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06: 르네상스 - 과학혁명의 지적, 사회적 배경

강형구 2016. 4. 14. 06:13

 

6: 르네상스 - 과학혁명의 지적사회적 배경

 

린드버그(Lindberg), 서양 과학의 시초14

 

14: 고대와 중세 과학의 유산

 

   과연 고대와 중세 과학이 근대 과학의 출현에 어떠한 기여를 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린드버그는 중세가 과학의 불모지였다는 편견은 20세기 이후로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어졌음을 전제하고, 과연 중세 과학과 근대 과학을 구분하는 기존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차례로 묻는다.

 

   비록 중세에 자연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수학적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때의 수학적 작업은 물리적 실재와는 구분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수리과학(mathematical science)'은 탄생하지 못했다는 것이 기존의 첫 번째 주장이다. 그러나 린드버그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및 중세의 여러 학자들이 수리과학과 물리학을 결합시켰으며, 따라서 수리과학이 순전히 16, 17세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존의 두 번째 주장은 근대에 들어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인 실험적 방법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린드버그에 의하면 필로포누스, 겔슨(Gerson), 로저 베이컨 등 고대와 중세의 여러 학자들 또한 이론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기 위해서 실험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 주장 또한 유지되기 힘들다. 고대와 중세의 과학적 실천에 있어서도 실험은 드물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빈번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험적 방법에서 근대 과학의 진정한 기원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린드버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고대, 중세의 과학과 근대의 과학을 구분짓는 것일까? 린드버그는 코이레(Koyré)의 견해를 따라 근대 과학혁명의 본질이 형이상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측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근대의 이른바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는 이전까지의 유기체적인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상을 기초로 하고 있었고, 이 세계상은 이후 자연에 대한 모든 과학적 탐구를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린드버그는 근대 과학에 대한 중세 과학의 분명한 기여를 6가지 들면서 중세 과학의 의의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책을 끝맺고 있다. 중세 과학의 다양한 과학적 활동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좀 더 상세하게 서술했다면 중세 과학의 상이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간결하고 명료한 서술이 이 책의 장점이었다면, 내용을 나열식으로 전개하고 과학 활동의 세부적인 측면을 분석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책의 단점이었다.

 

그란트(Grant), 근대 과학은 언제 시작했는가?

 

   중세의 물리과학을 연구했던 과학사인 그란트는 과학에 대한 중세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과연 어떤 요소들이 근대 특유의 과학적 활동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답을 내리고 싶어한다. 그에 의하면 첫째 요소가 그리스-아랍어 저작의 번역이고 둘째 요소가 중세 대학의 설립이다. 그리스-아랍어 저작이 번역되면서 대학에서는 이러한 번역을 기초로 교과과정을 선정할 수 있었다. 셋째가 신학적 자연철학자의 등장인데, 그란트에 의하면 위의 세 요소들이 모두 결합해서 과학 활동이 제도화되었으며 이는 다른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양 고유의 특징이었다.

 

   질적 특성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기법을 개발했고, 변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굳이 목적인이 필요하지 않으며 다만 그 변화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 “현상을 구제하기 위해이성경험귀납적 일반화를 이용했다는 것, 논변을 함에 있어서 반사실적 가정혹은 사고 실험을 사용했다는 것 등이 중세 자연철학자들의 중요한 기여였다고 그란트는 주장한다. 중세 자연철학자들이 고안한 개념과 정의들은 이후 근대 과학에 중요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근대 과학자들이 중세의 과학자들과 구분되는 이유는 그들이 중세 과학자들과는 다른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같은 질문에 대해 다르게 답을 했기때문이라는 것이 그란트의 생각이다.

 

   그란트에 의하면 과학의 제도화가 근대 과학이 출현하게 된 직접적인 근거이며 이러한 제도화는 중세 시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근대 과학과 중세 과학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 그런데 과학 활동의 제도화가 서양에서 유일한 것이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도 제도화된 천문학 관측소가 존재했고, 중국 및 우리나라에서도 당시의 지배 왕조가 제도적인 연구기관을 만들어서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 근대 과학만의 독특한 특성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서양에서는 학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기관(대학)이 사회적 독립성을 유지했으며, 이는 다른 문명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도 인정한다. 다만 서양의 과학 활동의 제도화에는 단순히 제도적인 측면 이외에 이를 다른 문명들의 연구 기관과 구분짓는 추가적인 특성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회와 대학과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중세 유럽 사회는 교회 뿐만 아니라 대학을 필요로 했을까? 교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교육적 필요성이 대학의 설립을 가능하게 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대학이라는 지식인들의 공동체가 당시 상인들의 공동체였던 길드를 모방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봉건 군주와 교회의 관점에서는 상업의 발전과 상인 계층 및 도시의 성장이 통치의 관점에서 통제하고 억눌러야 하는현상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발전과 상인 계층의 등장 및 조직화는 기존의 정치적 장치를 통한 통제의 범위를 넘어섰고, 이를 군주와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발달과 새로운 계층의 등장이 공식적인 교육 기관인 대학을 설립하도록 만든 강력한 사회적 원천이었다면, 어떤 타협의 과정을 통해서 교회와는 차별화되는 기관인 대학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어느 정도까지 교회는 대학 교육에 참여하는 지식인을 지지했으며, 과연 신과 자연에 대한 탐구에 있어 교회가 담당한 역할과 대학이 담당한 역할은 어떻게 차이가 났던 것일까? 따라서 교회대학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역사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라프톤(Grafton), 신세계와 고전 문헌 : 전통의 힘과 발견의 충격

 

   우리는 아주 낯선 사물이나 상황을 만나면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곧 그 사물이나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라프톤의 이 글 속에서 우리는 신대륙을 발견한 서양의 사람들이 신대륙의 낯선 문명과 사람들을 접했을 때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들이 이러한 문명과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다루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새로운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해석과 태도가 사람마다 다르듯, 그라프톤은 서양에서도 신세계를 해석하고 대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들 속에서 낯선 문명을 다룰 때의 비교학적인 방법의 중요성을 최초로 자각한 인물 또한 등장하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문명을 고대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밝혀진다.

 

   바젤 대학의 교수이자 지도 제작자였던 뮌스터(Münster)의 책을 보면 1550년대 당시의 유럽인들이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기법상 톨레미의지리학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이 책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이 독자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당시의 사람들이 신대륙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책 내용이 온갖 신비로운 일화들로 채워져 있어 여전히 신세계에 대해 서구인들이 신비와 환상을 가지고 있었음 또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의 유럽인들은 다른 대륙(특히 남아메리카)에 있는 괴물같고 야만적인 민족들이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다는 상상을 많이 했다.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의 책이 출판된 이후에 이 두 책이 제시하는 세계상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는 단순히 혁명적인 것만은 아니었으며, 혁명적인 부분 이외에 그들의 저작 중 많은 부분은 이전의 지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새로운 세계관 뿐만 아니라 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헌적 전통 또한 받아들이고 있었고, 따라서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면서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전통과 새로운 세계관으로 어떻게 새로운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특히 정치적으로 분쟁이 잦았던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문명과 민족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국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역사적이고 비교학적인 탐구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이런 역사적이고 비교학적인 탐구로 인해 기존에는 마냥 환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유럽의 고대에 대한 반성적인 비판 의식이 일어났고, 이런 비판 의식은 근대의 서양이 고대의 서양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신대륙의 발견과 근대인들의 자기 우월성 인식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시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은 문명이 시기에 따라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발달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스페인 왕조는 신세계를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을 수립해서 실천했는데, 이 전략에는 유행병을 퍼뜨리고 잉카와 아즈텍 문명을 몰락시키는 등 가혹한 수단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가혹한 활동에 대한 반대가 일어나 이 주제에 대해 대학에서 정식으로 토론이 벌어진다. 이 때 다른 문명의 문화 유산에 담긴 내용을 서양 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과 그 문명의 메시지 그대로를 살리려는 경향이 등장하며, 새로운 문명의 기원과 의미 또한 성서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움직임과 성서는 오직 유대 민족에만 해당하며 타 민족을 성서를 통해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등장하게 된다.

 

아이젠슈타인(Eisenstein), 초기 유럽에서의 인쇄 혁명

 

   이 글에서 아이젠슈타인은 인쇄 혁명으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정보의 보존과 흐름이 과학 혁명을 이루는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존의 자연의 책이라는 개념은 이전까지의 책이 세대를 거듭할 수록 그 진리성과 가치가 떨어지는 것에 대비해서,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가장 믿을 만한 근거는 그 현상 자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전하고 책의 신뢰도가 향상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인쇄 문화가 발전하고 책의 내용이 점점 풍부하고 정확해졌으며 자연의 많은 부분들을 책에 담으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당시 사람들은 단순히 지도에 표시된 것을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실제로 지도에 표시된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지도가 표현하고 있지 않은 영역을 탐색해서 이를 다시 지도로 반영하는 작업을 했다. 메르카토르 또한 그 이전까지의 지리적 지식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쇄 및 출판을 통해 집적한 기존의 지리적 지식을 토대로 자신의 지도를 구성해나갔다. 이제 정보의 유통 그 자체가 학적 탐구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에 이르면 그는 기존의 문헌을 필사하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기존의 문헌들이 수집되어 있었던 까닭에 당시까지 존재했던 모든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 또한 자연 그 자체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당시 그가 누릴 수 있었던 서지 자료의 혜택을 입어 톨레미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다양한 문헌들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사람들이 과학적 문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이 문헌들이 사람들의 자발적인 문제 의식을 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출판이 과학자의 부수적 업무(대표적인 예로 필사)를 엄청난 정도로 줄여주었다는 것이 근대 과학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티코 브라헤의 경우 예전의 천문학적 관측 기록들의 오류를 쉽게 찾고 별들의 위치를 식별하는 데 당시의 출판 문화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당시 대학의 천문학 교과서에 톨레미, 브라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체계 모두가 소개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천문학 체계가 출판을 통해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서로 다른 천문학 체계와 그를 지지하는 관측 자료들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고, 이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유럽 곳곳에서 서로 다른 천문학 체계에 대한 실제적인 관측 및 시험이 이루어졌다.

 

   근대 초기에 과학 활동의 중심지가 어디였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출판을 통해서 정보가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당시 출판에 있어 카톨릭과 개신교가 차지했던 역할을 비교해 본다면, 과학 활동에서의 둘 사이의 비중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과학적 저작물 출판에 대해서는 개신교와 카톨릭이 상반된 태도를 보였으며, 개신교가 출판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카톨릭에서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출판과 정보의 유통이 당시과학 활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가정하면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으로부터 이탈리아 지역에서의 과학 활동의 위축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갈릴레오의 재판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과학적 저작물에 대한 출판이 급격하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근대 과학의 발전을 단순히 내적 요소로만 설명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당시 출판을 통한 정보의 유통과 과학적 작업 부담의 감소가 과학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리스(Harris), 장거리 활동 단체, 거대 과학, 지식의 지리학

 

   근대의 과학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의 천문학 및 물리학(역학)을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좁은 의미에서의 과학적 활동이 과학혁명의 유일한 근원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대의 과학적 활동을 왜곡하는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해리스의 주장이다. 그에 의하면 근대의 과학적 활동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이나 물리학 같은 좁은 영역에서의 탐구 활동 뿐만 아니라 장거리 활동을 위한 단체(회사) 등과 같은 거대 규모의 과학이 어떤 과학적 탐구 활동을 수행했으며, 이러한 거대 규모의 과학이 좁은 영역에서의 과학과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단거리 활동을 위한 단체(대학 등)와는 구분되는 장거리 활동 단체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을 조직하고, 교육시켜야 했으며 이러한 단체가 맺는 네트워크의 규모는 광범위했다. 이러한 단체들의 특징인 먼 거리까지의 이동 및 낯선 땅에서의 집단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천문학, 지리학, 자연사, 식물학 등의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다. 따라서 세빌리아의 스페인 식민지 행정기구였던 카사(Casa)의 도표실(chartroom)에서는 장거리 활동을 통해 얻은 지리학적 지식이 집적하고 널리 퍼뜨렸다. 또한 장거리 활동을 위해서는 선원들을 비롯한 단체원들의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의 VOC에서는 따로 식물학 정원을 만들고 대학의 의학 교수들과 연계해서 낯선 땅의 식물 종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런 장거리 활동 단체들 내부에서도 활동을 위해서 필수적인 식물학 혹은 의학 지식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 단체원들 중 일부가 단체의 활동을 통해 얻은 식물학적 지식이 식물학에서의 과학적 성과가 되기도 했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서 기나나무(cinchona)가 열병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이 열매가 장거리 활동에 있어 표준적인 처방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단체들이 단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학적 지식과 광범위한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단체들의 활동은 지리적으로 넓은 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의 오랜 시간 동안의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좁은 의미에서의 과학적 활동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이었다.

 

   해리슨이 생각하기에 쿤의 과학혁명 개념은 거대 규모의 과학이 보여주는 분산적 발견과 상호 협력적인 작업 활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좁은 영역에서의 과학과 거대 규모의 과학을 모두 다루고, 당시의 지식이 어떻게 획득되고 전파되며 집중되는었지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근대 초의 과학 혁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해리슨에 의하면 이런 미시 과학과 거대 과학의 상호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끔 하는 중간자적 역할을 단체(corperation)가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당시 과학 활동의 행위자로서의 단체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것에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기존 근대 과학 분석의 주된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단체의 위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미시 과학과 거대 과학의 역동적 상호 과정에 주목해야 하고 이런 주목의 도구로서 단체의 분석이 유효할 수 있다는 해리슨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근대 과학의 형성에 있어 장거리 활동 단체가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이는 과학혁명의 중요한 사회적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슈미트(Schmitt),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대한 재평가에 대하여

 

   슈미트의 이 논문 또한 아이젠슈타인, 해리스의 것과 유사한 문제 의식을 보여준다. , 그는 기존에는 근대의 과학적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던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를 재평가할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논의를 전개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대한 기존의 견해에 반대하는 두 가지의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가 근대에 이르러서야 반론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꾸준히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둘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과학적 업적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이 곧바로 사라진 것이 아니며,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은 이후 오랜 기간을 걸치며 서서히 사라졌다.

 

   슈미트는 15세기에 이르러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에 대한 문헌학적 비판 의식이 일어났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러한 비판 의식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어 원전에 대한 관심이 등장했고, 그리스어 원전을 다시 읽고 해설하며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원전의 내용과 당대의 과학적 성과들을 비교하는 작업도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해석 작업은 중세적 문제 의식이 아닌 인문주의 혁명의 영향을 반영하며, 이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더 정확하고 풍부한 이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고 이는 이후 더 정교하게 발전되며(자바렐라Zabarellaregressus 개념 분석),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수사학은 이후의 문학 이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슈미트는 근대 초기 당시에 반-아리스토텔레스 주의를 표방한 인물들에게조차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하비 등의 예를 들면서 설명한다.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에도 그의 우주론 중 많은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흡사했으며, 갈릴레오의 경우에도 끝내 원운동의 우월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원리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 의학의 대표자인 윌리엄 하비의 저서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영향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슈미트는 천문학과 물리학으로 대변되는 과학 혁명의 개념을 통해서는 당시에 성행했던 신비주의나 생물학 발전에 있어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논문 막바지에 이르러 슈미트는 근대 과학에 기여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의 성과 네 가지(논리적 방법론, 대학 교과 과정에서의 오랜 전통, 당시의 새로운 지적 요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 생물학에서의 영향 등)를 들면서 논문 전반에 걸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의 쇠퇴에 대한 자신의 추측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1700년대에 이르러 스콜라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가 당시에 더 발달한 대학으로 인해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그 시기에 이르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는 포섭할 수 없을 정도로 실험의 비중이 커지고, 자연철학에서 수학과 정량화된 방법의 중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슈미트의 논문 또한 근대 초기의 과학에 있어 기존까지는 주변적 요소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근대 과학의 보다 더 다채롭고 역동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코펜하버(Copenhaver), 초기 근대 과학에서의 자연마술, 헤르메티즘, 오컬티즘

 

   코펜하버는 1964년 프란세스 예이츠(Frances Yates)의 책 지오다노 브루노와 헤르메틱 전통의 출판으로부터 중세 후기의 헤르메티즘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언급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이른바 예이츠 논제는 근대 과학과 헤르메티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 논제로 인해 기존에는 부수적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되던 헤르메티즘의 연구가 과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전제하면서 이 주제를 더 자세하게 밝히기 위한 자신의 세부적인 네 가지의 논의를 차례로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헤르메티즘을 정당화하는 데 있어 사용된 이론적 계보학(doxographic)과 이론 그 자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15세기 후반의 플라톤주의 철학자 피치노(Ficino)의 저서들을 보면, 당대의 신비주의 저작의 기원이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라는 견해와 이와는 달리 신비주의 저작의 기원이 그리스의 헤르메스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를 통합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론적 계보학은 기독교 사상을 그리스 이전 사상과 연계시켜서 기독교 사상의 비교우월성 및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정당화에 관한 이와 같은 계보학적 작업은 근대 초기 헤르메티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코펜하버는 근대 초기에 비헤르메틱한 고대중세의 논의들을 통해 자연 마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이 수립되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해서 사물의 본질적 형상과 우연적 형상을 구분하게 되고, 물질에 내재해 있지만 감각을 통해서는 지각할 수 없는 본질적 형상의 작용을 오컬투스(occultus)’라고 명명한다. 이어서 사물의 본질적 형상을 좌우하는 힘의 근거를 묻게 되었고, 당시의 사람들은 이 힘의 근거를 천체의 움직임 속에서 찾게 되었다. 아퀴나스와 피치노의 경우 부적(amulet)의 치유적인 힘이 지각할 수 없는 본질적 형상의 발현이기 때문에, 사악하지는 않으며 신비적이면서 자연적이라고 생각했다.

 

   셋째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근대 초기의 헤르메티즘이 대중화되면서 경험적이고 귀납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특히 대중화된 헤르메티즘은 이전까지 마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생물들에 대한 의학적이고 자연사적인 정보를 근대 초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한 대중적 헤르메틱 설명의 대표적인 예로 전기메기(torpedo)와 가시고기(echeneis)를 들 수 있으며, 비단 이 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유형의 설명을 통해 지식이 전달되었다. 이와 더불어, 천문학과 물리학에서의 혁명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람들이 생물에 대한 이러한 헤르메틱 설명을 이후에로 오랫동안 받아들였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연마술’, ‘오컬티즘’, ‘헤르메티즘이라는 용어를 더 정확하게 사용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 대상물의 본질적 형상 및 그에 영향을 주는 천체의 힘과 관련된 것이 오컬트이며, 이러한 오컬트를 질병 치료 및 농업 등에 유용하고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자연마술이다. 또한 헤르메티즘은 헤르메티즘과 관련된 당시의 철학적 저작들 및 대중적 저작들을 지칭하는 문헌적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코펜하버는 헤르메티즘과 관련해 앞으로 추가적으로 탐구해야 할 4가지 주제들을 제시하며 자신의 논의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 논문은 과학사에서 새롭게 제기된 주제에 대한 더 세부적인 탐구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부족한 부분은 무엇이며 어떤 주제들을 더 연구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