12세기에는 플라톤주의의 시각에서 고대의 저술들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플라톤의 우주론을 성서의 창조론과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티에리(Thierry)가 그런 시도를 하였으며, 그 결과 창조 이후에는 신의 도움 없이 사물들의 본성에 의해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윌리엄(William) 또한 플라톤 철학에 기반해 우주론과 물리학을 구축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든 자연 과정 또한 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며 종교적 해석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시녀였던 자연철학이 점점 신학의 영역으로 세력을 넓히고 신학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신체에 대한 탐구 및 점성술이 부활했고 수학 또한 신학적형이상학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후 기독교 세계에서는 아랍의 발전된 과학 문명을 동화시키려고 시도하는데, 이슬람 지배에서 수복된 스페인 지역이 번역 작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콘스탄틴(Constantine)은 의학 서적을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으며, 제랄드(Gerard)는 톨레미(알마게스트), 유클리드(원론), 알콰리즈미(대수학), 아리스토텔레스(물리학 등), 아비체나(의학정전) 등의 저서들을 번역한다. 그리스어-라틴어 번역도 이루어지는데, 뭴베케(Moerbeke)는 그리스어에 바탕해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을 수정하고 신플라톤주의의 저작 및 아르키메데스의 수학 저작을 번역했으며 서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기독교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교육 기관이 양적으로 팽창하고 몇몇 도시들이 교육으로 명성을 얻는 등 교육 혁명이 일어나고, 교육 집단의 특권 및 제도적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의 자발적 조직인 길드를 본따 교육 공동체인 유니버시티(University)’가 형성된다. 유동적 공동체였던 유니버시티가 정착하게 되면서 왕가나 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커리큘럼 및 학위제도를 통해 독립성을 유지한다. 양적 팽창에 따라 내부 조직을 개편하고(학부 및 대학원) 별도의 교수자 양성 과정 또한 마련한다. 교과과정에서는 톨레미의 알마게스트 중심으로 천문학이 교육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 광범위하게 교육되었다. 대학마다 공통된 교과과정 및 방법론(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학자들에게는 상당한 자유가 보장되었다.

 

10: 그리스와 이슬람 과학의 회복과 융합

 

   13세기가 되면 대부분의 고대 과학 저작들이 그 전모를 드러냈고, 학자들은 그 저작들을 이해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세계상과 융합시켜야 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기독교 신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게끔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가진 범신론적 성격이 파리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교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유용성위험성을 둘 다 인정하면서 그 일부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지만 이는 결국 소용이 없고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은 인문 교육에서 핵심적 역할을 차지한다.

 

   아비체나에 비해 덜 플라톤적이었던 아베로에스의 주석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표준적 주석이 되면서, 세계는 영원하며 결정론적이고 영혼은 물질과 분리불가능하며 물질이 사라지면 영혼 또한 사라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기독교 교리와 충돌을 일으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방법론이 성행하면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연철학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경향이 일어났고, 이는 점차적으로 자연철학과 신학의 분리를 일으킨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과 신학을 조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그로세테스테(Grosseteste)는 플라톤주의의 입장에서 기독교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려 했으며, 로저 베이컨(Bacon)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교회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하면서 과학은 신학의 시녀로서 가치가 있으며 자연철학과 신학을 대립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되거나 무지에 의한 해석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보나벤투라(Bonaventure)는 기독교 신학과 상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배격했다. 뒤이어 알베르트(Albert)는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학의 입장에서 포괄적으로(다른 저자들의 저작들도 참조하면서) 해석하였으며, 영원한 우주 개념을 철학적으로 부정하고 플라톤적 관점에서 영혼 불멸을 옹호했다. 그는 철학과 신학을 구분하고 자연철학은 자연의 원인을 탐구한다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유지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또한 신학과 철학의 조화를 모색했는데, 그는 신학적 목적을 위해서도 철학이 필요하다 주장하고 철학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을 구분했다. 그는 세계의 창조 및 영혼의 불멸성을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과 조화시켜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학에 대한 철학의 공격은 더욱 강해져, 시거(Siger)는 철학적 사유의 결과가 신학과는 대립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보에티우스(Boethius)는 더 나아가 철학적 논증의 결과가 신학의 내용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1270년과 1277년에 걸쳐 2차례의 유죄선고(condemnation)가 내려지고, 기독교 신학 교리에 상치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 내용 및 점성술 관련 내용이 금지된다. 유죄판결은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철학 및 인문학의 영역 확장에 대한 교회의 보수적 반응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이후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훗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대한 비판 및 거부에까지 이르게 한다.

 

  

   유죄판결의 영향은 14세기까지 이어져 철학에 대한 신학의 검열이 이루어지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교육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한다. 또한 유죄판결 이후 철학의 논증 능력에 대한 회의로 인해 철학의 영역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스코투스Scotus, 오컴Ockham). 신의 전능함이 강조되었지만 신의 전능은 우주 탄생 초기에만 국한되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자연철학의 영역이 심각하게 축소된 것은 아니었다. 신의 전능함이 다양한 우주를 만들 수 있었다는 이유로 자연에 대한 더 적극적인 탐구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본격적인 실험적 탐구는 몇 세기 이후에야 진행된다.

 

 

그란트(Grant), 중세의 물리 과학1~12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세 단계에 걸쳐서 변한다. 이단시하고 처벌(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하다가, 신학의 시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저스틴Justin, 클레멘스Clemens), 결국 한 편으로는 긍정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부정하는 이중적 감정(어거스틴Augustine)을 갖게 된다. 이후 교육의 문제(초기 기독교에는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이 없었다) 및 성경 해석의 문제로 인해 점차적으로 그리스의 과학철학에 관심을 보인다. 그리스 후기에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중요한 저자들에 대한 해설 및 주석 작업을 하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책을 만드는 전통(핸드북 전통)이 유행했는데, 이 전통은 로마에까지 이어져 그리스 과학을 선택적으로 번역하게 된다.

 

   이른바 라틴의 백과사전적 전통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세네카(Seneca)와 플리니우스(Pliny)인데, 특히 플리니우스는 자연사에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한다. 플리니우스 이후에는 표절이 심한 백과사전적 전통이 성행하였고, 저자들은 그리스의 원전을 직접 이해하지 않고 단지 인용만 할 따름이었다. 라틴 시대의 주요 저자들로 칼시디우스(Chalsidius), 마크로비우스(Macrobius), 마르티아누스(Martianus), 보에티우스(Boethius),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이시도르(Isidore), 베데(Bede)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저서들 속에 초기 중세까지 전해진 과학적 지식이 담겨져 있었다.

 

   헤라클리데스(Heraclides)는 수성금성태양이 일정한 편차 이내에서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로부터 수성과 금성만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고, 이는 이후 티코 브라헤(Tycho Brahe)에 의해 모든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으로 바뀐다. 이시도르의 저서를 살펴보면 당시의 과학 수준을 알 수 있는데, 산술의 경우 피타고라스 학파와 유사하게 수들을 분류하고 있고 기하학과 천문학의 경우에도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결론적으로 고대 그리스 과학의 내용 일부가 유지되고 있기는 하였지만 백과사전식 나열기술이 주를 이루었고 오류도 많았으며 수준이 떨어졌다. , 이 시기는 과학의 암흑기였다고 할 수 있다.

 

린드버그(Lindberg), 초기 기독교 교회와 과학의 관계

 

  

   기존의 과학사에서는 교회가 과학 발전에 장애물로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에서는 자연 그 자체에 대한 탐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연 탐구의 결과도 성서와 교리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와 과학 사이에는 복잡미묘한 관계가 있었다. 우선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은 고대에는 몇몇 과목(수학, 의학)을 제외하고는 근대적인 과학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대 후기의 철학은 윤리적형이상학적신학적 논의에 치우쳐 있었다. 이 시기에 과연 교회가 그리스 철학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그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기독교 교육이 부실함에 따라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그리스 학문을 알고 있었다. 초기의 변호론자인 저스틴(Justin)은 그리스 자연철학을 공부했으며 자연철학과 성경이 양립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신학을 가장 우위에 둔 상황에서 자연철학을 변론 및 포교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고, 오리겐(Origen)은 자연학에 대해 저스틴보다 더 자유로운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에서는 그리서 자연철학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이 있었지만, 아주 완강하게 그리스 철학에 반대했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의 경우에도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논리적 추론을 사용했고 실질적으로 그가 반대한 것은 이단이었다. 어거스틴(Augustine)의 경우에도 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화합시키려고 하였고, 비록 신앙이 이성보다 우선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 그리스에서는 몇몇 뛰어난 과학적 업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적 과학은 수행되지 못했다. 당시 자연에 대한 입장으로는 자연을 옹호하는 자연철학과 이를 반대하는 그노시즘(Gnosticism) 그리고 중도적 입장인 신플라톤주의가 있었는데, 교회는 주로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다. 어거스틴과 레오(Leo)의 경우 자연에 대한 지식은 성경이 아닌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기독교는 분명 일정 측면에서 과학 탐구를 장려한 부분이 있고, 비실용적이라는 이유로 과학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시기에 교회는 과학을 지지한 기관이었다.

 

   실제로 기독교에 종사했던 바실(Basil)은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 및 4원소설을 받아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철학이 신학보다 아래에 있다는 가정 아래 신학적 관점에서 우주론을 펼쳤다(세 천구 이론). 어거스틴은 초기에 받은 교육에 비해 후년에는 자연철학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지만, 그는 시각에 대해 눈으로부터 광선이 뿜어져 나온다는 플라톤주의적 설명을 하고, 사물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현재태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신과 신이 최초에 사물에 부여한 속성이라는 두 원인 이론을 제시했으며, 초자연적 요소를 도입한다는 이유로 점성술을 비판했다. 필로포누스(Philoponus)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상계/지상계 구분을 비판하고 태양이 불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경험에 근거해서 아리스토텔레스 동역학을 반박했다.

 

   교회와 과학의 관계는 기존의 견해와는 달리 상당히 복잡했으며, 적어도 많은 교부들은 신학적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 자연철학의 많은 부분을 활용했다. 기독교와 자연철학은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삽라(Sabra), 그리스 과학에 대한 이슬람 문명의 전유와 동화

 

   이슬람의 과학 문화는 이슬람 문명 발달의 고유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슬람 과학이 다시 유럽으로 옮겨지는 과정의 문헌 외적 배경활동에 주목해야 하며, 그런 배경 속에서 실시된 번역 작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주목해야 한다. 초기에 수용을 담당했던 학자들은 무슬림(Muslim)이 아니라 헬레니즘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이후 이들은 이슬람 왕조의 지원을 받으며 그리스 과학을 왕성히 수용한다. 근대 과학의 관점과 관심사를 통해 이슬람 과학을 평가해서는 안 되며(코페르니쿠스와 유사한 이슬람의 우주론 체계를 찾는 시도),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 과학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전유(appropriation)한 것으로 봐야 옳다. 초기에 헬레니즘화된 기독교들이 그리스 과학 유입을 위해 노력을 한 후, 아랍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압바스(Abbāsid) 왕조의 대대적 지지를 받으며 바그다드에서 아랍어로의 번역이 진행된다. 우리는 대체 왜 그런 활발한 활동이 진행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스 자연철학을 지지하던 학자들은 종교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기 확신을 잃지 않고 공격적으로 대응했으며, 일부 학자들의 경우 오히려 왕가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리스의 산술천문학논리 등은 종교적법률적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아랍의 공식적 교육기관인 마드랏사(madrasa)는 표면적으로 종교적 교육을 강조했으나, 마드랏사에서 자연철학과 천문학 연구가 비공식적으로 왕성하게 이루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 과학은 실용적인 이유로 이슬람 왕조의 지원을 받았으며, 13세기가 되면 전문 수리천문학자 직위가 모스크에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리스 과학이 이슬람 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유지하기 힘들다.

 

   이슬람은 전유의 과정을 거쳐 결국 이슬람 문화에 맞도록 그리스 과학을 동화(naturalization)한다. 이는 3단계의 발전 과정4단계의 급격한 쇠퇴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에 그리스 과학은 단지 소개되는 수준이었으나(1단계) 이후 그리스 과학에 대한 옹호가 이어지고(2단계) 결과적으로는 이슬람 문화 내에서 동화 내지는 제도화된다. 각 단계별 주요 활동자들(agent)을 살펴보면 1단계에서는 기독교도와 사비교도(Sabian), 2단계에서는 무슬림, 3단계에서는 이슬람 교육을 받은 인물들에 의해 과학 활동이 이루어진다. 어떤 과정을 통해 이슬람 교육이 제도적으로 그리스 과학을 융합했는지는 흥미로운 탐구 주제다.

 

   14세기 이슬람에는 모든 지식이 종교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는데, 이 주장의 근원은 11세기의 가잘리(Ghazālī)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 과학을 수용할 때의 두 가지 태도가 있었는데, 하나는 철학적 과학자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법률가적 과학자의 태도다. 전자는 순수한 지적 탐구를 추구한 반면 후자는 도구적 유용성을 위해 지식을 추구했다. 철학적 과학자들이 과학 활동을 주도한 시기를 통해 그리스 과학에 대한 이슬람의 동화가 이루어졌다면, 법률적 과학자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과학의 도구화가 시작되고 결국 이는 과학의 쇠퇴로 이어진다. 철학적 과학자들의 그 본질적인 목적이 지식 추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슬람 사회에서 그들은 실용적 목적을 위한 일에 종사하는 전문인 자격으로 제도화되었으며, 이는 이슬람 과학의 쇠퇴가 과학적 주도권의 변화로 인해 발생했다는 가설에 대한 하나의 근거가 된다.

 

린드버그(Lindberg), 중세 과학과 그 종교적 맥락

 

   린드버그는 우선 이전까지의 중세 과학사를 역사적으로 요약한다. 중세 과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대한 최초의 반격은 뒤엥(Duhem)이 시작하고 이는 하스킨스(Haskins)손다이크(Thorndike)가 지지한다. 2차 대전 이후 중세 과학사에서는 2가지 경향을 보인다. 첫째는 해석적 경향(내적 접근)으로 역학과 물리과학의 개념 분석에 초점을 두고 중세와 초기 근대과학의 연속성 문제를 탐구하며(마이어Maier, 크롬비Crombie), 둘째는 문헌 중심적 경향으로 중세 과학에 대한 믿을 만한 문헌 확인 및 그에 대한 번역을 중시한다(클라겟Clagett).

 

   다음으로 린드버그는 이후 중세 과학사가들이 탐구해야 할 과제들을 제시한다. 문헌학적 탐구가 계속되어야 하고, 문헌 중심적 경향과 해석적 경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중세과학과 초기 근대과학의 연속성 문제는 계속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중세과학을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누구에 의해 지지후원되었으며 주된 동기 및 시장은 무엇이었는지)이 중요하다. 이어서 린드버그는 ‘1277년의 유죄판결이 곧 근대과학의 탄생이라는 뒤엥의 주장 이후 중세 과학사학자들이 중세 과학과 교회 사이의 관계를 비중있게 탐구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교회는 과학과 무관한 외적 요소였으며, 과학은 교회와 무관하게 자주적으로 발전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린드버그에 의하면 교회는 중세 과학 활동의 적극적인 참여자였기 때문에 중세 과학과 교회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초기의 그리스 과학은 종교와 과학의 시녀로서 역할을 했는데 이는 어거스틴(Augustine)과 베이컨(Bacon)의 경우를 통해 잘 드러난다. 교회가 과학을 후원했다 하더라도 이는 늘 일종의 검열을 동반했는데, 문제는 검열의 정도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 세계관이 경험을 해석하는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기술적인 분과(자연사, 수학, 천문학, 광학 등)의 탐구에는 제한이 전혀 없었고 다만 형이상학, 우주론, 심리학, 물리학과 같은 좀 더 일반적인 분야에 제한을 가했다고 린드버그는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중세의 자연철학자들에게는 사상과 표현의 상당한 자유가 있었고, 이는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중세 교회는 그리스아랍의 과학을 동화했다고 봐야 하는데, 이는 교회에서 신학과 자연철학의 통합 운동(그로세테스테, 알베르트, 아퀴나스, 뷔리당, 오렘)이 일어났고 교회가 학교와 대학의 주요 지원자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린드버그는 중세 과학에 대해 교회가 대립적이었나 지지적이었나와 같은 상반된 구도로 접근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둘 사이에 화해 혹은 적응(accomodation)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타스(Gutas), 초기 압바스 왕조의 이데올로기와 번역 운동

 

   바그다드에서의 활발한 번역 운동은 내전에서 승리했던 압바스(Abbāsid) 왕조가 이후 이슬람 세계를 통합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전략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압바스 왕조의 알만수르(al-Mansūr)는 최초로 그리스 과학점성술을 받아들이고 번역을 장려한 인물로 평가된다. 사산 왕조의 옛 문화를 수용한 결과 점성술의 정치적 중요성이 부각되는데, 압바스 왕조는 조로아스터교의 제국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점성술을 결합하여 왕조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한다.

 

  

   사산인들(Sasanians)은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침략한 후 알렉산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내용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난 뒤 페르시아의 지식을 없애버렸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고대의 지식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저작을 다시 번역해야 한다. 사산인들은 모든 지식이 조로아스터(Zoroastrian)교의 경전 아베스타(Avesta)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페르시아가 이슬람 지배를 받게 된 이후에도 그들은 세상의 모든 지식이 아베스타에 근거하기 때문에 고대의 지식을 되살리기 위해 모든 그리스 과학 저서들(아베스타를 모방한)을 번역하려고 했다.

 

   페르시아에서는 천체의 운행을 통해 신의 뜻이 표현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압바스 왕조에서는 이러한 점성술을 이슬람화시키고, 이를 압바스 왕조의 정치적 지배를 정당화하고 압바스 왕조가 유일하고 정당한 계승자임을 전파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활용했다.

 

   압바스 왕조에 대한 저항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는 조로아스터 전통의 부활이었기 때문에, 이에 알만수르는 이를 제압한 후 저항 세력의 수단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 조로아스터교 및 점성술로 자신의 왕조를 정당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기존의 지적 전통이 유지되던 마르우(Marw)에서 바그다드로 지적 중심지를 이동시킨 것도 그러한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행되었다. 알만수르는 바그다드의 건설에 수학적 지식()을 사용했으며, 이 도시를 건설할 때 근동 지방의 옛 위대한 문명들의 요소를 조합함으로써 압바스 왕조의 전통과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상징하려고 했다.

 

   히크마(hikma)는 고대 사산 왕조의 도서관을 지칭하는 단어이며 압바스 왕조가 새로 건립한 연구 기관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히크마는 사산 왕조 시대에는 왕조 고유의 역사를 보존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지만, 압바스 왕조에서는 옛 이란 전통의 책을 보존하고 번역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했다. 히크마는 행정 부처로서의 성격을 띠었으며 압바스 왕조에서는 천문학수학 활동을 담당하기도 한다. 히크마는 아카데미 수준의 공식적 연구교육 기관은 아니었지만 이는 당시의 번역 문화가 제도화되고 반-공식화 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